박가분 진보너머 운영위원이 내 글 ‘현대화폐론 비판’(〈노동자 연대〉 379호)에 대해 건설적인 논평을 시도했다. 그 글의 제목 ‘MMT가 마르크스주의를 만났을 때’(〈노동자 연대〉 384호)부터가 흥미로운데, 현대화폐론(이하 MMT)과 마르크스주의가 생산적 논의를 통해 시너지 효과를 낼 수 있다는 취지로 읽혔기 때문이다.

박가분 운영위원은 “학술적·이론적 쟁점보다는 정책적 시사점과 운동 전술에 관한 부분을 중심으로 서술”한다고 밝히고 있는데, 이것은 토론과 논쟁이 학술적으로 흐르지 않고 사회운동의 발전에 도움이 되도록 하자는 의미로 여겨진다. 그럼에도 나는 박가분 운영위원의 제안이 “사회변화의 전망과 전술을 더욱 풍부하게 할 수 있”는지에 대해 의구심을 갖고 있다.

첫째, 국정화폐론과 MMT를 등치시킬 수 없다고 지적한 부분이다. 나도 “학술적·이론적 쟁점”에 집중할 생각은 없다. 물론, MMT 주창자들이 단일하지 않고 그중에는 국정화폐론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이 있을 수는 있다. 하지만 대다수 MMT 주창자들은 국가가 화폐를 창출한다는 점에 착안하므로 화폐국정설에 기반을 두고 있다는 내 주장이 그리 큰 오류는 아닐 것 같다.

둘째, 내가 MMT에 대해 “국가가 돈을 푸는 행위는 가치 또는 국부를 증대시키지 못한다”고 한 비판이 초점에서 벗어나 있다고 지적한 부분이다. 사실 이 쟁점은 MMT와 마르크스주의, 더 넓게는 케인스주의와 마르크스주의 사이의 결정적 차이점이라 할 수 있다.

박가분 운영위원은 “어떤 MMT 학자도 돈을 푸는 행위 자체가 국부를 증대시킨다고 말하지 않는다”고 썼지만, 동시에 MMT와 포스트케인스주의자들이 “‘이미 존재하는’ 유휴자원과 노동력을 어떻게 사회적으로 유익한 방식으로 재조직할 것인지를 고민”한다고도 했다. 그런데 이것이 바로 “국부를 창조하겠다”는 것 아닌가. 좀더 쉽게 말해 MMT나 포스트케인스주의자 그리고 케인스주의자 모두 경기부양 또는 국가의 화폐 발행 등을 통해 완전고용(까지는 아닐지라도 더 많은 고용)을 이룰 수 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2008년 미국발 경제 위기와 현재진행형인 2020년의 코로나19발 경제 위기 때 전례 없는 재정 지출이 있었지만 완전고용은 고사하고 경제가 나아지지 않았다는 사실은 국가의 화폐 발행이나 재정지출 정책에 한계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보여 주는 것 아닐까?

MMT 논자들이 이에 대해 돈을 더 많이 풀지 않아서 그렇다고 말하는 것은 여전히 자본주의 사회의 잉여가치(또는 주류 경제학의 표현으로 바꾸자면 부가가치)가 어떻게 생성되는지를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 아닐까 한다.

나는 잉여가치가 어떻게 생성되고 또 어떻게 분배되는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계급 관계와 착취의 문제가 중요하다고 지적했고, MMT가 이런 점들에 천착하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즉, MMT 논자들도 현대 금융 시스템 속에서 재정정책의 효과를 따져볼 텐데 그러려면 소득분배 이전에 생산수단의 분배가 잉여가치의 분배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살펴봐야 하고, 이것이 재정정책에는 어떤 효과를 미치는지 살펴봐야 할 것이다.

총체적 세계관

셋째, MMT가 역사유물론 같은 어떤 총체적 세계관이 아니라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는 지적에 대해서는 전적으로 공감한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차이가 단지 어떤 세계관을 받아들이는지에 대한 선호 문제에 그치는 게 아니라는 점이다.

이 점은 내가 바로 앞에서 지적한 점(MMT 논자들은 잉여가치가 어떻게 생성되고 어떻게 분배되는지에 천착하지 않음)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 다시 말해, 소수가 생산수단을 소유·통제하면서 잉여가치(이윤)를 위해 생산을 조직하는 체제에서는 정부의 화폐 발행과 재정정책이 왜 제한적 효과밖에 낼 수 없는가 하는 물음 말이다.

내가 이전 글에서 케인스 자신은 “자본의 한계효율이나 유동성 함정 등의 개념을 가지고 있어서 화폐를 푸는 것만으로는 경제를 부양하는 데 한계가 있음을 알았다”고 한 부분이나, “민스키와 칼레츠키는 실물경제를 포함하는 경제 전체의 큰 그림을 이야기했다”고 한 부분도 이와 관련된 것이다.

물론 마르크스주의에서 보기에는 케인스나 칼레츠키·민스키의 이론도 부족한 점이 있다.

이처럼 마르크스주의는 화폐와 재정정책에 대한 관심을 넘어, 자본주의 생산양식의 특징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고 본다. 즉, 역사유물론에 기반을 두고 있기 때문에 MMT에서 제안하는 정책들이 큰 효과를 내기 어렵다고 보는 것이다.

넷째, 일자리 보장제와 관련한 것으로 박가분 운영위원은 이렇게 지적했다. “다수의 MMT 학자들은 실업에 대한 해법으로 일자리 보장제를 내세운다. 일자리 보장제란 일할 의지가 있는 모든 인민에게 국가가 최저임금 혹은 생활임금 그리고 그와 결부된 사회보장 혜택을 동반한 고용을 조건 없이 제공하는 제도이다.”

나는 박가분 운영위원의 이런 제안의 취지에는 공감하는 부분이 있다. 정부의 일자리 보장제로 실업을 최대한 줄이고, 이를 통해 노동자들의 힘을 강화하자는 취지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일자리 보장제가 노동계급에게 진정 실업 문제의 대안이 될 수 있는지는 여전히 쟁점이다.

나는 이전 글의 말미에 “진정한 개혁은 계급 투쟁을 회피한 채 이룰 수는 없을 것”이라고 지적했는데, 이는 어떤 개혁이든 국가와 민간기업 그리고 더 넓게는 체제에 맞서 노동자 대중이 힘을 보여 주고 투쟁을 마다하지 않을 때에만 알량한 개혁조차 쟁취할 수 있다는 의미였다.

그런데 실업 문제를 최소화하기 위한 노동자 투쟁의 초점이 일자리 보장제에 맞춰져야 하나? 일자리 보장제는 민간 부문에서 생겨나는 실직의 위기에 맞선 노동자 투쟁이나, 민간 부문에서 양질의 일자리를 창출하기 위한 정부 정책의 필요성을 제기하지는 않는다.(더 자세한 논의는 다음 글을 참조하시오. ‘국가 일자리 보장제 제안, 어떻게 볼 것인가?’, 〈노동자 연대〉 368호)

MMT에서 제기하는 정부의 구실은 보조적인 공공 일자리로 실업자들을 흡수하는 데 있다. 주요 현대화폐론자인 랜들 레이는 경제적 충격을 흡수하는 “완충 재고(在庫) 정책을 펴자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MMT 논자들은 민간 부문의 임금·고용 구조에 부담을 주지 않으려고 일자리 보장제로 생겨나는 공공 일자리를 임시적이고 질을 낮은 수준으로 제약한다. 마찬가지로 박가분 운영위원도 다른 글에서는 일자리 보장제가 “‘자동안정화 장치(automatic stabilizer)’의 유력 후보로 주목”받는다고 쓰고 있다.

박가분 운영위원은 “‘일자리 보장제가 자본주의의 내적모순과 계급투쟁을 회피하는 수단’이라고 비평하는 것은 지나치게 손 쉬운 방식이다” 하고 주장하며 마르크스주의자들에게 ‘발상의 전환’을 촉구한다. 하지만 자신의 일자리를 지키고, 장시간 노동 문제 해결을 위해 일자리를 늘리라는 투쟁에 나설 자신감이 없는 노동자들이(즉 계급투쟁을 회피하는 노동자들이) 일자리 보장제라는 대안을 두고는 제대로 된 투쟁을 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 자체가 환상이다.

이런 점에서는 나는 노동자 대중의 힘과 투쟁 없이 정부에 참여해 정책을 펼치거나 국회에서의 입법 활동으로 일자리 보장제 같은 개혁 조치들을 도입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은 의회주의적 환상이라는 점에서 “국가에 대한 물신적 숭배 같은 것으로 나타날 수 있다”고 지적한 것이다.

사회 변화의 전략

마지막으로 사회 변화의 전략과 관련된 문제를 지적하고 싶다.

박가분 운영위원은 국가의 발권력에 대한 민주적 통제가 중요하다고 지적한다. 일자리 보장제나 사회적 투자은행 또는 공공은행 설립을 위해서는 공공의 재원조달이 필요한데, 이를 충족시키기 위해서는 “정부의 발권력을 공익적 목적을 위해 활용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는 “경제적 조직형태를 민주주의적으로 재편하는 경험”이 노동자 대중으로 하여금 자본주의 극복을 위한 자신감과 전망을 갖도록 하는 데 중요하다는 점을 지적했다.

그런데 노동자들이 자본주의를 극복할 수 있다는 자신감은 꼭 그린뉴딜 정책이나 일자리 보장제로만 얻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작업장에서 휴식시간 보장이나 작업용 장갑 지급 같은 사소할 수도 있는 노동조건 개선을 위한 대립과 갈등 속에서도 노동자들은 자신의 힘과 자신감(이를 마르크스주의자들은 계급의식이라 부른다)을 자각할 수 있다.

노동자들이 “자본주의를 극복”할 수 있는 자신감과 전망을 갖도록 하기 위해서는 정부의 발권력 문제뿐 아니라 다음과 같은 물음에 대해서도 답변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국민주권이 보장된 사회에서 왜 노동자 대중은 국가를 통제하지 못하는가? 그렇다면 국가란 무엇인가? 재정지출을 많이 할 경우 기업주들이 왜 싫어하는가? 케인스주의 정책이 왜 완전고용을 달성하지 못했는가?

이런 점들은 모두 정부의 재정정책 이상에 대한 논의를 필요로 한다. 심지어 경제 이론을 넘어서는 총제적인 세계관을 필요로 한다.

박가분 운영위원은 MMT와 마르크스주의가 서로 시너지 효과를 낼 수 있다고 기대하는 듯하다. 하지만 실제로는 MMT가 화폐 이론과 재정정책에 초점을 맞춤으로써 사회 변화 전략을 협소화하고 사회 변화의 진정한 동력을 놓치게 만들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