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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이냐 혁명이냐는 무의미한 물음이 아니다

요즘 좌파에서 유행하는 주장 중에 ‘개혁이냐 혁명이냐’ 하는 문제 제기는 의미가 없다는 주장이 있다. 자본주의가 더는 진정한 개혁, 즉 대중의 삶을 개선하는 개혁을 제공할 여력이 없으므로 ― 소위 “개량의 물적 토대가 없으므로” ― 개량주의 이데올로기는 약발이 먹히지 않게 됐다는 것이다.

이런 주장은 두 가지 점에서 잘못됐다. 첫째, 이런 주장은 개량주의 사상이 광범한 대중 속에서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 없는지는 체제 내에서 개혁을 성취하느냐에 달려 있다는 가정에 근거하고 있다.

그러나 개량주의는 어느 피억압 집단이든지 저항을 시작할 때 처음 보이는 자연스런 반응이다. 피억압자들은 기존 사회에서 자랐고 다른 사회를 알지 못한다. 그들은 기존의 방식대로 세상이 돌아가는 것을 당연시한다.

그래서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지배적 사상은 지배계급의 사상”이라고 했던 것이다. 그람시는 어느 사회든 상식은 바로 그런 사상을 당연시한다고 지적했다. 그래서 사람들은 처음 투쟁 요구들을 내놓을 때 기존 사회의 틀 안에서 받아들여질 만한 걸로 제기한다.

그래서 봉건 사회의 농민 반란은 흔히 나쁜 영주나 군주 대신에 좋은 영주나 군주를 그 자리에 갖다놓는 것을 요구했다. 1905년 러시아 혁명은 시위대가 그들의 ‘작은 성부(聖父)’ 짜르에게 경찰 간부들과 공장 관리자들의 ‘악행’을 바로잡아 달라고 요청하는 운동으로 시작됐다. 1894년 갑오농민전쟁의 지도부도 조선의 국체 자체를 변혁하려 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일부 지도자들은 대원군에게 환상을 갖고 있었다.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저항을 시작하는 사람들은 노조 협상만으로 된다거나 의회를 압박하면 된다는 생각을 갖고 있는 경우가 흔하다. 개량주의란 그런 협상이나 압력을 일상적으로 조직하겠다는 생각이 구체화된 것이다.

개량주의 단체가 처음 등장할 때 그 선구자들은 위대한 영웅적 투사인 경우가 흔하다. 1970∼80년대 군사독재에 항거한 민주투사들이 그랬고, 1980년대 말 현대중공업‍·‍현대엔진 노조 지도자들이 그랬다. 1840년대 차티스트 운동가들과 만델라나 음베키 등 남아공 아파르트헤이트 투사들도 그랬다.

그러다 시간이 흘러 지배자들이 그 운동의 지도자들과 대화하기 시작하면 협상을 전담할 상근관료 기구나 대표 기구가 생겨난다. 이들은 곧 자신들의 협상자‍·‍중재자‍·‍대표자 구실을 가장 중요한 일이라고 과대평가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세월이 갈수록 대화‍·‍협상 대상과 비슷한 가치관을 공유하기 시작한다. 기업 사용자와 어울리는 가운데 고문변호사 같은 대우를 받고 싶어한다.

물론 이런 상황은 자본주의가 확장할 때 일어나기 쉽다. 자본주의가 개혁을 양보할 여유가 있기 때문이다. 1850∼60년대나 1950∼60년대 같은 때가 그런 때였다. 그런 상황에서 노조나 의회의 전문중개자는 운신의 폭이 비교적 넓다. 그들은 수많은 노동자들의 생활수준 개선을 자신들의 공로로 돌릴 수 있다.

그러다가 개혁을 쉽사리 얻지 못하는 때가 도래한다. 1997∼98년 국제통화기금을 불러들인 경제 공황 때가 그런 때였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상식이나 상식에서 비롯한 개량주의 사상이 사라지는 건 아니다. 따라서 개량주의 단체들도 물론 사라지지 않는다. 사람들은 파업이나 거리 시위 등 직접행동으로 항의를 하더라도 ‘정상적인’ 통로를 통하자고 주장하는 사람들에게 설득될 수 있다. 1980년 서울의 봄이 그런 경우였고, 1981년 폴란드 연대노조 총파업이 그런 경우였다. 1968년 프랑스 노동자들도 그렇게 설득됐다.

이 ‘정상적인 통로’가 처참히 실패로 돌아가도 이런 설득이 먹힐 수 있다. 지난 몇 년 간 여러 노동쟁의에서 노조 지도자들은 투쟁 수위를 낮춘 다음, 성과를 얻지 못한 것은 싸워도 안 된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이라고 조합원들에게 설교했다. 이수호 집행부는 아래로부터의 투쟁 대신에 산별노조와 사회적 교섭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이제, ‘개혁이냐 혁명이냐’는 문제 제기가 의미 없다는 주장이 잘못된 두 번째 이유를 살펴보자. 개혁으로의 길은 폐쇄되지 않았다. 개혁의 가능성은 언제나 조금은 열려 있다. 만약 자본가들이 크게 위협을 받는다면 자본가들은 자신들의 국가가 개혁을 제공하는 것을 허용할 것이고, 개량주의자들은 바로 자신이 그것을 얻어 낸 것이라고 주장할 수 있다. 자본가들은 반격을 위한 시간을 벌려면 이 수밖에 없다는 걸 안다.

1936년 프랑스에서 그런 일이 벌어졌다. 전 세계의 자본주의가 사상 최악의 위기를 겪고 있었다. 그러나 프랑스의 모든 주요 공장들에서 파업과 점거가 확산되자 자본가들은 새로 선출된 민중전선 정부 ― 자본주의를 옹호하는 급진당도 참여했다 ― 가 노동시간 단축과 사상 최초의 유급휴가 제공을 허용했다. 그 뒤 운동은 사그라들고 사용자들은 반격해 주도력을 되찾았다. 개혁입법을 통과시켰던 바로 그 의회가 이번에는 (프랑스 자본가들의 압력에 의해) 개혁을 도로 회수해 갔다.

이런 경험들은 오늘날과도 관련성이 크다. 억압과 착취에 대한 저항의 꾸준한 지속에도 불구하고 개량주의 사상의 영향은 결코 사라지지 않고 있다. 수전 조지, 조지 몽비오, 베르나르 까쌍 등 대안세계화 운동의 지도적 사상가들은 위로부터의 책략과 아래로부터의 압력이 제대로 결합되면 진정한 개혁들이 가능하고 지속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또한 최근에 룰라는 ‘신자유주의와의 결별’(자본주의 소유관계는 내버려둔 채)에 대해 얘기한다.

이런 상황에서 1백여 년 전 룩셈부르크와 베른슈타인의 ‘개혁이냐 혁명이냐’ 논쟁은 유효하다. 개량주의에 반대한다 해서 개혁을 위한 투쟁에 반대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 투쟁의 가장 헌신적 투사가 돼야 한다. 또한 체제 전체에 반대한 투쟁은 개혁을 위한 투쟁으로 시작되곤 한다. 그랬다가 추진력을 얻으면 성장한다.

그러나 아래로부터의 대중 행동을 바탕으로 국가 권력에 도전하지 않으면 개혁들을 끝까지 지키는 것은 불가능하다.

개량주의는 그런 항쟁을 하기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 논의조차 안 하고 결정적 순간에는 주춤주춤 물러서는 경향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개혁이냐 혁명이냐 논쟁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고 또 그렇게 돼서도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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