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국정감사에서 국민의힘 의원 김병욱이 서울시교육청이 실시하는 성교육의 내용을 문제 삼아 논란이 됐다. 교육 내용 일부가 ‘모든 남성을 잠재적 성범죄자로 취급’하고 있어 문제라고 지적한 것이 하나의 쟁점이 됐다.

김병욱은 동성애를 자연스러운 성애의 하나로 소개하고 트랜스젠더 차별에 반대하는 교육 내용도 문제 삼았다. “너무 과격하고 급진적[이다.]”

이렇게 성소수자 차별 반대 내용을 문제 삼은 것에서 보듯, 김병욱의 질의는 평등하고 개방적인 성교육에 대한 보수적 공격의 일환이다.

김병욱은 지난해에도 여성가족부가 추천한 성교육 도서들이 어린이들을 “조기 성애화”할 수 있고, “동성애를 자연스러운 것으로 미화한다”며 공격한 바 있다.

당시 김병욱이 “조기 성애화” 운운한 책은 덴마크 등지에서는 아동 인권교육 자료로 활용되는 책으로, 성관계와 임신, 출산에 대해 솔직하고 구체적으로 묘사해 호평을 받았다.

김병욱의 반응은 성에 대한 보수적이고 금욕적이고 편협한 태도에서 비롯한 반발(반동)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김병욱은 바른인권여성연합 같은 보수 여성단체와 우파 기독교 단체들의 지지를 받았다.(이런 공격에 겁먹고 후퇴한 여가부가 결국 이 책들을 전량 회수한 것은 잘못이었다. 관련 기사: ‘우파의 위선적인 성교육 공격에 후퇴한 문재인 정부’, 〈노동자 연대〉 333호)

많은 청소년 성소수자들이 학교 안팎에서 천대와 냉대로 고통받아 온 현실을 생각하면, 성소수자들의 권리를 옹호하는 내용의 성교육은 오히려 일찌감치 이뤄졌어야 했다.

그런데 성교육이 모든 남성을 잠재적 성범죄자로 취급해선 안 된다는 지적은 단지 김병욱 같은 자의 보수 반동적 딴죽걸기로만 치부해 버리고 끝낼 문제가 아니다.

물론 김병욱은 그간 일부 급진 페미니스트들이 보여 온 과도함에 대한 대중의 반감을 교활하게 이용하려는 것일 뿐이다.

그동안 학교 안팎에서 이뤄지는 성교육이나 성폭력예방교육에서 남성 일반을 잠재적 가해자로 매도하는 일이 종종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가령 지난해 여가부 산하 한국양성평등교육진흥원에서 제작한 성평등 교육 동영상은 노골적으로 이런 인식을 드러냈다. 이 동영상은 제목부터 “잠재적 가해자의 시민적 의무”이고 “남성이 스스로 잠재적 가해자가 아님을 증명하라”는 내용을 담아 커다란 논란이 됐다.

물론 성범죄 가해자의 대부분이 남성인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 말이 곧 대부분의 남성이 성범죄를 저지른다거나 잠재적 가해자임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N번방이나 버닝썬 사건 같은 성범죄가 벌어졌을 때도 여성뿐 아니라 많은 남성이 공분했다. 또, 불법촬영 항의 시위나 미투 운동 등 주요 여성운동들은 많은 남성의 지지를 받았다.

남성을 도매금으로 매도하는 관점은 성범죄를 남성의 본성에서 비롯한 일로 여긴다. 그러나 이는 성별 고정관념과 거울 이미지일 뿐이다(전제를 공유한 채 뒤집힌 결론을 내림).

이런 생물학적 성차론은 과학적 근거가 없을 뿐 아니라 변화의 전망을 거기서 찾을 수도 없다.

성범죄의 근원은 여성을 지배하려는 남성의 본성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살고 있는 자본주의 사회 체제에 뿌리를 두고 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현재와 후대의 노동력을 재생산하는 책임은 개별 노동계급 가정에 떠넘겨져 있다. 이 때문에 남녀 노동계급은 무거운 부담에 짓눌려 살지만 지배계급은 커다란 득을 본다.

여성이 사회 전반에서 겪는 체계적인 차별은 이런 체제의 작동 방식에서 비롯한다. 여성은 아이를 돌보는 1차적 책임자로 여겨지고, 그 일에 적합한 본성을 가지고 있다는 관념이 널리 부추겨진다. 여성이 경력 단절, 저임금, 낮은 처우를 감수하는 것이 당연시되고, 여성의 몸을 성적 물건 취급하고 여성의 성적 의사가 종종 무시되는 것도 이런 여성의 낮은 지위와 관련있다.

따라서 성차별과 성폭력을 끝장내려면 자본주의 체제와, 그 수혜자들인 지배계급에 도전해야 한다. 이를 위한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남녀 노동계급의 단결된 투쟁을 건설하는 것이다.

남성을 잠재적 범죄자로나 취급하며 적대하는 정치는 성차별에 반대하고 반대할 수 있는 우군을 소원하게 만들고 밀어 내어 운동의 확대를 가로막고 오히려 운동을 불필요하게 분열시키기 쉽다.

또한 이런 태도는 노동계급 남성 개개인을 폭로·규탄·단죄하고 운동 내의 ‘가해자’ 찾기에 몰두하는 실천으로 이어지기 쉽다. 이는 진정으로 맞서 싸워야 할 대상을 오인하게 만들어 에너지를 낭비하게 만든다. 실제로 지난 몇 년간 급진 페미니즘의 이런 분열주의는 곳곳에서 반목을 키웠고, 그 결과 여성운동의 신뢰를 실추시키는 데 일조했다.

최근 급진 페미니즘의 과도함을 보여 주는 사례 하나는, 민주당 내에서 김두관 의원이 오거돈 전 부산시장 성추행 사건과 관련해 “성범죄는 개인의 일탈”이라고 한 것을 두고 민주당의 젠더폭력신고상담센터가 “2차 가해’로 규정하고 김두관의 징계를 청원한 것이다.(이 센터의 센터장은 권인숙 의원이다.)

성교육이나 성인지 교육에서 남성 일반을 죄인 취급하는 태도는 성평등 의식을 고양시키는커녕 필요한 토론을 가로막고 위축시키는 효과를 내기 일쑤였다. 성교육의 특성상 솔직하게 터놓고 얘기하는 게 필수적인데도 말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급진 페미니즘의 과도함은 성적 보수주의로 이어질 위험도 있다. 극도의 주관주의를 특징으로 하는 피해자 중심주의-2차가해 개념이 여성운동에서 널리 사용된 것은 국가기관의 보수적 행정을 정당화하는 데 이용되기도 했다. 광주교육청에 의해 배이상헌 교사의 성평등 교육이 오히려 “성폭력 가해”로 몰려 부당한 박해를 받은 일이 단적이다. 대부분의 여성단체는 침묵하거나 아니면 오히려 광주교육청을 편들며 교사 노동자 탄압에 동조했다.

반면 대다수 급진 페미니스트들은 많은 남성들이 가질 법한 불만을 모두 보수적 반발(백래시)로 취급해 왔다.

여성 차별에 반대하면서도 남성을 예비 범죄자로 취급하는 것에는 반감을 느낄 수 있는데, 이를 우파들의 안티 페미니즘 공세와 구분하지 않는 것이다.

이런 상황은 우파들이 급진 페미니즘 일각의 과도함을 지지 세력을 확보하는 데 더 쉽게 이용할 수 있게 해 준다.

이 점에서, 여성학자 권김현영이 ‘모든 남성이 잠재적 가해자가 아니’라는 말을 모두 성폭력에 대한 관심 모으기에 대한 “찬물 끼얹기”로 일축한 것은 여성 운동의 전진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한겨레〉 10월 12일).

물론 성교육에 대한 김병욱의 반동적 비난은 위선 그 자체다. 그러나 한 우익 반동 인자의 가식적인 헛소리와 별개로 강남역 사건 등을 계기로 남성을 잠재적 젠더 폭력범 취급하는 태도가 급진 페미니즘 내에서 폭넓게 있어 왔고, 그런 주장이 반발과 역효과를 낳았다는 사실을 회피해선 안 된다.

남 대 여의 급진 페미니즘 식 사회관과는 달리, 역사에서 노동계급 남성들은 낙태권, 동일임금 등 여성차별에 맞서는 투쟁의 중요한 일부였고, 그렇게 남녀 노동계급이 함께 싸웠을 때 여성의 권리도 크게 전진할 수 있었다.

진정으로 여성 차별과 성폭력에 맞서려면 과녁을 자본주의 사회에 맞추고, 이에 맞선 남녀 노동계급의 연대와 단결을 추구해야 한다.

성(인지) 교육도 남성은 입 다물고 반성하라는 죄의식 주입식이 아니라, 성과 성차별 그리고 저항 운동에 대해 솔직하게 터놓고 얘기하는 분위기가 돼야 하고, 그런 토론 과정에서 성과 여성에 대한 보수적인 고정관념이 다소 교정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