린지 저먼 지음, 이장원 옮김, 책갈피, 17000원

우리 할머니 세대와 비교해 보면, 오늘날 여성의 삶은 많이 변했다.

이제 많은 젊은 여성들은 줄줄이 애 낳고 자기 삶을 포기한 채 평생 자식과 남편 뒷바라지하는 삶이 당연하다고 여기지 않는다.

이런 변화 때문에 일각에서는 여성 차별은 옛말이고 이제는 여성이 약자라는 인식을 벗어던져야 한다는 주장도 나온다.

그러나 여성들이 차별받는다고 말하는 것은 괜히 엄살부리는 게 아니다.

분명, 어떤 여성들은 ‘유리천장’을 뚫고 사회의 높은 곳으로 올라갔다. 그러나 대다수 여성들은 현상 유지를 위해 힘겹게 발버둥치고 있다.

고된 노동과 저임금, 불안정한 일자리, 끝없는 집안일과 육아, 사고팔리는 여성의 성과 이미지, 외모 압박, 턱없이 낮은 강간 기소율 … 여성 삶의 많은 측면이 여전히 여성이 차별받는 현실을 가리킨다.

코로나19는 노동계급 등 서민층 여성들의 처지를 더 악화시켰다.

오늘날 많은 젊은 여성들이 이런 현실을 묵묵히 감내하려 하지 않는다. 그런데 어떤 여성들은 차별적 현실을 옳게 비판하면서도 그 원인으로는 남성 일반을 탓한다(급진 페미니즘).

그러나 차별에 맞서고자 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개별 남성의 행동거지를 바꾸는 데 초점을 두는 종류의 페미니즘에 대한 문제의식도 자라나고 있다.

지난 반세기 동안 그렇게 많은 것이 변했는데도 왜 여성은 여전히 차별받을까? 그냥 예전부터 그랬듯이 세상이 남성의 것이기 때문일까? 여성해방을 이루는 올바른 길은 무엇일까?

이런 물음에 대한 통찰을 얻는 데서 매우 유용한 신간이 나왔다.

이 책의 저자인 린지 저먼은 영국 사회주의노동자당(SWP)의 오랜 당원이었고, 20년 동안 혁명적 좌파 월간지 《소셜리스트 리뷰》의 편집자였다. 그리고 여성해방·계급·개혁주의에 관해 많은 기사와 논문, 책을 썼다. 그의 책 중 《여성과 마르크스주의》(책갈피)와 《계급이란 무엇인가?: 갖가지 불평등의 원인을 이해하는 열쇠》(책갈피)는 한국에 번역·출간돼 있다.

변화

이 책은 여러 장점이 있지만 그중에서도 최고는 여성 삶에 생긴 변화를 매우 생생하게, 그리고 광범한 사회 변화의 맥락 속에서 다룬다는 점이다.

저먼은 양차 세계대전, 전후 호황기의 복지 확대와 뒤이은 신자유주의적 긴축 같은 굵직한 사회 변화가 여성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를 섹슈얼리티, 가족의 재편, 노동시장 내 지위와 구실의 측면에서 다각도로 살펴본다. 사회 변화 속에서 개별 여성과 남성의 관계도 변화해 왔다.

가령, 저먼은 영국에서 하얀 웨딩드레스를 입고 교회당에서 결혼식을 올리는 풍토는 수세기에 걸쳐 확립된 전통이 아니라 19세기 말에 산업혁명을 배경으로 나타난 현상이었다고 지적한다.

그러나 이때 확립된 보수적 성 규범은 제2차세계대전과 전후 호황기, 1960년대에 벌어진 성 혁명과 사회혁명을 거치며 다시금 완전히 변화했다.

오늘날 현실을 묘사하는 부분은 영국을 중심으로 10여 년 전에 쓰여진 것이지만, 지금 한국의 현실과 너무 비슷해서 현실감이 돋는다.

특히 섹슈얼리티를 다룬 부분은 이 책의 백미라고 할 만하다. 섹슈얼리티 분석은 저먼의 이전 저작인 《여성과 마르크스주의》에서는 다루지 않았던 내용으로, 최근 20~30년 사이에 두드러지게 발전한 성 상품화 현실을 고려해 새롭게 넣은 것이다.

또, 저먼은 이런 변화가 남성의 처지와 의식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도 한 장(章)을 할애해 다루는데, 이 부분은 오늘날 한국 남성의 현실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을 준다.

그 어느 때보다 많은 여성들이 집 바깥에서 노동자로서 일하지만, 흔히 적은 임금과 불안정한 일자리를 감내해야 한다. 조만간 2차 파업에 돌입하는 학교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삭발을 한 채 11월 13일 전국노동자대회에 참가하고 있다 ⓒ이미진

저먼이 설명하는 이런 변화 과정을 따라가다 보면, 개인이 가진 생각이나 개인적 관계가 하늘에서 떨어진 게 아니라 사회구조의 영향을 받는다는 점을 이해할 수 있다.

그래서 차별에 대한 흔한 관점, 즉 차별을 단지 개인의 잘못된 태도나 습관, 편견, 심리에서 비롯한 것처럼 설명하는 접근법의 한계도 이해할 수 있게 해 준다.

무엇보다 여성의 조건을 자본주의 사회구조의 작동 방식과 연결지어 보는 것은 오늘날에도 왜 여성 차별이 지속되는지를 이해하고 해방의 전망을 찾는 데서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저먼은 여성해방의 가능성이 있지만 자본주의 체제 하에서는 계급사회가 가하는 한계때문에 그 가능성이 실현되지 못한다는 점을 설득적으로 보여 준다.

“여성해방운동의 요구를 제기하는 사람들은 거듭 계급사회의 한계에 맞닥뜨렸다. 그 근원에는 무상 보육이나 동일 임금 같은 평등 요구와, 그런 요구들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으려는 사용자와 정부 사이의 충돌이 있었다.

“노동할 권리는 곧 남성과 똑같이 착취당할 권리가 돼 버렸다. 게다가 여성은 돈도 더 적게 받는다. 성적 자유를 누릴 권리는 곧 랩댄스 클럽이나 잡지 표지 등을 통해 여성의 몸을 판매할 권리가 돼 버렸다. 개별 남성들의 행동을 바꾸는 것만으로는 이 상황을 해결할 수 없다.”

이 책은 1960년대 후반부터 벌어져 급진 페미니즘의 형성에 밑거름을 제공한 여성해방운동의 경험도 깊이 살펴본다.

이 운동은 위대한 공민권운동과 베트남 전쟁 반대 운동의 경험 속에서 발견한 사회변혁의 전망을 여성해방에도 적용하려 했지만, 결국에는 애초에 목표로 했던 것들을 온전히 성취하지 못했다.

이 운동은 사회변혁의 전망을 잃어버린 채, 기존 사회질서 속에서 여성이 더 잘 대표되도록 매진하는 한편, 정체성 정치로 후퇴해 개인주의화되고 파편화됐다.

저먼은 이런 실패가 페미니즘의 근본적 약점, 즉 여성 차별을 낳는 근원인 계급사회에 대한 도전으로 나아가지 못한 것 때문이라는 점을, 그 운동의 이론과 실천을 살펴보면서 짚어낸다.

한국 여성운동의 주류가 미국 제2물결 페미니즘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는 점을 염두에 두면, 이런 역사를 통해 곱씹어 볼 점이 많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 책은 여성해방을 명분으로 중동에서 전쟁을 벌인 미국의 제국주의적 위선과 그 전쟁을 지지하거나 적어도 그곳 여성에게 득이 될 것이라고 본 일부 페미니스트들의 약점, 그리고 히잡 착용 금지 논란 등의 쟁점도 다룬다.

최근 미군의 아프가니스탄 철군 국면에서도 서구의 일부 페미니스트들은 미군의 아프가니스탄 점령이 여성의 권리 확장에 도움을 준 것처럼 호도했다.

한국에서도 일부 페미니스트들은 이런 가정을 사실상 받아들이거나, 아프간 여성 인권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주요 제국주의 국가들이 주무르는 유엔과 같은 국제기구에 기대를 걸었다.

이 책은 이런 관점이 왜 문제이고, 중동 여성의 해방을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에 대한 명확한 관점을 제공한다.

잊힌 이름들

마지막으로 이 책의 또 다른 매력은 남녀 사회주의자들이 여성해방 사상과 운동에 기여한 경험을 소개한다는 점이다. 여성 참정권 운동을 벌인 서프러제트나 여러 페미니즘 사상가들이 여성해방에 기여했다고는 잘 알려져 있지만, 사회주의자들의 기여는 널리 알려져 있지 않다.

이 책은 마르크스와 엥겔스, 알렉산드라 콜론타이, 클라라 체트킨, 실비아 팽크허스트 등 여성해방 사상과 운동에 기여한 사회주의자들을 소개하며, 사회주의자들(여성뿐 아니라 남성도)은 누구보다, 때로 일부 페미니스트보다도 더 일관되게 여성의 권리를 옹호했음을 보여 준다.

또 여성해방을 위한 투쟁은, “여성 문제”란 무엇이며 해방을 쟁취하려면 무엇을 목표로 어떤 세력과 연대할지를 둘러싼 논쟁을 늘 수반했음도 보여 준다. 서프러제트의 지도자로 알려져 있는 팽크허스크가(家) 여성들 사이의 갈등은 대표적 사례 중 하나이다.

저먼은 이런 점을 통해 여성해방을 위한 투쟁과 사회주의를 위한 투쟁이 연결돼야 한다고 역설한다.

이 책은 150년 역사의 여러 측면을 분석적으로 다루지만, 흥미롭고 풍부한 사례들로 쉽고 재미있게 읽힌다. 딱딱하지 않고 쉽고 자연스러운 번역도 읽는 재미를 더하는 요소다.

여성 차별에 맞서고자 하는 모든 이들에게 추천한다. 특히 여성 차별 문제를 다루는 대부분의 글이 너무 개인적이고 표면적인 문제에만 머물러 부족함을 크게 느끼는 이들이라면 이 책을 꼭 읽어 보길 바란다.

이 책은 시야를 더 넓고 깊게 해 주며 여성해방의 급진적 대안을 추구하는 독자들에게는 속 시원한 청량감도 느끼게 해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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