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심이 필요한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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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드워드 사이드는 팔레스타인 출신의 미국 컬럼비아 대학교 영문학 교수다. 오늘날 세계에서 가장 저명한 문화 평론가 가운데 한 사람이다. 주요 저서로는 《오리엔탈리즘》(교보문고), 《문화와 제국주의》(창), 《전쟁이 끝난 후에》(이후)가 있다.
이 글은 전쟁 직전에 씌어졌다.
미국인 이슬람교도 7백만 명
전문가와 TV 프로 진행자 들은 이슬람과 “우리의” 전쟁 얘기를 끊임없이 해댔고, “지하드”나 “테러”같은 단어들이 이미 전국을 휩쓸고 있는 이해할 만한 두려움과 분노를 가중시켰다. 이미 두 명
그런데 조지 W 부시가 우방국들의 소극적인 태도를 감지하면서 정부의 호전적 태도가 점차 누그러지고 있다. 부시의 측근 가운데 그나마 분별력이 있는 듯한 콜린 파월은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하는 것이 텍사스 민병대를 보내는 것만큼 간단한 일은 아니라고 조언한다. 파월과 그의 참모들에게 강요된 극도로 혼란스런 현실은 부시가 국민의 이름으로 표방한 마니교 같은 선과 악의 단순한 대결 구도를 무색하게 만들었다. 경찰과 연방수사국
그러나 공적인 영역에서 아랍과 이슬람에 대해 현재 나돌고 있는 극히 부정적인 이미지를 완화시켜 줄 만한 긍정적인 인식은 거의 없다. 음탕하고 복수심이 강하고 난폭하며 비이성적인 데다가 광신적인 아랍인이라는 고정 관념이 잔존하고 있다. 미국에서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대의를 이해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더반 회의 이후에는 특히 더 그렇다. 학생 및 교수진의 지적·인종적 다양성으로 유명한 우리 대학
출판업계에서는 세계무역센터와 국방부에 대한 공격이 팔레스타인인들의 자살 폭탄 테러와 똑같은 방식으로 진행됐으며 그래서 “이제는 우리 모두가 이스라엘 사람들과 같은 처지”라는 생각을 주입시키려는 시도가 있는 듯하다. 물론 이 과정에서 팔레스타인 민중에게 가해진 박탈과 억압은 기억에서 완전히 지워진다. 동시에 나를 포함한 많은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자살 폭탄 테러를 비난한다는 사실도 잊혀진다. 그 때문에 9월 11일의 참사를 미국의 행태와 관련지어 설명하는 일체의 시도는 테러 공격을 두둔하는 것으로 간주되어 비난받거나 무시당하기 십상이다.
이해하는 것과 두둔하는 것은 완전히 다를 뿐 아니라 진실과도 거리가 멀기에, 이러한 태도는 지적·도덕적·정치적으로 재앙적이다. 대부분의 미국인들이 믿기 어려운 것은 중동에서 미국 정부가 저지른 일들 ― 이스라엘에 대한 무조건적인 후원, 사담 후세인을 구원해 주고 수십만 명의 무고한 이라크인들을 죽음과 질병과 영양 실조의 나락으로 빠뜨린 경제 제재, 수단 폭격, 이스라엘의 1982년 레바논 침공
우리는 혼란스럽고 불안하며 금방이라도 폭발할 듯한 분위기에서 살고 있다. 더 많은 폭력과 테러가 일어날 것이라는 전망이 사람들의 의식을 지배하고 있다. 특히, 9월 11일의 끔찍한 만행이 아직 사람들의 기억 속에 생생히 남아 있는 뉴욕과 워싱턴에서는 더욱 그렇다. 나 또한 내 주변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그렇게 느낀다.
대중매체의 역겨운 보도에도 불구하고 그나마 위안이 되는 것은 평화적 해결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서서히 등장할 뿐 아니라, 아직까지는 매우 소수일지라도, 더 커다란 폭격과 파괴와는 다른 대안을 요구하는 작은 목소리가 점차 확산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나는 이와 같은 사려 깊은 행동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무엇보다도 정부가 전화를 도청하고 중동계 사람들을 테러 혐의만으로 체포하여 수감할 뿐 아니라 매카시즘을 방불케 하는 경계와 의심과 비상 동원의 분위기를 조성함으로써 시민적 자유와 개인의 사생활을 침해할 수도 있는 것에 대한 우려가 확산되고 있다. 도처에서 성조기를 흔드는 미국인들의 습관은 보기에 따라서는 애국적으로 비쳐질 수도 있으나, 애국심은 또한 편협함, 증오 범죄
둘째로, 최근의 여론 조사에 따르면, 미국인들의 92퍼센트가 찬성한다던 군사 작전의 전반적인 문제를 논의하기 위한 모임들이 많이 열렸다. 그러나 부시 정부가 이번 전쟁의 목표
대학교, 교회, 회의장 등에서는 미국의 대응 방안을 두고 수많은 토론이 벌어지고 있다. 나는 무고한 희생자의 가족들이 군사 보복은 올바른 대응이 아니라고 공개적으로 주장했다는 얘기도 들었다. 중요한 것은 미국이 취할 행동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고민하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아쉽게도 아직은 중동 및 이슬람 세계에 대한 미국의 대외정책을 비판적으로 조명해 볼 시기는 무르익지 않은 것 같다. 언젠가 그 때가 오기를 바랄 뿐이다.
헌법상의 기본권을 방어하는 차원이든, 이라크인들과 같은 미국 열강의 무고한 희생자들에게 손길을 건네는 차원이든, 동정과 합리적 분석에 의존하는 차원이든 장기적인 관점에서 볼 때 이런 양심과 공감의 공동체가 인류의 미래에 가장 큰 희망이라는 점을 더 많은 미국인과 다른 사람들이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지금껏 해온 것보다 더 잘 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그것만으로 당장 팔레스타인 정책이 바뀌거나 국방 예산이 줄어들거나 환경 및 에너지 정책이 합리적으로 바뀌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지만 이렇게 침착하게 되돌아보는 방식이 아니라면 도대체 어디서 희망을 찾겠는가? 어쩌면 이렇게 하는 사람들이 미국에서 많아질 수도 있다. 나는 팔레스타인인의 한 사람으로서 이런 사람들이 아랍 및 이슬람 세계에서도 많아지기를 바란다. 우리는 시온주의와 제국주의를 비판함에도 불구하고 우리 사회를 지배하게 된 빈곤과 무지, 높은 문맹률, 억압, 커져가고 있는 악에 대한 책임이 우리에게도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예를 들어, 우리들 가운데 비종교적인 세속 정치를 공개적으로 솔직하게 옹호할 수 있고, 이스라엘과 서방이 유대교와 기독교를 이용하는 것을 비난하는 것만큼 열의를 갖고 아랍에서 이슬람교를 정치에 이용하는 현실을 호되게 비판할 수 있는 사람들이 과연 몇 명이나 되는가? 우리들 중에서 식민지 정착민들의 만행과 비인간적인 집단 응징을 뼈저리게 경험했음에도 불구하고 모든 자살 테러를 부도덕하고 잘못된 것이라고 비판할 용기가 있는 사람이 몇이나 있을까? 우리에게 가해진 불의를 더 이상 참고 넘어가서는 안 되듯이, 우리가 싫어하는 지도자들을 미국이 후원한다고 한숨만 쉬고 있어서는 안 된다. 이제 무차별 살인 행위를 단호히 반대하는 새롭고 세속적인 아랍의 정치가 등장해야 한다. 그 점에 관해서 더 이상 모호한 태도를 취하지는 말자.
나는 오늘날 아랍인의 주요 무기는 군사적인 것이 아니라 도덕적인 것이라고 여러 해 동안 주장해 왔다. 나는 또한 자결권을 요구하는 팔레스타인인들의 투쟁이 남아공의 아파르트헤이트 반대 투쟁처럼 세계의 주목을 받지 못하는 이유는 우리의 목표와 수단을 명확히 하지 않은 데다가 우리의 목표가 배타주의나 목가적이고 신비적인 과거로의 회귀가 아니라 공존과 포용임을 충분히 밝히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주장해 왔다. 이제 우리는 많은 미국인과 유럽인 들이 하고 있는 것처럼 지금 당장 우리 자신의 과거를 재평가하여 앞으로의 정책에 반영해야 한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에게 기대하는 만큼 우리 자신에게도 요구해야 한다. 모든 사람들이 우리 지도자들이 우리를 어디로 데려가는지, 왜 그런지 살펴봐야 할 때다. 의심과 재평가는 사치가 아니라 꼭 필요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