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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을 돌아보며 : 국제

국제

지진해일[쓰나미] 태평양처럼 제대로 된 조기경보체계가 갖춰져 있었다면, 지진해일로 말미암은 사망자는 훨씬 더 적었을 것이다. 선진국들은 구호작업을 외쳤지만 막상 피해를 입은 국가들에 대한 부채탕감은 약속하지 않았다. 지진해일은 자연적이지만, 그 결과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보여 줬다.

포르투알레그레 세계사회포럼 15만 명이 참가해 반자본주의 운동과 특히 라틴아메리카 운동의 성장을 보여 줬다.

이라크 선거 조지 부시는 “역사적 선거”라고 자화자찬했지만 선거 기간중에도 미군은 폭격을 계속했고, 광범한 선거 부정이 저질러졌다. 그 뒤 시아파 망명객들이 주도하는 정부가 등장했는데, 이 정부는 평범한 이라크인들의 가장 중요한 소망인 점령군 철수 요구를 무시했다.

레바논 전 총리 하리리 암살과 대규모 시위 레바논의 억만장자들과 ‘사치 앤 사치’ 같은 이벤트 회사들이 만든 시위를 주류 언론들은 ‘백향목 혁명’이라고 찬양했다. 조지 W 부시와 콘돌리자 라이스는 미군의 이라크 점령은 의식하지도 않은 채 시리아의 ‘점령군’이 당장 레바논에서 철군해야 한다고 말했다.

3·20 국제반전행동의 날 전 세계에서 수백만 명이 이라크 침략 2년 항의 시위에 참가했다. 이것은 이라크 전쟁이 세계 정치의 중심이고 반전 운동이 여전히 건재함을 증명했다.

중앙아시아 항쟁[키르기스스탄·우즈베키스탄] 억압적 철권통치와 신자유주의 개혁을 펼치던 중앙아시아의 친미 정권들이 대중항쟁으로 타도됐다.

이집트 키파야 운동 무바라크의 28년 독재에 항거하는 키파야 운동의 탄생은 중동 대중의 급진화를 보여 주는 중요한 사건이었다. 키파야에는 자유주의 정치가뿐 아니라 사회주의자들도 참가했고, 키파야의 기층운동은 이집트의 노동자와 농민 운동을 고무했다.

라틴아메리카 항쟁[에콰도르, 볼리비아] 에콰도르 항쟁은 구티에레스를 몰아냈다. 볼리비아 항쟁은 3월에 석유 자원 국유화를 요구하는 대중 시위로 시작해 6월 초 혁명적 상황에 이르렀지만 불행히도 12월 대통령 선거 국면으로 넘어갔다. 그러나 대중의 분노와 투쟁 의지는 사라지지 않았다.

중국의 대중 투쟁 역사교과서 왜곡 문제가 제기되면서 3월 말 전국적으로 반일시위가 폭발했다. 중국 정부는 부분적으로 용인했지만 이것이 전반적인 대중 투쟁으로 연결될까 봐 긴장했다. 최근 저우융캉 공안부장은 2004년에만 7만 5천 건의 집단 시위가 발생했다고 발표했고, 올해에도 각종 환경 오염 공장과 관료 부패에 항의하는 농민 투쟁, 노동조건을 둘러싼 노동자 투쟁이 벌어졌다.

리스펙트의 선거 약진과 조지 갤러웨이 당선 영국 노동당의 이라크 전쟁 지지에 반대한 대중 정서가 리스펙트 지지로 나타났다. 조지 갤러웨이는 후세인에게 뇌물을 받았다고 자신을 고발한 미국 상원 전쟁광들의 위선을 통쾌하게 폭로했다.

아프가니스탄 대중 투쟁 폭발 미군의 코란 모독에 분노해 시작된 대중 투쟁은 신속하게 점령군에 반대하는 전국적 투쟁으로 확대됐다.

프랑스와 네덜란드에서 유럽연합 헌법 부결 신자유주의를 전 유럽에 확대하기 위한 헌법 통과가 좌절됐다. 프랑스에서는 우파 정치와 사회당의 ‘사회 자유주의’에 반대하는 사회운동·공산당·급진좌파의 연합이 결성됐다. 이것은 프랑스의 기성 정치를 뒤흔들었다.

글렌이글스 반G8 시위 올해 초 ‘빈곤을 역사의 유물로 만들기’ 운동이 발족했고, 7월 영국 글랜이글스에서 열린, 신자유주의와 빈곤에 항의하는 역사적 반자본주의 시위에 50만 명이 참가했다.

영국 7·7 테러 사건 토니 블레어의 부인에도 불구하고 근원은 이라크 점령이었다. 블레어가 조장한 공포 분위기 때문에 무고한 무슬림들이 희생당하고 브라질 청년이 경찰에 의해 사살당했다.

신디 시핸 부시의 크로포드 목장에서 농성 무르익고 있던 대중의 반전 정서가 분출할 수 있는 통로와 초점을 제공했다.

독일 좌파당의 탄생과 약진 선거 대안과 민사당의 선거연합, 사민당의 신자유주의에 반대하는 노동자와 서민들의 정서를 대변.

룰라 정부 부패 스캔들 브라질 노동당의 위기와 새로운 대안의 필요성이 대두했다. 급진좌파 정당인 P-SOL이 대안 정당으로 성장하기 시작.

허리케인 카트리나 카트리나 재난은 미국 자본주의의 모순과 인종차별과 부시의 국내 정책이 결합된 결과였다.

9·24 국제반전공동행동 미국에서만 50만 명이 이라크 점령의 위기로 불타는 부시의 백악관에 기름을 끼얹었다. 미국 기성정치권은 이제 철군 논의를 더는 회피할 수 없음을 깨달았다.

프랑스 무슬림 이주자 소요 자본주의 하에서는 진정한 의미에서 ‘똘레랑스’가 존재할 수 없음을 보여 준 사건. 무슬림 이주자 2∼3 세대들은 더는 인종차별과 빈곤을 수동적으로 참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11월 6일 미주지역 정상회담 반부시 시위 부시 정부는 자기 뒷마당에서조차 곤경에 빠졌다. 수 만 명이 부시 반대 시위를 벌였고, 차베스는 미주자유무역지대의 죽음을 선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