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해방투쟁연대 준비모임(노해투)에 던지는 질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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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해방투쟁연대 준비모임
그 전에 우리는 민주노총의 결정을 이렇게 반박했다: 백보 양보해 우리가 ‘2차가해’를 했다손 치더라도 그걸 이유로 민주노총이 노동자연대 소속 조합원들의 입에 재갈을 물리고 관료 기구에 접근하지 못하도록 사상검증까지 하겠다는 것은 표현의 자유와 양심의 자유, 정치적 자유 침해다.
그리고 이런 상황을 보안법에 의한 민주적 기본권 침해에 빗대어 설명했다. 이번에도 그렇게 하자면, 노해투는 마치 보안법 피해자에게 ‘당신이 그런
이런 입장은 방어하고 싶지 않은 대상을 방어하는 척이라도 하자니 부자연스런 논리를 펴게 된 결과이다.
사실, 만일 우리 측이 우리의 2차가해 사례를 들라고 노해투에 요구한다면, 노해투는 그런 사례를 구체적으로 제시하기를 주저할지 모른다. 그럼에도 노해투가 그런 사례를 실제로 제시한다면, 우리는 그것이 사건과 관계있음을 보여 줄 것이다. 사건 관련성 여부는 실제로 따져 봐야 아니까.
노해투는 반론을 펴려 할 때 다시 멈칫할 것이다. 구체적으로 반박하는 즉시 민주노총 여성위원회 같은 극단적인 ‘정치적 올바름’ 추구자들에 의해 ‘2차가해’ 행위로 몰리며 제지를 받을까 고민될 것이다. 우리야 민주노총과 관련해 손해 볼 게 아마도 더 남아 있지 않지만, 노해투는 민주노총 일부 조합 조직의 집행권 획득에 관심이 많으므로, 우리와 ‘2차가해’ 문제로 논쟁하는 것이 별로 득 될 게 없을 것이다.
이런 제약과 자기검열이 자유로운 상호 토론과 논쟁에 도움이 되나?
노해투는 20개월 전 민주노총의
사실 민주노총의 갑질과 완장질도
오히려 노해투의 연대 단절은 노해투 자신을 보호하려는 목적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든다. 다른 몇몇 단체들이
연대는 좌파단체끼리 이합집산하는 것이 아니라 폭넓고 개방적인 공동행동
그러나 급진좌파 단체들의 연대 단절 방침은 대중 운동과 관련해 재고해야 할 바가 있다. 얼마 전 노해투의 청년운동팀도
그때 우리는 “학생행진이 좌파도 아니”라는 부정확한 주장 하나만 바로잡았다.
1920년대 말과 1930년대 초 독일에서
그러나 어떤 마르크스주의 역사가도 독일 공산당은 나치의 일종이거나 어쨌든 좌파도 아니었다고 주장하지 않는다.
독일 공산당의 그런 행동은 정확히 말해 ‘초
학생행진의 애초 대선 관련 입장
나치 부상 시기에 독일 공산당이 스탈린과 코민테른의 ‘사회파시즘’론에 따라 사회민주당을 나치의 샴쌍둥이 같은 조직으로 취급했을 때 이미 연대는 아예 불가능했던 것처럼 말이다.
노해투의 청년운동팀을 비판하려는 생각은 없다. 경험이 많지 않은 급진적 청년들이 종종 초좌파적 입장을 취하는 것은 자연스럽다. 오히려 그러지 않으면 너무 애늙은이 같을지도 모른다.
문제는 걸핏하면 연대 단절 운운하는 것은 급진적 청년들이 배울 게 못 된다는 점이다. 특히, 요즘 청년들은 마르크스주의 정치 대신에 종종 도덕주의의 영향을 받기 쉽다. 그래서 급진적 청년들일수록 정치
물론 노해투든, 다른 어느 급진좌파
바로 연대가 중요하다는 주장이야말로 요즘 같은 시기에도 적어도 양식 있는 일부 활동가들에게는 ‘공감을 얻을 수 있는 참신한 주장’의 하나라고 생각한다.
물론 아무하고나 무슨 일로든 하는 연대
가령 김일성 회고록 판매 금지 문제를 예로 들어 보자. 스탈린주의자는 물론이거니와, 일관된 자유주의자와 사회민주주의자, 트로츠키주의자 등이 검열에 반대하고 언론·출판의 민주적 권리를 지키려는 연대를 실천할 수 있을 것이다. 비록 대형 서점들의 보이콧으로 해당 출판사의 저항이 벽에 부딪혀 있어서 현재 연대가 어렵긴 하지만 말이다.
연대는 강령
물론 노해투가 예컨대 변혁당과 노동당의 통합에 가세하지 않는 것은 당연하다. 그 합당은 좌파적 개혁주의 성격이므로 혁명적 정치 조직인 노해투가 거기에 동참하는 것은 지지자들에게 어리둥절함과 혼란만을 낳을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특정 상황에서는 아일랜드의 ‘이윤보다 사람들이 먼저다’ 같은 급진좌파 정치연합도 일정 기간은 지속 가능하다.
그러나 대중 행동 건설을 목표로 하는 연대는 사안별이고 전술적이어야 한다. 해당 사안과 관련 없는 일을 끌어들여 연대 단절하는 것은 커다란 운동으로 나아가지 못하도록 발목을 잡는다.
선거 연합은 공동전선의 대용물이 아니다
노해투는 자신의 롤 모델처럼 생각하는 아르헨티나 사회주의노동자당 PTS가
일찍이 2015년에 나도 아르헨티나 트로츠키주의자들이 대선에서 가능성을 보여 준 것에 기뻐했다.
그런데 트로츠키주의자들은 종파적이기로 세계 곳곳에서 악명 높다. 우리 단체도 트로츠키주의 조직이지만 솔직히 이 점은 부끄럽다. “트로츠키주의자 한 명당 조직 하나”라는 비아냥도 들은 적이 있다.
아르헨티나 트로츠키주의자들이 근래 선거들에서 거둔 괜찮은 소득만큼 나는 그들이 종파주의에서 벗어났기를 바란다. 내가 20년 전에 만난 아르헨티나 트로츠키주의자 로베르토 사엔스 당시 MAS
1976년 아르헨티나 운동의 참패와 그 오랜 여파 때문에 그랬을 것이다. 특히, 1976~1983년의 “더러운 전쟁”으로 아르헨티나 민주화 운동 활동가 9천 명이 군부 정권에 의해 고문살해 당했다.
그러나 1989/91년 옛 소련 블록의 몰락도 아르헨티나 트로츠키주의자들의 사기 저하에 매우 큰 영향을 미쳤다. 그들은 옛 소련을 관료적으로 퇴보했어도 노동자 국가라고 봤기 때문이다.
후대 트로츠키주의자들의 종파주의에도 불구하고 트로츠키 자신은 종파주의를 지극히 멀리했다. 그의 저작들 가운데 가장 위대한 것들은
그런데도 트로츠키주의자들이 트로츠키의 공동전선 사상을 실천하지 않고, 그와 레닌이 코민테른 제2~4차 대회
소수파 정서와 소수파 마인드 때문일 것이다. 옛 소련 몰락 때까지 무려 60여 년 동안 스탈린주의
옛 소련 몰락 얼마 뒤부터는 아나키즘의 일종인 자율주의가 거의 20년간 운동 안에서 득세했다. 그 시기에 정치는 사회적 자유주의
물론 일부 트로츠키주의 조직은 이 시기에 대안세계화운동에 능동적으로
2012년부터 바로 얼마 전까지는 시리자와 포데모스, 제러미 코빈 하의 노동당 같은 좌파적 사회민주주의가 부상했다.
그러나 좌파적 사회민주주의는 급속히 주저앉았다. 이들과 함께 부상한 우익과 극우는 여전히 강력한 채 말이다.
이런 때 아르헨티나에서 트로츠키주의자들이 연합해 선거에 성공적으로 참여했다는 건 주목할 만한 일이다.
그런데 선거 강령은 정치 강령을 반영하지만, 실용적으로 반영한다.
이와 관련해 2000년대 말 프랑스 반자본주의신당 NPA의 대선 참여 경험이 시사적이다. NPA 대선 후보 올리비에 브장스노는 어떤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자신이 트로츠키주의자가 아니라고 말했다. 사실 그는 차라리 게바라주의자에 좀 더 가까울 성싶었다. 그러니까, 확실한 트로츠키주의 조직 혁명적공산주의동맹 LCR이 2000년대 대안세계화운동으로 빨려 들어온 다소 자율주의 경향이 있는 청년들을 끌어들여 세 곱절로 팽창하면서, 당의 트로츠키주의 전통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을 당의 얼굴로 선출한 것이다.
여기까지는 선거의 특성이라는 면에서 봐줄 만하다. 하지만 그 이후가 문제였다. 브장스노의 개성과 인간적 매력, 대선에서의 좋은 성적에 큰 호감을 느낀 새 청년 당원들은 대개 선거 강령에 동의했겠지만, 2012년
그리고 이슬람과 무슬림 차별의 핵심 쟁점인 히잡·부르카·니캅의 공공장소 착용 금지 문제를 놓고 NPA가 명확한 이슬람·무슬림 방어 입장을 내놓지 못한 것이 악재로 작용했다. NPA의 입장은 방어론이라기보다는 양비론에 차라리 더 가까웠다.
이런 이유들로 한때 1만 명까지 성장했던 NPA의 규모는 오래지 않아 LCR 시절의 규모
이처럼 선거 참여는 본래의 정치 강령에 실용주의적
그래서 해당 선거 시기의 고유한 타협점과 강조점이 두드러질 수 있다. 가령 어떤 대선
아르헨티나 사회주의노동자당 PTS의 선거 유세 내용에는
그래서 PTS 주도 선거연합체 노동자좌파전선의 한 파트너인 노동자당의 당시 대표 호르헤 알타미라는 PTS를 “유아기의 포데모스” 같다고 비판했다. 포데모스는 좌파적 포퓰리즘을 자처해 왔다.
또한 PTS는 이스라엘 비판이 유대인 혐오
물론 노해투가 걸핏하면 ‘연대 단절’ 하는 종파적 습성을 버리지 않으면 노해투는 아르헨티나 트로츠키주의자 공동 선거 운동이든, 2000년대 말~2010년대 초 NPA 선거 운동이든, 그 비슷한 성공을 일궈 내기도 쉽지 않을 성싶다.
하지만 좌파 이합집산
연대는
전계급적 연대가 필요하고 대부분 이는 의식적으로 쟁취하는 것
노해투는 가령 톨게이트 노조 지지 연대체에서 변혁당과 합세해 우리를 축출했다. 이후 노해투는 톨게이트 투쟁 평가 책자 하나
특히, 김명환 집행부가 연대 파업에 소극적이었다며 김명환 집행부에 기대지 말고 기층 조합원들이 독립적으로 싸우자고 주장했다. 물론 노동조합 지도자들이 투쟁을 이끌려 하지 않을 때 기층 조합원들이 스스로 싸워야 한다는 것은 나무랄 데 없는 혁명적 원칙이다.
문제는 그런 원칙이 현실화되려면 기층에서 혁명적 좌파가 깊숙이 뿌리를 내리고 있어야 한다. 만약 계급투쟁의 수위가 매우 높다면 자그마한 혁명적 조직도 부양력을 받아 그런 대사건을 실현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시기가 아니다. 그러므로 그런 일 근처에라도 가고 싶으면 혁명적 좌파들이 연대해야 한다. 강령이나 전략으로 연대하는 건 불가능하므로
아무튼 일이 자기 뜻대로 풀리지 않는 듯하자 노해투는 “민주노총
글쎄, 그걸 몰랐었나?
그러나 톨게이트 노동자 투쟁은 민주노총
그래서, 100퍼센트 만족스럽지는 못해도 다음 투쟁을 기약하며 노동자들에게 이럭저럭 유리하게 끝났다.
마치 순풍이 강력하게 불 때는 사공이 노를 서투르게 저어도 배가 잘 나아갈 수 있듯이, 민주노총
자, 이 투쟁 과정 전체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노동자연대가 배제됐어도, 또 노해투가 현장조합원 운동이라는 비현실적 꿈을 꿨어도 그 운동은 광범하기 이를 데 없는 연대
나는 혁명적 좌파가 중요한 구실을 하지 못하는
연대가 중요하다는 건 일반화될 수 있는 명제인 데 반해, 혁명적 좌파가 중요치 않다는 것은 일반화될 수 없는 명제이다. 어떤 경우에는 혁명적 좌파가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노해투도 자신의 역할이 결정적이었던 경험을 해 봤을 것이다.
우리로 말하면, 노동쟁의에서는 그런 역할을 한 기억이 별로 없다. 그러나 적어도 철도 노동자 파업이 박근혜 퇴진 투쟁과 처음에 만나도록 하는 데에선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자부한다. 2008년 5월 초 촛불 운동이 청계광장에 갇혀 있기를 거부하고 광장을 돌파해 광화문으로 나와 운동이 용기를 받고 커지는 데서도 우리가 결정적인 구실을 했다. 의심스러우면 박원석 당시 참여연대 협동사무처장
그러나 우리든, 노해투든, 모두 자기만족에 빠질 주제가 못 된다. 둘 다 조직 규모가 작아, 어떤 운동이 대중 운동으로 성장하는 초기 국면에서 일정한 구실을 한다 해도 사실상 우연에 불과하거니와, 운동이 훨씬 커졌을 때는 조직 규모로 인한 근본적 한계에 부딪혀, 개혁주의자들에 밀리고 그 운동의 주변으로 밀려나기 십상이다.
혁명적 좌파가 대규모 정치운동을 승리로 이끌려면 성장해야 한다. 그러려면 그런 단체들이 서로 협력해야 할 때는 실제로 협력해야 한다. 그때, 강령을 통일시키려 애쓰지 말고 제한된 구체적 쟁점
분명 노해투는 이런 면에서 과거보다 진보했다. 그래서 전과 달리, 어떤 경우에는 개혁주의 단체들과도 하나의 연대체에 속하기를 거부하지 않는 듯하다. 그러나 톨게이트 연대체에서 한국여성단체연합
톨게이트 노동자, 택배 노동자, 보건의료계 노동자 등을 둘러싼 광범한 연대는 건보고객센터 노동자들 앞에서 주춤했다. 이번에는 정규직 노조 집행부의 우파적 반발이 있었고, 이에 직면해 무능하고 회피적이었던 공공운수노조와 민주노총 지도자들이 있었고, 노동조합 운동 바깥에서 개혁주의적 영향력을 미치거나 침묵·회피한 시민·사회단체 지도자들이 있었다. 그래서 그 노동자들은 아직도 마음고생을 하며 교섭 결과가 유리하게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다.
위에 언급된 투쟁들은
도대체 이런 상황에서도 급진좌파
어떤 투쟁은 혁명가들의 역할이 없어도 전계급적 연대가 이뤄질 수 있고, 어떤 투쟁은 혁명가들이 갖은 수를 다 해도 그런 연대가 이뤄지지 못하고, 어떤 투쟁은 혁명가들이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그런 연대가 이뤄지거나 이뤄지지 않을 수 있다. 연대가 가장 중요하고, 연대는 쟁취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이런 노력을 정치라고 부른다.
맺으며
나중에 근본적 사회 변혁 과정이 시작돼 노동자 평의회 같은 민주적 노동자 기관이 등장한다면 지역별로 분산돼 있는 혁명적 좌파 단체들은 서로 협력할 줄도 알아야 하는 것 아닌가?
우리가 4년여 전쯤 노해투 활동가를 맑시즘 2017의 당시 가장 중요한 워크숍에 패널의 하나로 초대했을 때 우리는 노해투에 호감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그 패널이 워크숍 끝난 후 비를 피하며 건물 처마 밑에서 한 말은 충격적이었다. 그는 큰 강당에서 나오는 많은 청중을 바라보며 오른쪽에 서 있는 이호동 당시 노동전선 대표에게 한 말인지 아니면 왼쪽에 서 있는 내게 한 말인지 몰라도 이렇게 말했다. “여기
반면 15년 전 노해투의 전신인 단체의 활동가 두어 명이 맑시즘 2006의 가장 주된 워크숍에 청중으로 참가했을 때 그들은 끝나고 “대공장 식 선전이네요” 하는 덕담을 나누며 돌아갔다. 이렇게 우호적으로 지내며 필요한 생산적 비판을 하는 건 불가능한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