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1월 6일 노동자연대 온라인 토론회에서 발표한 내용을 옮긴 것이다.


최근 국제적으로 기후 운동 안에서 탈성장론이 제기되고 있다. 국내에서도 탈성장론 저작들이 활발히 번역 소개되는 등 탈성장에 대한 관심이 늘고 있다.

탈성장이 무엇을 뜻하는지는 논자들에 따라 상당한 차이가 있다. 하지만 분명한 공통점이 있는데, 우리가 사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경제 성장이 필연적으로 환경을 파괴한다고 보면서 기후 위기를 멈추려면 경제 성장을 멈추거나 줄여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이런 주장이 새로운 것은 아니다. 고인이 된 김종철 전 《녹색평론》 편집자는 2008년 경제 위기 직후 열린 한 토론회에서 “성장이 멈췄다. 우리 모두 춤을 추자” 하고 말씀한 바도 있다.

근본 생태주의 입장에서는 인간의 욕구 자체에 환경 파괴의 씨앗이 있고 이를 무분별하게 발현하는 자본주의가 환경 파괴를 낳는다고 본다. 따라서 인간의 욕구를 어느 수준으로 억제해야만 생태계를 지킬 수 있다고 본다.

오늘날 탈성장론자들은 이런 근본 생태주의와의 차이를 강조한다. 《디그로쓰》의 저자 요르고스 칼리스는 최근 유행하는 탈성장론의 대표 주자이다. 그는 “경제 성장 추구의 동력이 자연스러운 인간의 본능이라는 통상적 확신을 뒤흔들고자 한다”면서 오늘날 경제 성장을 향한 끝없는 강박은 인간 본성이 아니라 “사회문화 시스템”에서 비롯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적을수록 풍요롭다》의 저자 제이슨 히켈 역시 끝없는 성장을 추구하는 자본주의야말로 진정한 문제의 원인이라고 지적한다. 그는 자본주의 경제가 성장을 멈출 때 사람들이 얼마나 큰 고통을 겪는지 언급하면서 자신이 제안하는 탈성장이 이런 상황을 감수하자는 게 아니라고 강조한다. 오히려 그런 고통은 끝없는 성장을 추구하던 경제가 불시에 급정지하거나 추락하며 생기는 현상이므로, 계획적인 탈성장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최근 탈성장론자들이 환경 파괴의 원인을 개인의 이기심이나 인간 본성 같은 것에서 찾지 않고 자본주의 체제의 문제로 보는 것은 긍정적인 현상이다. ‘기후 변화 아닌, 체제 변화!’라는 구호가 보여 주듯 이는 기후 운동에서 근본적 해결책을 강조하는 목소리가 커져 온 것과도 연관이 있어 보인다.

자본주의적 경제 성장과 환경 파괴

무엇보다 자본주의적 경제 성장에 대한 이들의 비판에는 정말 공감할 바가 많다. 자본주의에서 경제 성장을 향한 맹목적 집착이 어마어마한 환경 파괴를 낳는다는 사실은 명백하다. 아래 그림은 2차 세계대전 이후 세계 실질 GDP와 1차 에너지 사용, 대기 중 이산화탄소 농도가 함께 급격히 상승한 것을 보여 주는데 학자들은 1950년대 이후의 이 시기를 ‘대가속기’라고 부르기도 한다.

1950년대 이후로 경제 성장과 환경 파괴가 동반 가속돼 왔음을 보여 주는 ‘대가속기’ [확대]

자본주의에서 경제 성장이란 누가 더 빨리 많은 이윤을 축적하느냐 하는 경쟁의 성적표 같은 것이다. 자본가들 사이의 축적 경쟁은 자본주의 체제가 돌아가는 근본적 동인이다. 경쟁하에서 개별 자본가는 생산이 환경에 끼치는 장기적 영향을 신경 쓸 겨를이 없다. 어떤 자본가가 몇십 년 뒤 지구 생태계를 걱정할 수는 있지만 그것을 고려해 투자를 결정한다면 십중팔구 경쟁에서 낙오할 것이다.

그런데 많은 탈성장론자들은 경제 성장에 대한 자본주의의 집착을 주로 성장 이데올로기의 효과로 설명하는 경향이 있다. 뒤에서 다시 살펴보겠지만 이처럼 성장에 대한 집착을 의식의 문제라고 보면 자본주의 체제 내에서도 탈성장이 가능하다는 잘못된 결론으로 나아갈 수 있다.

그러나 성장에 대한 집착은 물질적 조건에서 비롯하는 것이다. 마르크스가 《자본론》에서 설명했듯 그것은 어떤 편견이나 마음가짐에서 비롯하는 것이 아니다. 가차없는 경쟁 논리에 의해 모든 자본주의 생산 단위에 강요되는, 자본주의 생산관계에 내재된 물질적 동인에서 비롯하는 것이다. 마르크스는 이렇게 말했다. “축적하고, 또 축적하라! 이것이 모세 오경과 예언서의 말씀이니라!”

따라서 끝없는 성장 추구가 낳는 환경 파괴를 멈추려면 자본주의 체제를 무너뜨리고 완전히 다른 원리로 운영되는 사회를 건설해야 한다.

‘탈성장’이 새 사회의 운영 원리가 될 수 있을까?

이제 탈성장 해법이 기후 위기와 환경 재앙을 막는 데 얼마나 효과적인지 살펴보겠다. 먼저, 탈성장이 새 사회의 작동 원리로 적절한지 살펴보고, 그 다음에 기후 운동의 전략이자 요구로 탈성장을 채택하자는 주장에 대해 살펴보겠다.

새 사회의 작동 원리로써의 탈성장에 대해 얘기해 보자. 기후 위기를 멈추려는 사회라면, 당연히 기후 위기를 멈추기 위해 ‘필요한’ 모든 조처를 취할 것이다. 화석연료 사용을 중단하고, 재생에너지를 대량 보급할 것이다. 승용차 이용과 오염을 줄이고, 편리하고 안전한 대중교통을 대폭 확충할 것이다. 단열이 뛰어난 최신 기술로 지은 주택을 보급해 난방 에너지의 수요를 최소화할 것이다.

그런데 이처럼 기후 위기를 멈추기 위한 필수적인 몇 가지 조처들만 따져 봐도 새로운 사회에서는 어떤 것은 탈성장해야 하고(화석연료와 승용차), 어떤 것은 성장해야 한다(재생에너지, 대중교통, 주택 등)는 것을 알 수 있다.

게다가 끝을 모르는 성장에도 불구하고 전 세계 인구의 다수는 풍요는커녕 기본적인 필요도 충족하지 못하고 있다. 흔한 착각과 달리 인류가 두루 풍요를 누린 결과로 환경이 파괴된 것이 전혀 아니다.

개도국과 빈국은 더 말할 것도 없고 지난 수십 년 동안 선진국에서도 빈곤이 증대해 왔다. 전 세계에서 1분마다 11명이 기아로 사망하고 있다. 동시에 미국 같은 선진국에서도 무려 3400만 명이 기아 혹은 영양실조 상태에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따라서 새로운 사회는 자본주의하에서 환경과 함께 고통받은 인간 수십억 명의 기본적 필요를 충족시켜야 한다.

요컨대 기후 위기를 멈추기 위해서도, 빈곤을 해결하고 필요를 충족하기 위해서라도 성장과 탈성장이 모두 필요하다. 단순히 탈성장을 새 사회의 운영 원리라고 할 수 없는 것이다.

기후 위기를 멈추려면 화석연료 산업에서 탈성장이 필요하지만, 빈곤과 불평등을 해결하려면 자본주의와는 다른 성장도 필요하다 ⓒ출처 UNICEF Ethiopia

《적을수록 풍요롭다》의 저자 제이슨 히켈도 이를 어느 정도 인정한다. “경제의 어떤 부문들이 여전히 확대될 필요가 있고, 어떤 부문들이 축소돼야 한다.” 그러나 다시 이를 모두 뭉뚱그려 탈성장이라고 함으로써 합리적 핵심에서 벗어나 버리고 만다.

내가 보기에 이는 근본 생태주의자들의 가정을 일부 공유하기 때문인 듯하다.

예컨대 제이슨 히켈을 포함해 기후 운동 내 탈성장론자들은 흔히 재생에너지를 생산하는 데에도 많은 양의 희토류 금속이 필요하므로 재생에너지로도 에너지를 공급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고 주장한다. 즉, 어쨌거나 에너지 사용 자체를 줄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막연하게 인간이 이용할 수 있는 자연의 ‘절대량’에 고정된 한계가 있다고 여기는 것은 어떤 방식으로든 인간이 자연을 대규모로 활용하려 하면 환경 파괴로 나아갈 수밖에 없다는 생각과 연결되기 쉽다.

그런 생각의 밑바탕에는 인류가 자연과 공존하는 적절한 방식을 찾아낼 수 없을 것이라는 불신이 깔려 있고, 이를 끝까지 밀어붙이면 결국 인간 본성이 파괴적이라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그러면 결국 과잉인구론에 도달하게 될 수도 있다. 《미래를 위한 새로운 생각: 우리는 더 이상 성장해서는 안 된다》의 저자 마야 괴펠을 비롯해 적지 않은 탈성장론자들이 종종 아무렇지 않게 ‘인구 문제’를 언급하는 이유일 것이다.

그러나 마르크스는 한 세기도 더 전에 맬서스의 과잉인구론이 사이비 이론에 지나지 않음을 과학적으로 논증했다. 오늘날에도 과잉인구론은 저개발 국가와 유색인종 등을 겨냥해 제기된다. 환경 재앙을 막으려는 사람들은 이런 인종차별적 주장을 경계해야 한다.

마르크스주의 생태학자인 존 벨라미 포스터는 탈성장 이론가들이 경제 성장에 관한 주류 경제학의 개념을 그대로 사용함으로써 ‘탈성장’이라는 개념도 뒤틀려 버린다고 지적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집을 짓거나 식량을 생산하는 것도 ‘성장’에 포함되지만, 돈을 빌리거나 무기를 생산하거나 투기를 벌여도 다 ‘성장’으로 측정된다. 그런 일들이 자본가들에게 이윤을 가져다주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본주의에서 경제 성장은 단지 재화와 서비스의 증가뿐 아니라 온갖 쓰레기의 양산과 엄청난 파괴를 뜻하기도 한다.

그런데 탈성장이라는 개념은 인간과 환경을 위해 필요하고 발전시켜야 할 것이 무엇인지 내다 버려야 할 것이 무엇인지 구별하지 않고, 주류 경제학의 개념 그대로의 성장을 거부한다는 점에만 초점을 맞춘다. 이런 식으로는 사회가 어떻게 운영돼야 하는지 적절히 설명할 수 없다.

‘탈성장’ 지지로는 대중 운동을 건설할 수 없다

이제, 기후 운동의 전략이자 요구로 탈성장을 채택하자는 주장에 대해 살펴보겠다. 탈성장론자들은 대개 탈성장을 자본주의 체제 내에서도 실현할 수 있는 것처럼 여기고 기후 운동의 요구로 채택해야 한다고도 주장한다.

그러나 자본주의 사회에서 탈성장은 공상이다. 지배계급이 자국 경제나 회사를 탈성장시키는 것은 불가능하다. 코로나19 팬데믹하에서 보통 사람들의 생명이 위태로운데도 경제 가동으로 밀어넣는 것을 떠올려 보라.

자본주의 사회에서 탈성장이 불가능하다는 명백한 사실 때문에 탈성장론자들이 내놓는 대안은 용두사미가 되곤 한다. 가령 《디그로쓰》의 저자 요르고스 칼리스는 경제 성장 없는 그린뉴딜, 보편 기본 소득과 서비스, 커먼스(공공재) 되찾기, 노동시간 단축, 공공 금융을 대안으로 제시한다.

그러나 이것으로 탈성장이 실현된다고 보기 어렵고 그저 상당 부분 지지할 만한 개혁 요구들일 뿐이다. 칼리스 자신도 “경제성장 시스템을 거창하게 비판하고 나서, 최근 여러 국가에서 정당들이 발전시킨 프로그램들에 주목하는 모양새가 용두사미처럼 보일지도 모르겠다” 하고 인정했다.

그런데 여기서 더 중요한 문제가 제기된다. 꽤 괜찮은 개혁 요구들을 쟁취하려면 대중운동이 필요한데, 탈성장 요구로는 대중운동을 건설할 수 없다는 것이다. 자본주의에서 탈성장을 요구하는 것은 더 많은 실업과 빈곤, 더 극심한 대중의 고통을 요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수백 년 동안 성장에서 배제되고 기후 재난의 피해를 온몸으로 견디고 있는 빈국과 개도국의 평범한 대중에게는 물론이고, 선진국에서조차 탈성장 주장은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문제들에 대한 대안을 제시하지 못한다. 오히려 그런 문제들과 마주하고 있는 노동자들을 운동에서 더 멀어지게 만들 것이다.

이미 벌어지고 있는 문제들도 많다. 자본주의 정부가 기후 위기를 멈추고 대중의 무분별한 소비를 줄이겠다며 전기요금을 인상하는 것에 대해 뭐라고 할 것인가? 평범한 사람들의 소비를 줄이는 것이 필요하다고 본다면, 요금 인상에 불만인 노동 대중을 훈계하며 정부 정책 편을 들게 될 것이다.

〈조선일보〉 등이 재생에너지 확대도 결국 환경을 파괴한다며 지금 있는 핵발전을 이용하자고 하면 뭐라고 할 것인가? 실제로 제이슨 히켈은 비슷한 이유로 핵발전을 일부 유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또, 유류세 인상에 반대해 싸우는 노동자들, 예컨대 프랑스 노란조끼 같은 운동에 연대할 것인가, 말 것인가? 탈성장론은 이처럼 구체적인 문제들에 대해 적절한 답을 제시하기 어려울 것이다.

이런 문제에서 기후 위기를 멈추면서도 노동자들의 삶을 지키는 대안을 제시해야 한다. 그러나 탈성장을 추구한다면 일관되게 그러기 어려울 것이다. 탈성장을 추구한다면 일자리를 늘리기는커녕 유지하기도 어려울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정의로운 전환’ 요구도 완전히 허물어질 것이다.

정의로운 전환이란 기후 위기를 멈추기 위한 전환 과정이 정의로워야 한다는 뜻이다. 예컨대 석탄화력발전소를 폐쇄하되 그 노동자들에게는 일자리와 소득을, 지역 주민들에게는 환경 복원 비용 등을 지원해야 한다. 그 비용은 그동안 화석연료 사용으로 부를 쌓아 온 기업주들이 부담해야 한다.

기후 운동은 탈성장 요구를 내세워 노동계급과 소원해지는 길을 택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군비를 감축하고 화석연료 기업 보조금을 폐지하라는 요구와 함께, 평범한 사람들의 삶을 개선하기 위한 요구들을 해야 한다. 더 많은 재생에너지와 일자리, 더 많은 대중교통 수단, 더 많은 주택과 복지, 더 많은 소득 지원, 빈국과 개도국에 대한 더 많은 지원 등 말이다.

지속 가능한 세계

이런 요구를 내걸고 투쟁을 건설할 때에만 기후 운동의 저변을 확대하고 노동자들을 운동에 동참시킴으로써 진정한 힘을 가질 수 있다. 노동계급의 기후 운동 동참은 오직 노동계급만이 자본주의에 도전하고 진정한 체제 변화를 이룰 잠재력이 있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하다.

혁명적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노동자 혁명으로 자본주의를 타도하고 민주적으로 계획되는 사회주의 경제로 전환해야 한다고 주장해 왔다.

이런 사회주의 사회는 생산이 사적 이윤과는 완전히 다른 목적, 즉 사회적 필요를 위해, 전쟁이 아니라 복지를 위해, 자본 축적과 사치품 소비가 아니라 더 많은 학교, 병원, 주택, 문화를 위해 이뤄질 것이다. 혁명 과정에서 새로운 사회를 운영할 자신감을 획득한 노동계급은 그들의 존재 조건에 합당한 방식으로, 즉 집단적으로 생산하되 사장의 명령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신들의 민주적 결정을 통해 생산과 사회를 운영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일각에서는 소련과 중국 같은 사회를 보면서, 사회주의 사회도 성장을 중시하고 환경을 파괴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노동조합 결성 같은 기본적 권리조차 억눌리고 민주적 계획은커녕 공산당 관료들의 지령에 따라 생산이 이뤄진 소련과 북한, 중국 같은 사회를 사회주의라고 볼 수 없다. 그 나라들에서 생산이 사회적 필요가 아니라 다른 기업·국가들과의 경쟁에 종속돼 있(었)다는 명백한 사실을 고려하면, 그 체제들은 사회주의가 아니라 자본주의의 한 형태인 국가자본주의라고 봐야 한다.

맹목적으로 이윤을 추구하는 자본주의는 사람들의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민주적으로 조직되는 체제로 대체돼야 한다. 그런 세계만이 기후 재앙을 막을 수 있고, 인간과 자연이 조화를 이루며 지속 가능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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