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사회주의노동자당(SWP)의 탈라트 아흐메드는 인도 출신 영국 거주 사회주의자로, 지난 여름 ‘다함께’가 주최한 반자본주의 포럼 ‘전쟁과 변혁의 시대’에서 이슬람과 문화예술과 인종에 대해 연설했다.

이 글은 그 중 ‘인종과 계급’이라는 주제로 행한 연설을 녹취한 것이다.


우리가 사는 세계에서 인종 문제는 사회의 핵심 특징입니다. 우리는 무슬림들이 “외부인”이나 “이질적 문화” 취급을 받으며 물리적·언어적 공격을 당하는 것을 봅니다. 또, 이민자나 난민들에 대해서도 “외부인”이라는 비난이 쏟아집니다.

심지어 제도적 수준에서도, 특히 교육의 경우, 기회를 박탈당한 사람들의 다수는 소수 인종 출신입니다. 이주노동자들이 많이 있는 한국에서도 언론과 국가가 나서 방글라데시 출신 이주노동자들과 한국인은 서로 다르다는 생각을 끊임없이 부추기는 일이 있을 것입니다.

이런 상황 때문에 사람들이 인종적 불화와 인종차별은 언제나 있어 온 일이라고 여기기가 매우 쉽습니다. 그래서 흔히 사람들은 인종적 불화는 인류 역사만큼이나 오래된 것이고,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또 우리가 해결할 수 없는 문제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분명 인종차별주의자나 파시스트들이 그들의 증오를 정당화하기 위해 퍼뜨리는 생각입니다. 그러나 인종차별에 반대하지만 그에 맞선 투쟁의 가능성에 대해서는 비관적인 사람들도 이러한 생각을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회주의자와 혁명가들은 이런 생각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우리는 인종차별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역사적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인종차별은 몇몇 유전적 특성에 따른 체계적 차별이라고 정의할 수 있습니다. 대표적인 예가 피부색이죠. 예컨대, 특히 서구에서 사람들은 피부가 흰 유럽인이 있고, 저처럼 피부가 갈색 계통인 사람이 있고, 여러분처럼 황색 피부를 가진 사람이 있고, 아프리카인들처럼 피부가 검은 사람이 있다고 말합니다. 때로는 사람들의 국적이나 종교가 차별의 이유가 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인종차별과 인종차별 사상은 역사적으로 특정 시기에 등장했다는 점이 매우 중요합니다. 즉, 인종차별은 자본주의의 발전과 함께 발생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자본주의의 등장과 근대 노예 무역의 발전 ― 특히 대서양을 가로지르는 노예 무역 ― 을 살펴보면, 근대 인종차별의 기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대서양 횡단 노예 무역으로 대략 2500만 명의 아프리카인들이 아프리카 서부 해안에서 강제 이주당했습니다. 이 중 1000만 명의 아프리카인들이 신대륙으로 이주됐죠.

[중략]

1791∼1806년 사이에 영국이 노예 무역의 절반 이상을 지배했습니다. 그리고 이 주제를 연구한 다른 역사학자는 신대륙에서 발전한 노예제 플랜테이션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한 명의 농장주가 1억 5000만 파운드라는 어마어마한 돈을 벌어들였다.”

바로 이것이 자본 축적의 발전 과정에서 노예 무역이 한 구실이었습니다. 그 과정에는 헤아릴 수 없는 야만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마르크스는 《자본론》 1권에서 자본주의를 이렇게 묘사했습니다. “자본은 머리에서 발끝까지 피를 뚝뚝 흘리면서, 제 몸의 모든 구멍에서 피와 오물을 내뿜으며 태어났다. … 아프리카가 흑인들의 상업적 사냥을 위한 낙원으로 바뀐 것은 바로 자본주의 덕분이다.”

그렇다고 해서 자본주의 전의 사회에는 노예제가 존재하지 않았다는 말은 아닙니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스파르타인들을 노예로 만들었고, 로마는 브리튼족과 게르만족들을 노예로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7∼8세기의 이슬람 사회에서는 비(非)이슬람교도들을 노예화했습니다.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의 대부분 지역에서 노예를 전리품으로 얻었습니다.

고대 로마와 그리스에 노예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노예들이 꼭 자신의 피부색에 따라 결정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전리품으로서 노예가 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노예의 피부색은 검을 수도, 갈색일 수도, 흰색일 수도 있었습니다. 

‘스파르타쿠스’라는 훌륭한 영화를 보면, 노예들의 피부색이 다양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황제의 피부색 역시 검을 수도, 갈색일 수도, 흰색일 수도 있었습니다.

로마 지배의 주된 특징은 지방의 귀족 계급을 제국 지배계급으로 흡수해, 동일한 문화를 공유하도록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사회들에서 차별은 인종적 범주가 아니라 ‘야만인’이냐 ‘문명인’이냐 ― 즉 로마의 문화를 받아들이느냐 ― 에 따라 이뤄졌습니다.

그래서 심지어 노예라 하더라도, 문화적 소양을 갖추기만 하면, 황제든 왕이든 또는 의원이든 뭐든 될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고대 사회가 계몽된 사회였다거나, 자유로웠다거나, 정의로웠다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러한 사회들은 매우 야만적이었고, 매우 부패했으며, 대단히 억압적이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종류의 인종차별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고대 세계에서 노예들에게는 권리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주인의 재산이었지만, 또한 주인과 노예의 처우와 행동을 규제하는 법률로 보호받았습니다. 

근대 세계의 노예제 하에서 노예들은 이제 더는 인격체가 아니게 됐습니다. 근대 세계에서 노예는 당나귀나 마차 또는 개와 다를 바가 없어졌습니다. 그들의 몸에는 가축처럼 낙인이 찍혔습니다.

자본주의에서 노예는 사고 팔 수 있는 상품이 됐습니다. 그들은 아프리카 서부 해안 지대의 다양한 아프리카 부족들에게 잡혀 유럽의 상인들에게 팔려갔습니다. 이들은 대서양을 횡단하는 끔찍한 항해 ― 소위 “고기 운반”이라고 알려진 ― 를 해야만 했습니다.

이것은 정말 끔찍한 여행이었는데, 노예들은 “죄수들”이라고 불렸고, 실제로 죄수로 분류돼 사슬에 묶였습니다. 당연히 환자가 많이 생겼는데, 이런 사람들은 바로 바다에 던져졌습니다. 그리고 이들이 확실히 죽도록 하기 위해, 다시 말해 바다 깊숙이 가라앉아 익사하도록 이들의 몸에 무거운 쇳덩어리를 달았습니다.

이런 과정을 견디고 살아남은 사람들은 경매에 넘겨졌습니다. 그들은 주인의 재산이라는 낙인이 찍혔고 농장에서 죽도록 일해야 했습니다. 이러한 무역이 낳은 야만성이 너무 엄청났기 때문에 이를 정당화하기 위한 모종의 이데올로기가 필요했습니다.

인류 역사의 99.9퍼센트 동안 인종차별은 인간 생활의 특징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지난 3백50년 간 흑인 노예 무역을 정당화하기 위해 인종차별주의가 발전해 왔습니다. 뛰어난 역사가인 에릭 윌리엄스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노예제가 인종차별에서 비롯한 것이 아니라, 인종차별이 노예제의 결과다. 신세계에서는 갈색인·백인·흑인·황인종 모두 예속 노동을 했다. 이 점에서는 가톨릭교도, 개신교도, 이교도를 가리지 않고 모두 마찬가지였다.”

이렇게 다양한 인종이 존재하는 상황에서 흑인에 대한 대우를 정당화하기 위해서는 ‘흑인은 원숭이나 다름없다. 그들은 우리보다 열등하다’는 식의 사상이 조장되고, 고무되고, 발전돼야만 했습니다. ‘그들에게는 문화도 없고, 역사도 없다. 그들은 멍청하고, 문명화된 백인들과 달리 무지하다’는 생각들 말이죠.

이러한 사상들은 하룻밤에 형성된 것이 아닙니다. 이런 사상들은 3백 년에 걸쳐 발전하다가 19세기에 이르러서야 인간의 지능과 문화를 피부색과 연계시키는 체계적 사상으로 굳어졌습니다.

18세기 말에 미국과 프랑스에서 위대한 부르주아 혁명이 일어났습니다. 프랑스에서는 모든 사람을 위한 자유·평등·우애가 주창됐습니다. 계몽주의 시대라고 불리는 이 시기는 모든 사람이 평등하게 태어났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흑인을 사람으로 여기지는 않았습니다. 그래서 1774년에 출판된 자메이카의 역사를 다룬 책은 흑인 차별이 아프리카인이 인간 이하의 미개인이기 때문이라고 주장했습니다.

한편에는 자유·평등·우애라는 위대한 부르주아 민주주의 원칙들이, 다른 한편에는 노예제에 대한 정당화가 동시에 존재했습니다. 이러한 모순이 어떻게 해결될 수 있었을까요?

이 문제는 인종차별 이데올로기를 매우 의식적으로 강화·조장하는 것을 통해 해결됐습니다. 그래서 인종차별주의는 처음에 아프리카인의 노예화를 정당화하는 논리로 시작해 18세기 말과 19세기 초 완전한 체계를 갖추면서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형태의 현대적 인종차별주의로 발전했습니다.   

인종차별주의가 발명됐다는 것은 너무나 분명합니다. 왜냐하면 18세기 내내 도망친 노예들은 런던의 빈민가 ― 특히 이스트엔드 지역 ― 에 사는 가난한 백인한테서 항상 피신처를 얻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만약 백인들이 항상 흑인들을 열등한 존재로 여겼다면, 그들은 흑인 노예들이 도망치도록 돕거나 보호하려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와 비슷하게, 미국 남부의 여러 주(州)에서 가난한 백인들은 자신들이 흑인 노예와 비슷한 처지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그들끼리 서로 증오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남아공에서 아파르트헤이트가 유지되고 있을 때, 지배자들은 백인과 흑인 또는 유색 인종 사이의 결혼을 금지하는 법률을 만들어야 했습니다. 만약 인종차별 사상이 자연스러운 것이었다면 그들이 그러한 법을 만들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이와 비슷하게, 영국은 18세기 말에 자신의 식민지였던 인도에서 백인들, 특히 백인 여성이 인도 남성과 관계를 맺거나 결혼하는 것을 금지하는 법안을 추진해야만 했습니다.

이것은 식민지 권력이 분리를 강화하기 위해 추진한 일들이었습니다. 아시아 지역에서 일본 제국주의도 비슷한 패턴을 따랐습니다. 그들은 한국인이나 중국인들이 더 열등하다고 가르쳤습니다.

요컨대, 자본주의의 발전과 근대 인종차별 사상 사이에는 분명한 역사적 관계가 존재합니다. 마르크스주의와 인종차별 문제는 아무 관계가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마르크스주의의 근본 요점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마르크스는 인종차별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는 백인 남성이 아니었습니다. 18세기 말에 그는 아일랜드 노동자 문제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영국의 모든 상공업 중심지에는 영국 프롤레타리아와 아일랜드 프롤레타리아라는 두 개의 적대적 진영으로 분열해 있는 하나의 노동계급이 있다. 평범한 영국 노동자들은 아일랜드 노동자들을 자신들의 생활 수준을 낮추는 경쟁자로 여겨 증오한다. 아일랜드 노동자들에 관한 한, 영국 노동자는 자신이 지배 민족의 일원이라고 느끼고 따라서 아일랜드에 대항해 자기 조국의 귀족과 자본가들의 도구가 되고, 그 결과 자신을 지배하는 귀족과 자본가들을 강화한다. 영국 노동자는 아일랜드 노동자에 대한 종교적·사회적·민족적 편견을 소중히 간직한다. 아일랜드 노동자들에 대한 그들의 태도는 그 전 노예제 국가 상태의 미국에서 ‘가난한 백인’이 ‘검둥이’를 대하는 태도와 동일하다. 아일랜드인은 이자까지 덧붙여서 보복을 한다. 그는 즉시 영국 노동자를 영국의 아일랜드 지배의 공범자이자 그것의 어리석은 도구로 보게 된다. … 이러한 적대 관계야말로 영국 노동계급이 자신의 조직을 가지고 있음에도 무기력할 수밖에 없는 비밀이다. 그것은 자본가 계급이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는 비밀이다. 그리고 그 계급은 그 사실을 완전히 알고 인식하고 있다.”

그리고 아프리카인 노예 제도에 관해서 마르크스는 “원시적 축적 방법은 임금노동 형태의 유럽의 은폐된 노예제가 살아남으려면 신세계의 순수하고 단순한 형태의 노예제가 필요했음을 뜻한다”고 말했습니다.

이렇듯 분열을 부추기는 정서를 강화하는 것이야말로 자본주의의 핵심 특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본주의는 필요하다면 세계 어느 나라 어느 곳에 있는 노동자들이든 데려와 착취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을 성공적으로 착취하기 위해서는 그들을 분열시켜 놓아야만 합니다.

그래서 영국에서 토니 블레어는 시민권이라는 개념을 이용해 백인들이 아시아계나 흑인계 영국인들보다 우월하다고 느끼게 만들고자 합니다. 마찬가지로, 한국 국가가 이주노동자들 ― 시민권이 없고, 그 때문에 주택이나 실업 등에 대한 적절한 처우도 받지 못하는 ― 에게 취하는 태도도 한국 노동자들의 우월감을 조장해 지배 민족의 일부라고 느끼도록 하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인종차별에 맞서 싸울 수 있을까요? 많은 사람들은 투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억압받는 사람들이 하나의 공동체를 형성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분명 인종차별 경험은 그러한 피억압 집단 출신의 사람들이 모두 겪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착취와 억압의 관계라는 핵심 문제를 무시합니다.

인종차별과 억압에 대한 공통의 경험 자체만으로는 결코 억압에 맞선 투쟁이 성공할 수 없습니다. 인종 억압의 문제는 계급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이죠.

예컨대, 미국의 경우 지금 국무부 장관 자리에 콘돌리자 라이스가 앉아 있습니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지금 역사상 가장 많은 흑인들이 사형선고를 받고 있습니다. 그리고 매우 많은 흑인 병사들이 이라크에서 죽어가고 있습니다. 콘돌리자 라이스가 흑인 여성이기는 하지만 그의 이해관계는 감옥에 있는 이른바 “흑인 형제들”이 아니라 미국 국가의 이해관계와 연관돼 있는 것이죠. 

이와 비슷하게, 지금 영국에서는 토니 블레어 덕분에 역사상 가장 많은 아시아계와 흑인 의원들이 의회에 진출해 있습니다. 그러나 최근 압도 다수가 아시아계나 흑인들인 국회 청소원들이 파업을 벌였을 때 단 한 명의 아시아계나 흑인 의원도 이들을 지지하지 않았습니다.  

“공동체”에 대한 이러한 혼란한 생각은 문화가 사람들을 단결시킬 수도 있지만 또한 분열시킬 수도 있다는 점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1976년 영국에서 아시아인 노동자들이 참가한 매우 격렬한 파업이 벌어졌습니다. 그들은 노조 인정을 위해 영웅적으로 투쟁했고, 인종차별주의자이자 여성차별주의자이기도 한 야비한 고용주에 맞서 싸웠습니다. 그러나 노조 관료들은 아무 일도 하지 않았고, 오히려 파업에 반대했습니다.

자, 누가 이 아시아인 노동자들의 투쟁을 지지했을까요? 아시아인 공동체의 친구들일까요? 그렇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파업 참가자들을 비난하고 비아냥거렸습니다. 그들은 파업 참가자들이 공동체의 망신거리라고, 여자들이 있을 곳은 집과 부엌이라고 말했습니다. 파업 대열에 참가해 TV에 나오지 말고 요리나 하고 애나 보라는 거였죠.

그러면 누가 이들을 지지했을까요? 바로 요크셔 지역의 탄광 노동자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들은 전부 백인 남성들이었습니다. 그들은 파업을 벌이고 있는 이 아시아인 여성들을 지지하기 위해 요크셔의 탄광에서 무려 3백20킬로미터를 여행해 런던까지 왔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공동체와 계급을 혼동해서는 안 됩니다. 좌파가 인종차별에 맞서 어떻게 싸워 왔는지를 살펴보면, 몇 가지 배울 만한 교훈이 있습니다.

19세기 말 미국의 사회주의노동당은 인종차별을 순전히 계급 문제로 파악했습니다. 그들은 흑인 노동자들이 백인 노동자들은 서로 전혀 다르지 않고 똑같다고 주장했습니다.

미국 사회당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사회당 좌파를 지도한 탁월한 사회주의자 유진 뎁스조차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가 흑인들에게 제공할 뭔가 특별한 것은 없다. 그리고 우리는 모든 인종들에게 따로따로 호소할 수도 없다. 사회당은 피부색과 무관한, 노동계급 전체의 당이다.”

이것은 아주 그럴듯한 주장처럼 들립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흑인 노동자들과 백인 노동자들, 흑인과 백인이 똑같다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피부색을 따지지 않는 태도의 문제점은 인종차별 문제를 완전히 무시한다는 것입니다. 흑인들이 두들겨 맞거나 살해당하는 문제를 무시한 채 흑인 노동자들에게 말을 걸거나 그들과 관계를 맺을 수는 없습니다.

그런 태도는 또 많은 백인 노동자들이 받아들이는 인종차별 사상에도 도전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백인 노동자들이 어떻게 인종차별 사상을 떨쳐버리는지 이해하지 못합니다.

프랑스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지난 몇 년 동안 프랑스 좌파들은 많은 실수를 저질렀습니다. 그들은 프랑스 사회에 널리 퍼져 있는 반(反)무슬림 또는 반(反)아랍 인종차별 문제를 완전히 무시했습니다. 왜냐하면 프랑스에 인종차별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인종차별이 사라지기를 빈다고 해서 사라지지 않습니다.

프랑스 좌파들이 인종차별적 후퇴가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한 것만이 문제가 아닙니다. 인종차별이 훨씬 더 심해지고 있습니다. 프랑스 좌파들은 프랑스 무슬림들과 아랍인들이 프랑스 사회에 충분히 동화하지 않고 자신들의 독자성을 고수한다고 비난하는 프랑스 국가를 편들었습니다. 그래서 프랑스에서는 비극이게도 가장 억압받는 사회 집단이 좌파를 자신들의 구원자, 동맹 세력으로 여기지 않게 됐습니다.

이 두 사례 모두 혁명가들은 “억압받는 사람들의 호민관”이 돼야 한다는 레닌의 말을 좌파가 이해하지 못했음을 보여 줍니다. 이 말은 혁명가들과 사회주의자들이 억압받는 사람들을 가장 비타협적으로 강경하게 방어해야 하고 인종차별이 나타날 때마다 이에 도전해야 한다는 뜻이었습니다.

인종차별에 도전하는 더 효과적인 방법은 1930년대 미국에서 찾아 볼 수 있습니다. 당시 미국 공산당은 인종차별과 억압이 계급 억압의 확장일 뿐이라는 사상을 의식적으로 떨쳐냈습니다.

공산당 창립자인 제임스 P 캐넌은 말하기를, 피부색을 따지지 않는 태도의 실천적 결론은 혁명이 일어날 때까지 인종차별과 억압에 대해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며 입 다물고 가만히 있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피부색을 따지지 않는 태도 때문에 흑인 문제를 회피하는 일들이 벌어졌을 뿐 아니라 그런 태도가 백인 급진주의자들의 편견을 은폐하는 편리한 방패 구실을 하기도 했다고 지적했습니다.

공산당의 태도는 1931년에 일어난 유명한 스코츠버러 사건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백인 소녀를 강간한 혐의로 아홉 명의 흑인 소년들이 기소됐습니다. 증거는 전혀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흑인이라는 사실만으로도 그들의 유죄를 주장하기에는 충분했습니다.

공산당은 그 청소년들의 변호인단을 구성했고, 흑인 지역사회에서 집회를 조직했으며, 미국 전역에서 그들의 석방을 요구하는 서명 운동을 벌였고, 법정 밖에서 팻말 시위를 조직했으며, 스코츠버러 소년들을 지지하는 국제적 캠페인도 주도했습니다.

공산당의 활동이 훨씬 더 빛난 이유는 미국유색인지위향상협회(NAACP) 같은 보수적 흑인 단체들이 그 사건을 철저히 외면했기 때문입니다. 그런 단체들은 강간·폭력배들과 엮이고 싶지 않다고 말했습니다.

그 사건 때문에 주류 백인단체뿐 아니라 보수적인 흑인단체들도 공산당을 철저하게 경멸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원칙 있는 태도 덕분에 공산당은 평범한 흑인 노동자들과 흑인 지역사회에서는 영웅 대접과 존경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수천 명의 흑인 노동자들과 흑인들이 공산당에 가입했을 뿐 아니라 공산당이 1930년대에 조직한 산업 조직에도 가입했습니다.

그리고 공산당의 지도를 받는 노동조합의 흑인 노동자 조합원이 10만 명에서 50만 명(1940년)으로 증가했고, 흑인 공산당원도 1930년 1천 명에서 1939년 5천 명으로 증가했습니다.

이런 일이 가능했던 것은 당시 미국 공산당이 인종차별과 억압 문제를 다루는 것이 중요하고, 그것이 자본주의와 어떤 관계가 있는지 알고 있었고, 스코츠버러 사건이 흑인 노동자들과 백인 노동자들을 어떻게 분열시킬 것인지 즉시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공산당은 인종차별이 흑인 노동자들과 백인 노동자들의 분열을 조장하는 데 이용될 수 있으므로 이에 원칙적으로 맞서 싸워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이런 식으로 그들은 혁명가는 “억압받는 사람들의 호민관”이어야 한다는 레닌의 말을 실천에 옮겼고, 이것이 바로 전 세계의 혁명가들과 사회주의자들이 인종차별에 맞서 싸울 때 명심해야 할 교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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