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대선에서 국민의힘을 패퇴시키기 위해 이재명 민주당 후보를 찍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좌파 성향 청년들과 사회운동가들은 적지 않다. 후자의 사례로 많은 노동조합 간부들, 성 주류화 전략을 여전히 지지하는 한국여성단체연합과 소속단체 활동가들, 얼마 전 이재명 캠프에 들어간 박지현 디지털 성범죄 근절 운동가 등을 들 수 있다.

그들은 윤석열이 진정한 개혁과 정의를 염원하는 청년들의 신뢰를 받지 못한다는 점이 입증되기를 바란다.

그들의 심정은 완전히 이해할 만하다. 다만, 이재명 민주당 후보를 지지하는 것은 반드시 비판이 동반돼야 하고 투표 행위에 국한하는 것이어야 한다(이를 두고 ‘비판적 투표’ 전술이라고 함).

이하에서는 당의 성격 때문에 (투표 행위를 넘어) 민주당을 활용할 수 없음을 논증하고자 한다.

부르주아(거리낌 없이 자본주의적) 정당

좌파 운동의 연장으로서 또는 좌파 운동의 고양을 위해 민주당원이 되는 사람은 별로 없다. 대다수 민주당원은 ‘사람을 생각하는’ 강령을 가진 정당이 공천한 ‘사람을 생각하는’ 공약을 제시하는 후보를 선출함으로써, ‘사람을 생각하는’ 개혁 입법을 얻을 수 있다고 믿는 친자본주의적 개혁주의자들이다.

그들은 선거를 통한 집권과 급진적 대중 운동이 양립하기 어렵다고 믿는다(숨기지 않는 반자본주의적 선전은 아예 말할 것도 없고).

오히려 선거를 통한 변화가 급진적 대중 운동의 대안이라고 믿는다. 아래로부터의 대중 운동과 그것의 조직에 뒤따르는 다양한 위험 부담을 피하면서 제도 개혁을 위한 수단으로서 선거를 택하는 것이다.

대중 운동의 부침과 민주당의 실세 변동 사이의 관계를 거꾸로 보는(그럼으로써 민주당 정치인들에게 의존하는) 온건 개혁주의자들이 많다. 그러나 민주당은 대중 운동이 고양될 때 유력한 정치 세력으로 떠올랐고, 대중 운동이 쇠퇴할 때는 그 존재가 두드러지지 못했다.

이 점은 1997년 말 ‘외환 위기’로 급격히 고양된 노동자 저항에 힘입은 김대중의 대통령 당선, 2002년 말 40만 청년 촛불 시위에 힘입은 노무현의 대통령 당선, 2004년 봄 우파의 노무현 탄핵에 항의한 시위에 힘입은 노무현의 총선 압승, 2016년 박근혜 퇴진 촛불 시위에 힘입은 이듬해 문재인의 대통령 당선 등을 돌이켜봐도 금세 명백해질 것이다.

한편, 결국 민주당은 급진적 대중 운동을 우회하고 결국 견제하는 구실을 해 왔음도 알 수 있다. 예컨대 1987년 7∼8월 노동자 대파업 당시 김대중과 김영삼은 12월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일어난 그 운동을 우려의 눈으로 바라보면서 “자제하라”고 “권고”했고, 해고당한 노동자들이 자기네 당사에 찾아가자 박대와 모멸로 응답했던 것이다.

민주당은 선거에서 이기는 최선의 길이 급진적 대중 운동이나 유권자의 사상 변화를 꾀하지 않고 그저 유권자의 기존 견해를 반영함으로써 그들을 투표함으로 유인해, 자기네에게 표를 찍도록 하는 것임을 잘 안다.

그러기에 민주당 정치인들은 (옛 독재 정권의 잔당 정치인들처럼) 선거 공약 뜯어고치는 조변석개를 식은 죽 먹기처럼 한다.

이런 때, 민주당을 정치적으로 지지하는 사회운동가들은 민주당 후보(가령 이재명)가 선거에서 승리하면 대중의 조건이 개선될 것처럼 대중에게 말해야 한다.

지금까지 논의한 요인들 때문에, 민주당을 사회운동에 이롭게 ‘활용’하려 하는 온건 개혁주의자들은 심각한 장애에 부딪히고 만다. 활용하기보다는 활용 당한다.

결국 그들은 자신의 애초 급진성을 누그러뜨리고 점진적 방식을 택하는 결과에 봉착하게 된다.

민주당 정치와 피억압 대중 운동

선거로 민주당 정부를 세워 사회 개혁을 이루겠다는 온건 개혁주의자들은 민주당(그리고 더 일반적으로 개혁주의 정당) 정치와 피억압 대중 운동의 본질적 차이를 알아야 한다.

대중 운동에서는 사람 수만이 중요한 게 아니라 그들이 무엇을 하느냐도 중요하다.

그러나 민주당 정치에는 숫자가 가장 중요하다. 되도록 많은 사람들이 투표하도록 하는 것과 다수표를 얻는 것이다.(물론 자금 문제도 있지만, 그것도 결국 숫자 문제다.)

그러므로 민주당 정치인들은 사람들의 의식을 바꾸는 어려움을 택하기보다는 사람들의 기존 의식에 자기들의 정강과 공약을 적응시키는 것이 선거에서 승리하는 길임을 안다. 추수주의는 불가피한 방도가 된다.

그가 우파라면 그는 좌측으로 이동해야 한다. 그가 좌파라면 그는 우측으로 이동해야 한다. 중간 부동표 획득이 최대 관건이 된다.(윤석열과 이재명의 경합 양상을 보라.)

선거에서의 승리만이 가장 중요한 것이다. 당선되지 못하면 말짱 황일 테니까 말이다.

사회운동가가 이런 선거주의 논리에 말려들면 목적과 수단이 전도돼, 급진적 사회 비판을 유보할 수밖에 없다. 민주당이 선거에서 승리하는 데에 도움이 되지 못할 테니까 말이다.

똑같은 논리로 민주당 정치의 지지자들도 좌파적 후보에게 별로 공감하지 못한다. 그들은 민주당을 ‘활용’하고자 하는 좌파적 인사들에게 재갈을 물리고 고삐를 매려 한다.

그러므로 좌파 성향 사회운동가가 민주당 정치와 선거 운동을 지지하면 아무리 자기 딴에 정치적 독립성을 견지하려 해도 불가능할 테니, 치명적인 정치적 대가를 치를 수밖에 없다.

민주당 정치를 지지하는 것은 대중의 의식과 행동을 녹슬게 함으로써 사회운동의 목적에 어긋나는 결과를 빚을 뿐이다. 대중 자신의 집단 행동이 아니라 선거가 대중의 조건 개선과 사회 개혁에 효과적인 전략이라는 생각과, 대중 자신이 아니라 민주당이 개혁을 제공해 줄 것이라는 생각을 유포해야 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민주당 정치가 사회운동의 일환인 양 사람들이 착각하게 만들거나, 민주당의 공약이 진보적 공약이라도 되는 양 착각하게 만들고 만다.

민주당 정치를 지지하는 사회운동가들 가운데는 민주당 지지와 자신들에 대한 지지를 동일시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특히, 자칭 페미니스트 문재인 등장 이후 대다수 페미니스트들이 그랬다.)

대중은 그런 동일시의 영향을 받을 것이다. 그래서 문재인의 배신에 환멸을 느낀 대중의 상당수가 페미니즘에 대한 백래시 반응을 보였던 것이다.

대중 운동과 민주당 정치는 대중이 힘을 증대시키고 조직을 건설하며 의식을 높이는 데 미치는 효과 면에서도 크게 다르다. 대중 운동에서 대중은 법과 종종 충돌할 수밖에 없고, 따라서 법의 계급적 성격을 이해하기 시작할 수 있다. 또, 종종 불가피하게 경찰과 충돌해야 하고, 따라서 국가의 계급적 성격을 이해하기 시작한다. 더 나아가 자본주의의 논리를 이해하기 시작할 수도 있다.

한편, 운동에 참가하는 대중은 다른 부분의 대중으로부터 도움과 지지를 받아야 한다고 느끼게 된다.

그래서 대중 운동은 진정한 역량을 창출하는 과정이 될 수 있고, 또한 지속적 조직화를 낳을 잠재력과 참가자의 의식을 변화시킬 잠재력이 있다.

그러나 민주당 정치는 이와 정반대 효과를 낸다. 그것은 대중으로 하여금 아무와도 맞서게 하지 않으며, 대중의 삶이 걸려 있는 일상적 저항을 수행할 조직의 성장을 가져오지도 않는다. 그것은 아무의 세계관도 바꾸어 놓지 않으며 아무의 삶에도 충격을 주지 않는다.

민주당 정치는 대중의 조직화나 의식 또는 진정한 역량에 아무런 실질적인 변화도 가져오지 못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계급투쟁을 통해서는 지배계급의 사상적 지배에서 어느 정도 벗어나고 지배적 관념을 다소 떨쳐버릴 수 있지만, 금권과 허위 의식이 난무하는 민주당 정치를 통해서는 그런 생각과 관념이 오히려 강화될 것이다.

맺음말

위에서 우리는 민주당을 ‘활용’하는 데 장애가 되는 요인들과, 대중 운동과 민주당 정치의 본질적 차이에 대해 살펴봤다. 민주당 지지 전략은 이를 이해하지 못해, 스스로가 애초에 목적한 바, 곧 민주당 정부를 통한 개혁을 성취할 수 없게 된다.

특히, 민주당과의 동맹(포퓰리즘 전략)은 계급을 초월한 전략인데, 지배계급 내부의 경쟁이 노동계급 사람들의 상호 관계 속으로 흔히 내면화되므로, 노동계급 내 분열이 확대·심화된다.

그러면, 지배계급의 노동계급 이간/각개격파 전략을 돌파할 능력이 더욱 줄어들게 된다.

싸울 자신이 없는 분위기가 사회운동 속에서 번져나갈 것이고, 싸울 자신이 없어지면 사기가 저하된다.

그러면, 지배자들의 이간질 각개격파 전술들을 패퇴시킬 효과적인 저항을 펼치기가 쉽지 않아질 것이다.

일종의 악순환이다. 이것이 문재인 집권 하에서 사회운동 측에 일어난 일이다.

선거 참여를 이용해 그럴듯한 강령을 선전함으로써 이런 꼬인 상황을 돌파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대중에게 진짜로 새겨 주어야 할 것은 마르크스가 브라케에게 보낸 편지(1875년 5월 5일)에서 강조한 바, 곧 “현실 운동의 한 스텝, 한 스텝이 한 묶음의 강령보다 중요하다”는 점이다.

대중 스스로가 조직하고 집단 행동에 나섬으로써 그 그럴 듯한 강령의 내용을 쟁취하기 위해 싸울 수 있는 역량을 한 걸음 한 걸음 다져 나아가는 것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점이다.

이는 문재인 정부하에서 일어난 노동운동을 개혁주의적 지도부들이 조합주의적(부문주의와 경제주의) 한계 안에 가둬 놓는 바람에 미발전된 대중의 정치 의식을 제고할 유일한 출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