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하영 다함께 운영위원이 최우영 납북자가족협의회 회장을 만나 납북자 문제에 대한 얘기를 나눴다. 최우영 씨는 메이데이 집회 때 〈다함께〉 신문을 구입해 읽어본 적도 있는 삼십대 중반의 평범한 여성 노동자이고 사회보험노조원이다.

최우영 씨는 “가족을 돌려달라는 얘기를 남북 화해의 걸림돌로 봐서는 안 된다”고 진보진영 일각에 일침을 놓는다. 납북자 문제를 반북적 우익의 쟁점쯤으로 취급하는 사람들은 모두 “남북한이 껄끄러워하는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야말로 진정으로 화해와 평화를 상징하는 것”이라는 그녀의 얘기에 귀 기울일 필요가 있다.

인터뷰 후에 최우영 씨는 “이번 장관급회담에서도 우리 정부는 실망을 안겨주는군요. 하지만 저는 아버지를 절대 포기 못하며 꼭 모셔올 것입니다”라는 가슴 아픈 메일을 보내왔다.

김하영: 1987년 1월 15일 동진호는 왜 납북됐고, 북한은 최우영 회장의 아버지 최종석 씨를 비롯한 동진호 선원들을 왜 돌려보내지 않았습니까? 북한적십자회는 6일 만인 1월 21일에 송환 의사를 밝혔었는데 말입니다.

최우영: 1987년 1월 15일 TV를 통해 동진호가 납북됐다는 사실을 알게 됐어요. 동진호가 공해상으로 들어가게 됐던 거죠. 처음에는 아버지가 곧 돌아온다고들 했습니다. 북한측에서도 송환하겠다고 했고요. 그런데 국내에서 박종철 고문 치사 사건이 일어나면서, 탈북해서 대만으로 갔던 김만철 씨 가족을 정부가 남한으로 데려왔죠. 그러자 북한은 동진호를 돌려보내겠다는 약속을 일방적으로 깨고, 김만철 씨 가족과 맞교환을 요구했어요. [남한] 정부가 이를 거절하자 북한은 동진호를 간첩선으로, 선장 김승근 씨와 어로장인 제 아버지를 간첩으로 몰았죠. 그래서 못 오게 된 거죠.

김: 그래서 얼마 전 김정일 국방위원장에게 띄운 공개 서한에서 아버지가 “지난 18년 동안 남북한의 체제경쟁 구도 속에서 억울하게 간첩이란 누명”을 썼다고 얘기하셨군요. 북한판 간첩 조작 사건인 셈이네요.

최: 그렇죠.

김: 아버지가 간첩 누명을 썼다는 사실을 납북 직후에 아셨습니까?

최: 아뇨. 전혀 몰랐어요. 1998년도에 신문을 보다가 아버지가 정치범수용소에 수감돼 있다는 사실을 우연히 알게 됐어요. 정부는 우리에게 이런 얘기를 해준 적이 전혀 없었거든요. 사실, 저는 아버지를 원망하고 있었어요. 우리를 사랑한다면 목숨을 걸고라도 와야 하는 거 아니냐고도 생각했죠. 북한에 간 사람들이 그럭저럭 잘 산다는 얘기도 있고 해서 저는 아버지가 선물을 사 가지고 돌아오실 것 같은 막연한 생각을 하곤 했어요. 그런데 정치범수용소에 있다는 사실을 알고는 피눈물이 났어요. 지난 세월을 생각하니 가슴이 더 아팠죠.

그 때부터 북한에 대해, 아버지가 왜 정치범수용소에 가게 됐는지에 대해 추적하기 시작했죠. 그러다가 1999년 12월 7일 방송된 ‘PD수첩’을 통해 아버지가 간첩으로 몰렸다는 사실을 알게 됐어요. 납북된 그 해 4월, 아버지가 북한 TV에 나와서 간첩이라고 시인하는 것을 본 거죠. 그 뒤 탈북자들을 통해 아버지 소식을 알게 됐어요. 한 탈북자가 1987년에 정치범수용소에서 아버지를 봤는데, 당시에 아버지는 한 달에 한 번 햇볕을 보러 나왔다고 해요. 한 달에 한 번 햇볕을 보러 나온다는 건 완전 통제구역에 있지 않다는 것이고 이것은 죽이지는 않겠다는 걸 뜻한다고 했죠.

김: 아버지가 지금은 어떻게 지내고 계신지 아십니까?

최: 18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잘 몰라요. 최근 한 정부관계자를 통해 아버지가 위독하다는 얘기를 듣긴 했는데, 아버지 생사에 대한 공식적인 답변은 아직 없어요.

김: 언제부터 납북자 송환을 위한 활동을 하시게 됐습니까?

최: 아버지가 인권이 가장 열악한 정치범수용소에 있다는 사실을 알고부터요. 정부를 믿어서는 안 되고, 누가 뭐래도 딸인 내가 아버지를 찾아나서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일본의 납북자 가족들이 송환을 호소하는 모습을 보고 희망을 얻기도 했죠. 제가 가만히 있었더니 아버지는 인권의 바닥 상태에 있었죠. 만약 내가 움직이면 비전향장기수 관련 단체들처럼 우리에게 관심을 갖는 단체들이 생길 것이라고 기대했어요. 그래서 저와 같은 아픔을 가진 가족을 모아서 활동을 하기 시작했죠.

김: 아버지 납북이 전두환 정권 때 있었던 일인데요, 전두환 정권은 아버지 송환에 노력을 기울였습니까? 또, 납북자 가족들에 대한 남한 정부의 대우는 어땠습니까?

최: 아버지가 납북된 직후에는 적십자사라든지 여러 정부기관이 송환 촉구 관련 전통문을 북한에 보내곤 했다는 소식을 들었어요. 그러나 납북자 가족에게 보상을 한다든지 하는 일은 전혀 없었죠. 가난한 납북 선원의 자식들은 경제적 지주를 잃은 채 가난을 대물림하곤 했어요. 아직도 겨울이 두려울 만큼 가난한 사람들이 많이 있어요.

저야 민주화운동 세대라 그래도 덜한 편이었지만, 1960∼70년대에는 납북자 가족들이 고문을 당하기도 했고, 일상적인 감시를 받았어요. 완전히 빨갱이 가족 취급을 당했죠. 납북자들이 돌아와 접촉을 할까 봐 걱정했기 때문인 거 같아요. 납북자 자녀들은 공무원이나 공공기관에 취직할 수도 없었어요. 교사로 합격해도 발령이 나지 않았다고 해요. 어렵게 취직을 하더라도 매일매일 경찰들이 찾아오기 때문에 직장을 그만둬야 하는 아픔을 겪었고, 납북자 가족이라는 게 알려져 정든 고향을 떠나서 살아야 했죠. 납북자들은 북한에서, 납북자 가족들은 남한에서 인권의 사각지대에 있었던 거예요.

김: 5년 전 납북자가족모임이 남북정상회담을 환영하며 납북자 송환을 촉구하는 성명서를 냈던 기억이 납니다. 6.15 공동선언이 채택된 지 5년이 지났습니다. 어떤 변화가 있었습니까?

최: 저희도 햇볕정책의 수혜자가 되고 싶었어요. 김대중 대통령이 비전향장기수의 인권 문제를 언급했을 때 너무나 부러웠어요. 그런데 “갈 사람이 가면 올 사람이 온다”길래 참았어요. 우리가 참은 건 그 때가 처음이 아니었죠. 1993년 이인모 노인 송환 때도 참아야 했으니까요. 하지만 그 뒤에도 변한 건 없어요. 5년 동안 죽어라고 활동했지만, 지금껏 아버지 생사조차 제대로 모르죠. 북한도 벽이지만 우리 정부도 북한만큼이나 허물기 어려운 벽이예요. 이 정도로 여론화가 되면 정부가 성명서 하나라도 발표해야 하는 건데, 그런 일이 전혀 없었어요. 그만큼 우리 납북자 가족을 무시하는 건지, 여론을 무시하는 건지 모르겠어요. 우리 힘으로는 도저히 깰 수 없는 벽처럼 느껴져요. 더 많은 사람들이 힘을 보태줘야죠.

김: 납북자와 그 가족들은 남북 화해 협력 분위기의 사각 지대에 있군요. 최근 노란 손수건을 달며 언론의 주목을 받으셨는데 이에 대한 노무현 정부의 반응은 있었습니까?

최: 전혀요. 청와대도 몇 번 갔는데 안 돼서 정동영 장관에게 노무현 대통령 면담 신청을 두 번 했어요. 그런데 답이 없어요. 정말 너무 하죠?

김: 북한 정부는 어떤가요? 지난 2002년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고이즈미 총리와의 정상회담에서 계속된 부정을 뒤집고 최소한 13명의 일본인을 납치했음을 시인·사과한 바 있습니다. 동진호 선원을 비롯한 우리 납북자 문제에 대한 태도 변화는 없습니까?

최: 변화가 없어요. 여전히 “납북자 없다”예요. 북한은 이미 일본인 납북자 문제는 해결해 줬어요. 우리가 일본인만 못한가요? 도대체 무엇이 한민족이고 무엇이 통일을 위한 길인가요? 저는 적어도 우리 아버지 같은 납북자들이 당당히 휴전선을 넘어올 수 있는 것이 통일이라고 생각해요. 한국은 비전향장기수 문제를 해결했어요. 이제는 북한이 답할 차례라고 생각해요. 북한의 말대로라면 아버지도 북한의 비전향장기수인 셈이죠. 납북자 문제를 한민족의 문제로 여기고 진정으로 통일을 원한다면 이제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화답할 차례예요.

김: 진보진영의 상당수는 납북자 문제가 반북 감정을 일으켜 남북관계를 해칠 수 있다며 이 문제에 대해 침묵해 왔습니다. 진보진영에 대해서 하고 싶은 얘기나 바라는 점이 있다면?

최: 진정한 진보는 납북자 문제를 제기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가족을 돌려달라는 얘기를 남북 화해의 걸림돌로 봐서는 안 되죠. 남북한이 껄끄러워하는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야말로 진정으로 화해와 평화를 상징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비전향장기수 문제 해결은 평화와 통일의 상징이고, 납북자 문제는 걸림돌이라니 도대체 이게 무슨 기준인가요?
그 동안 남북한 정부는 최선을 다해 비전향장기수 문제를 해결했어요. 인권단체들도 최선을 다했고요. 이제는 그 정성으로 이 땅에서 태어나 가족을 잃은 납북자 문제에 최선을 다해주기를 바래요. 납북자들 대부분이 노동자들이라는 점을 잊지 말아 주세요. 선원, 교사, 학생, 대한항공 승무원, MBC 카메라맨 등 다 일하다가 납북된 노동자들이예요. 최근에 저는 아버지를 잃은 딸의 심정을 담아 노란 손수건을 달았는데, 이런 마음을 헤아려 여기저기서 노란 손수건을 달아주신 덕분에 희망을 잃지 않고 있어요. 적어도 납북된 노조원이 있는 작업장에는 노란 손수건이 걸렸으면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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