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기사는 같은 제목으로 열린 3월 24일 노동자연대 온라인 토론회(영상 보기)의 발제문이다.


사고 현장에 달려가는 견인차(렉카)처럼 논란에 달려들어 선정적인 짜집기 영상을 양산하는 ‘사이버 렉카’

2월 초 배구선수 김인혁 씨와 27살의 BJ(인터넷 방송 진행자) 잼미 씨가 악플과 온라인 괴롭힘으로 잇따라 목숨을 끊자 많은 사람들이 안타까워했다. 이 일을 계기로 사이버 렉카라는 말이 화두로 떠올랐다.

사이버 렉카는 사고 현장에 경쟁적으로 달려가는 견인차처럼, 논란과 이슈가 발생하면 거기에 재빨리 달려들어 짜깁기 영상을 만들고 조회수로 돈벌이를 하는 사람들을 비판적으로 가리키는 말이다. 특정 연예인이나 유튜버, 심지어 참사 유가족의 사생활을 캐거나 집요하게 공격해서 논란을 일으키는데, 위의 경우가 그 피해 사례다.

소셜 미디어를 통해 벌어지는 이런 현상에 많은 사람들이 우려하고 있다. 특히, 남성 청년들의 의식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우려가 크다. 20대 남성들이 사이버 렉카나 일베, 디씨인사이드 등 남초 커뮤니티에 빠져 보수주의와 안티 페미니즘으로 이끌리고 있다는 것이다.

미디어와 대중 문화 탓에 청년층이 보수화된다는 주장은 사실 새로운 것이 아니다.

가령 2003년 홍세화 씨는 대중문화와 소비문화의 확산 때문에 대학생이 보수화됐다며 〈한겨레〉에 ‘그대 이름은 무식한 대학생’이라는 칼럼을 실어 큰 논란을 일으켰다.

또, 2013년 대선에서 박근혜에 대한 20대 남성의 지지율이 상대적으로 높게 나오자, 당시 좌파의 일각에선 일베 사이트의 성장을 청년층 보수화의 원인으로 지목했다.

그러나 바로 그 ‘무식한’, ‘보수화된’ 20대 청년들이 그런 매도나 재단의 대상이 된 지 얼마 안 돼, 2008년 광우병 위험 미국산 쇠고기 수입 반대 촛불 운동의 주축이 됐고, 2016년 박근혜 퇴진 촛불 운동에 대거 나섰다.

그러면서 그런 주장들은 잠시 고개를 숙이는 듯했다. 하지만 지금 형태를 달리해서 다시 나타나고 있다.

최신 버전은 이렇다. “청년들은 여가에서 떼어놓을 수 없는 유튜브를 통해 정치 일반에 대한 피상적 인상을 쌓는다. … 렉카를 통해 시사를 접하는 사람들은 어떤 이슈의 경중과 그 해석을 그들에게 맡기는 것과 다름 없다.”(《급진의 20대: K-포퓰리즘 — 가장 위태로운 세대의》 중에서)

주입?

미디어가 대중의 의식을 지배한다는 생각은 아주 흔하다. 미디어가 그 열독자나 시청자들의 머릿속에 낙후한 관념을 주입한다는 것이다.

특히 소셜 미디어의 경우 알고리즘에 의해 특정 견해만 거듭 제공돼, 편향과 편견을 주입하는 효과가 더 강하다고도 한다.

미디어에 대한 이런 생각은 공식 정치권에서도 지배적이다. 그래서, 공식 정치 진입을 중시하는 정당은 모두 보통의 사람들을 위한 정책을 내놓는 것보다 미디어를 장악하는 것이 선거에서 이기는 열쇠라고 본다.

일부 좌파들도 미디어가 대중의 의식을 지배한다는 생각을 어느 정도 공유한다. 그래서 대중을 ‘우매하게 만드는’ 언론을 개혁하는 것이 대중 의식과 사회를 개혁하는 첫 걸음이라고 보거나, 때로는 미디어상의 표현을 법으로 규제하고 처벌하는 것을 강력히 주장하기도 한다. 표현의 자유를 위축시킬 위험이 있는데도 말이다.

많은 미디어들이 보수적 편견을 부추기는 것은 사실이다. 그렇다고 그런 미디어들이 대중의 의식을 좌우할까? 만일 그렇다면, 그런 미디어가 대중을 체제에 순응시키고 보수적 편견을 퍼뜨리므로 사람들은 정치적으로 무력하게 될 것이다.

오늘날 사회에서 미디어가 하는 구실을 알기 위해 먼저, 그것을 지배하는 자들은 누구인지 살펴보고, 그다음으로 그것이 대중의 의식에 끼치는 영향은 얼마만큼 되는지 보고자 한다.

누가 미디어를 지배하는가?

자본주의 사회의 미디어는 대부분 자본가 계급이 소유하며 기존 사회 질서를 정당화하는 사상을 퍼뜨린다

자본주의 사회의 미디어는 대부분 기업의 일종으로, 그 지배력은 한줌의 지배계급인 자본가 계급의 수중에 있다. 소셜 미디어라고 부르는 매체들도 이런 점에서 실은 빅테크 대기업들이 소유하고 있는 뉴 미디어이다.

가령 미디어 제국을 건설한 황제라 불리는 루퍼트 머독은 52개국에서 780여 개의 미디어 사업을 운영하고 있다. 그중에는 미국의 최고 유력 언론인 〈월스트리트 저널〉과 영국의 〈선〉, 〈타임즈〉 등이 있다.

2013년에는 아마존 창업자 제프 베이조스가 미국의 〈워싱턴포스트〉를 인수하면서 언론계에 충격을 주기도 했다.

한국의 조·중·동 또한 방상훈 일가, 홍석현 일가, 김병관 일가가 지배하는 언론 대기업들이다.(문화일보도 삼성의 관심사를 충실히 반영해 왔다.)

이런 미디어 사주들은 모두 지배계급의 일원이자, 그 계급의 정치적 본능이 잘 발달한 자들이다. 그들은 기업주들과 주류 정당의 정치인들과도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과 친구들에게 이익을 가져다 주는 기존 사회 질서를 정당화하는 사상을 퍼뜨리는 데 큰 관심이 있다.

이러한 계급 배경이 자본주의 미디어가 친자본주의적인 성향을 갖는 이유다.

대부분의 미디어는 자본주의 사회의 관심사를 반영한다. 가령 기업 이윤이 증대하는 것은 당연히 좋은 뉴스로 취급된다. 그 이면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든 말이다.

대부분의 미디어는 치고박고 싸우는 공식 정치, 유명인의 사생활, 범죄나 스캔들에 집중하지, 보통 사람들의 삶에는 관심이 없다. 노동자 투쟁을 무시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가뭄에 콩 나듯 이를 다룰 때조차 노동자들이 왜 싸우는지는 대부분 말하지 않는다.

전쟁이 벌어지면 미디어는 자국 정부나 유력 동맹의 공식 선전 기구처럼 군다. 우크라이나에서 제국주의 간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 지금 우리는 이것을 똑똑히 보고 있다.

친자본주의적·친제국주의적인 편향은 단지 우파 미디어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객관적’이거나 ‘진보적’이라고 인정받는 미디어들조차 본질적으로 그렇다. 그런 신문의 데스크도 본질적으로 지배계급과 가깝고 기존 세계에 대한 이들의 생각과 가정을 공유한다.

가령 지난해 6월 최저임금위원회에서 경총과 노동계 사이에서 갈등이 벌어지자 〈한겨레21〉은 “노사가 임금 인상률 절대치를 두고 싸움판을 벌여선 안 된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내수 진작과 일자리 창출로 이어질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인상 방법을 찾아야 한다”고 덧붙였다.

이 주장은 ‘경제’(자본주의)를 위해서는 결국 노동자들이 임금 인상 투쟁을 자제해야 한다는 것이다.

미디어 경쟁

물론 대부분의 미디어가 친자본주의적 편향이라고 해서 각각의 정치적 성향이나 이슈별 논조가 두루 단일한 것은 아니다. 미디어가 단일하지 않은 것은 지배계급이 단일한 집단이 아니라 매우 자주 내부에 분열이 있음을 반영하는 것이다. 가령 〈조선일보〉는 국민의힘과 가깝고 〈한겨레〉는 민주당과 가깝거나, 미국의 폭스 뉴스는 공화당에 가깝고 할리우드는 민주당과 가까운 식이다.

그러나 혈맹처럼 보이는 이런 관계에도 때때로 균열이 일어난다. 박근혜 퇴진 촛불 운동이 일어나기 전, 박근혜 정부의 부패와 최순실 관련 보도를 가장 먼저 한 것은 TV조선이었다. 그 전까지 박근혜를 떠받들던 우파 언론들은 정부의 지배 정당성이 추락하자 서로 책임을 떠넘기며 이제는 치고받는 데 여념이 없었다.

2003년 영국의 〈데일리 미러〉가 미국 대통령 조지 부시 2세의 이라크 전쟁을 반대했던 것은 당시에 잘 알려진 사례였다. 〈데일리 미러〉는 영국의 대표적 언론 대기업이고 노동당 친화적인 신문이다. 그러나 토니 블레어 총리의 당시 노동당 정부가 지지하며 참전한 이라크 전쟁에 반대했던 것이다. 이것은 영국 지배계급의 분열을 반영하는 것인데, 이는 전례없이 크게 일어난 반전 운동의 영향이었다.

미디어들의 기존 관계에 균열이 일어나는 것은 미디어들이 서로 독자 확보 경쟁을 해서 광고 수익을 올려야 하는 것과도 관련이 있다. 자기 미디어를 시청하고 읽을 대중의 정서를 완전히 무시하지는 못하는 것이다.

이는 또한 미디어가 특정 기업인들이나 정치인들, 자국 정부가 참전하는 전쟁 등에 대해 때로 비판적인 보도를 하기도 하는 이유이다.

요컨대 지배계급은 주요 미디어를 소유하고 있지만, 결코 그것을 완전하게 통제하지 못하고, 미디어도 대중의 의식을 온전히 통제하지는 못한다.

미디어의 영향력, 얼마만큼인가

미디어가 대중의 의식에 미치는 영향이 없다고 말하려는 것은 결코 아니다. 일상적 시기에 미디어의 영향력은 크다. 그래서 (서두에 언급했듯이) 지배자들은 미디어와 인터넷을 어떻게든 더 통제하고 싶어 한다.

미디어는 사람들이 사회가 어떻게 돌아가는지에 관한 정보와 뉴스를 불만족스럽고 부족하게나마 얻는 중요한 통로이다.

사람들이 매일 텔레비전과 스마트폰을 들여다보고 거기에서 보고 읽은 것을 비교적 쉽게 받아들이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미디어가 대중의 의식에 미치는 영향은 ‘주입’ 이론이 주장하는 것보다는 훨씬 복잡하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1845~46년 집필한 《독일 이데올로기》에서 어떤 시대의 지배적인 사상은 지배계급의 사상이라고 지적했다. 사회의 물질적 수단을 지배하는 계급이 정신적 수단도 지배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마르크스는 제1인터내셔널 규약 전문() 등에서 “노동계급의 해방은 노동계급 자신이 이룩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만약 사람들이 지배적 사상을 그대로 주입받아 수용하기만 한다면 이런 일(자력 해방)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의 의식은 그저 미디어가 주입하는 대로 입력되는 것이 아니다. 대중의 의식은 현실에서 그들이 얻는 경험들(인생 경험, 조직 경험, 투쟁 경험)에 의해 형성된다.

그래서 자본주의적 상식이나 미디어 속 주장이 스스로의 경험과 충돌할 때 미디어의 주장을 나름으로 해석하고 나아가 비판적 의식도 갖게 된다.

미디어를 보고 읽는 사람들의 다수도 노동계급 구성원이다. 그런데 그들의 현실과 자본주의 지배 이데올로기 사이에는 큰 간극이 있다.

바로 그 간극이 노동자 대중이 지배 이데올로기에 의문을 제기하고, 절반만 받아들이거나 마침내 거부할 수 있는 공간을 열어젖힐 수 있다.

가령 대부분의 미디어는 이주 노동자나 난민, 조선족을 빌붙는 집단이나 잠재적 범죄자처럼 취급한다. 하지만 그들과 직접 교류해 본 사람들 사이에서는 미디어가 ‘심는’ 편견이 금세 줄어들 수 있다.

특히, 사람들이 대규모 시위나 파업에 참가하게 되면 미디어가 얼마나 편파적이고, 거짓말도 버젓이 하는지 깨닫게 된다.

지배적 사상이 강력하지만 그것이 대중 의식을 완전히 좌우하지는 못한다

투쟁이 커져 사회 전체에까지 영향을 미치면 보수적인 미디어의 열성 독자들조차 이런 분위기의 영향을 받게 된다. 그래서 자신이 수십년 구독한 미디어가 하라는 대로 하지 않는다. 가령 조·중·동 독자의 50~60퍼센트가 2008년 촛불 시위 때 그 시위를 지지했다는 조사 결과가 있다.(〈시사인〉 2018년 6월 21일자)

이는 촛불 시위를 불순한 배후세력에 의한 과격 시위라고 비난하던 그 신문들의 논조와는 다른 것이었다.

역사에서 지배적 사상의 영향력을 뚫고 투쟁이 일어난 일은 거듭 있었다. 엄혹한 독재 정권 시절에 한국 언론은 대부분 정치권력에 종속돼 있었지만 대중은 반독재 민주화 항쟁에 나섰다.

2003년 미국이 이라크를 상대로 전쟁을 벌일 때도 미국과 한국의 유력 언론들이 이라크에 대량 살상 무기가 있다는 부시 정부의 거짓말을 보도해 줬지만, 대규모 전쟁 반대 운동이 일어났다.

이런 사례들은 지배적 사상이 강력하지만, 그렇다고 무소불위로 대중 의식을 좌지우지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 준다.

이것은 중요한 함의를 가진다. 이런 점을 보지 않으면 대중 의식의 변화 가능성을 깔보게 되고, 사회의 변화에도 회의적이게 되기 때문이다.

지배 이데올로기에 어떻게 도전할까?

미디어의 영향력을 지나치게 크게 보는 사람들은 언론 개혁이 사회 개혁의 첫 걸음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미디어를 되도록 온전하게 통제하려 하는 지배자들의 시도에 맞서는 일은 무의미하지 않다.

그러나 미디어가 편향된 이유는 계급으로 나뉘어 그 이해관계에 따라 편향돼 있는 사회를 마치 거울처럼 비추기 때문이다. 거울을 깨뜨린다고 해서 사회를 바꿀 수 없다. 차별을 이용해 대중을 이간질하는 자본주의 사회가 여전하다면, 특정 미디어나 특정 소셜 미디어 계정을 없애도 또 다른 미디어가 그런 구실을 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미디어가 퍼뜨리는 사상에 의문을 제기하고 그것과 논쟁하면서, 자본주의 체제 자체에 반대하는 투쟁을 건설해야 한다. 두 측면이 모두 중요하다.

기성 미디어의 편견과 왜곡과 거짓말에 넌더리가 난 사람들은 대안적 미디어를 찾으려 할 것이다. 혁명적 미디어는 이런 사람들에게 지배자들의 거짓과 왜곡, 비밀을 폭로하고 온전한 진실과 진실만을 말해야 한다.

그리고 주변 사람들과 토론해야 한다. 이것은 변화를 염원하는 사람들이 세계를 더 잘 이해하고 그에 맞서 싸울 자신감을 줄 수 있다.

그러나 혁명적 미디어는 지배 이데올로기에 도전하는 것 이상을 해야 한다. 체제 자체에 맞선 투쟁을 조직하는 구실을 해야 한다. 체제에 맞서 싸우는 사람들의 조직과 연결망을 만들어야 하는 것이다.

노동계급이 분열돼 있고 그 조직이 약화돼, 노동자들이 원자화돼 있고 정치적으로 수동적일 때 미디어는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다.

그러나 자본주의에 맞선 저항을 대규모로 건설하면 많은 사람들이 지배 이데올로기에 도전하기 시작할 수 있다.

노동계급의 대중은 체제에 맞선 저항에 스스로 나섬으로써 사회를 변화시키는 동시에 비로소 자신의 의식도 바꿀 수 있다. 〈노동자 연대〉 신문과 노동자연대TV는 바로 이런 과정의 일부가 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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