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크라이나 전쟁은 평화로운 세계화(《세계는 평평하다》는 유명한 책 제목에서 드러나는 생각)가 착각일 뿐임을 보여 준다.

세계화 옹호론자들은 세계화와 경제적 상호의존이 확대되면 자유주의 국제 질서가 확립되고, 국제 기구들이 감독하는 세계시장의 틀 안에서 “공정 경쟁”이 이뤄지고, 각국의 정치적 자유가 증진될 것이라고 주장해 왔다.

미국의 우파 정치학자 프랜시스 후쿠야마가 30년 전에 《역사의 종언》에서 그렇게 주장했다. 그러나 지난 30년 동안 세계화는 전쟁과 위기로 점철됐고, 후쿠야마의 예견은 틀렸음이 확증됐다.

안타깝게도, 일부 좌파도 미국 주도의 자유주의 국제 질서를 강대국 사이의 군사적·지정학적 경쟁이 거의 사라진 질서라고 보는 듯하다. 다시 말해, 세계화로 인해 제국주의 국가들 간 전쟁이 불가능해졌다는 것이다.

미국의 중국 견제를 위한 ‘인도·태평양 경제프레임워크’(IPEF) 회의 ⓒ출처 백악관

그러나 경제적 경쟁과 군사적 경쟁은 불가분의 관계다. 지난 5월 브뤼셀 경제포럼에서 미국 재무장관 재닛 옐런은 이렇게 말했다. “원자재·기술·제품에서의 시장 지위를 활용하는 나라들이 자국의 이익을 위해 지정학적 영향력을 행사하거나 시장을 방해하는 것에 우리는 매우 취약해지고 있다.”

미국은 동맹국들과 협력해 중국·러시아의 이런 영향력을 약화시키고 싶어 한다. 이를 위해 오커스(미·영·호주 군사 동맹), 인도·태평양 경제프레임워크(IPEF) 등을 창설했다.

우크라이나 전쟁도 소련 붕괴 후 30여 년 동안 세계화, 특히 서방과 러시아(그리고 중국)의 경제적·지정학적 관계의 변화라는 더 넓은 맥락 속에서 살펴볼 때 그 본질을 제대로 알 수 있다.

경제적 상호의존

1990년대 이래 서방과 러시아는 경제적 상호의존을 늘려 왔다. 1990년 1월 맥도날드가 모스크바에서 개점했다. 1997년 당시 미국 대통령 빌 클린턴이 G7(주요 7개국) 회의에 러시아를 초대했다(G8).

2014년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의 크림반도를 점령하자 서방은 G8에서 러시아를 축출했다. 그럼에도 독일의 전 총리 게르하르트 슈뢰더는 2017년 러시아 최대 국영 석유 회사 로스네프트의 이사회 의장이 됐고, 우크라이나 전쟁 발발 직후 의장 자리에서 물러났다.

프랑스의 전 총리 프랑수아 피용도 러시아 석유 회사 시부르의 이사다.

이탈리아 최대 석유 회사 Eni는 러시아 가스회사 가스프롬과 가스 공급 계약을 체결했다.

프랑스 자동차 업체 르노는 1996년 러시아 자동차 업체인 모스크비치와 합작 생산을 시작했다. 르노는 러시아 최대 자동차 업체 아브토바즈의 최대 주주다.

러시아의 신흥 부호들(올리가르히)도 런던 금융 시스템을 이용해 부동산에 투자하고 돈 세탁을 하고 자식 교육을 시켰다. 2003년 석유 부호 로만 아브라모비치는 영국 프로 축구팀 첼시FC를 인수했다.(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영국 정부의 제재 대상이 된 아브라모비치는 얼마 전에 첼시FC를 매각했다.)

지정학적 관계

서방과 러시아의 지정학적 관계도 2014년 러시아가 크림반도를 점령할 때까지는 그럭저럭 협력을 유지했다.

1991년 7월 바르샤바 조약 기구(옛 소련과 동유럽 국가들의 정치·군사 동맹체)가 해체됐지만, 나토는 계속 존재했다.

러시아 지배자들은 나토가 옛 소련 공화국들로 동진할까 봐 두려워했다. 그래서 러시아는 나토에 협력을 제안했다. 1995년 당시 영국 국방장관 맬컴 리프킨드는 이렇게 말했다. “고르바초프와 옐친은 매우 협조적이었고, 서방과 가까워지기를 진심으로 바랐다.”

1997년 5월 27일 파리에서 나토-러시아 기본 협정이 체결됐다. 나토는 러시아의 안보적 이해관계가 위협받는 군사적 상황은 없을 것이라고 약속했다.

나토는 러시아를 위협하지 않겠다고 약속했지만 이는 공문구에 불과했다. 1997년 나토-러시아 기본 협정 회의 ⓒ출처 NATO

2009년 나토는 아프가니스탄 전쟁을 지원해 달라고 러시아에 요청했다. 러시아는 지원 조건으로 나토와의 협력 강화를 요구했다. 2011년 러시아 해군은 나토의 해상 훈련에 참여했다.

물론 양측이 협력적 관계를 유지하던 시기에도 긴장은 있었다. 나토가 유고슬라비아 내전에 개입해 1995년과 1999년 세르비아를 폭격하자, 러시아는 나토의 무력 개입에 불만을 나타냈다. 사실, 지금 푸틴은 미국과 그 동맹국들이 20여 년 전 세르비아에 가했던 야만적 행동을 우크라이나에서 재연하고 있다.

또, 1999년부터 폴란드를 필두로 옛 바르샤바 조약 기구의 회원국들이 나토에 가입하고, 2007년에 조지 W 부시 정부가 폴란드에 미사일방어시스템(MD)을 설치하기로 결정하자 러시아는 강하게 반발했다.(실제 배치는 오바마 정부 때 이뤄졌다.)

2008년 나토 정상회의는 우크라이나와 조지아가 나토에 가입할 수 있다고 확인했다. 옛 소련에서 가장 핵심적이었던 두 국가가 나토의 영향력 아래로 들어갈 수 있었다. 러시아는 조지아를 공격했고, 남오세티야와 압하지아의 러시아어 사용자들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그 지역을 점령했다. 나토는 감히 개입하지 못했다. 러시아가 냉전에서 패배했어도 세계에서 군사적으로 가장 강력한 국가들 중 하나임을 입증했다.

그러나 이때까지만 해도 양측의 관계는 파국으로 치닫지는 않았다. 1994~1996년, 1999∼2009년 러시아가 체첸을 무자비하게 파괴할 때 서방 지배자들은 이를 용인했다. 특히, 러시아가 2001년 이후 “테러와의 전쟁”을 지지하자 미국과 영국은 푸틴의 체첸 공격을 분명하게 지지했다.

2000년 당시 영국 총리 토니 블레어는 푸틴을 “개혁가”라고 추켜세웠다. “러시아 지도자는 서방과의 튼튼한 관계를 원했고 개혁의 언어로 말했다. … 블라디미르 푸틴은 유럽연합·미국과의 새로운 관계를 수용할 태세가 돼 있고, 강하고 현대적인 러시아 그리고 서방과의 튼튼한 관계를 원한다고 나는 생각한다.”(〈가디언〉 2000년 4월 17일자.)

이 “새로운 관계”는 신자유주의적 개혁뿐 아니라 지금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극에 달하고 있는 학살, 약탈, 파괴 같은 야만적 전쟁 행위도 포함했다.

미·중 경쟁의 격화와 우크라이나의 비극

우크라이나가 전쟁의 참화에 휩싸인 것은 우크라이나 밖 국제 상황이 바뀐 것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트럼프 정부가 ‘미국 우선’을 천명하고 중국 견제를 더욱 분명히 하기 전까지(전임 오바마 정부가 선언한 ‘아시아로의 회귀’ 독트린의 연장선 상에서 중국 견제를 훨씬 노골화했다), 미국의 지정학적 독트린은 대체로 세계화를 추동하는 방향에 맞춰졌다. 맥도날드가 무기업체 맥도널 더글러스 없이는 번창할 수 없고, “시장의 보이지 않는 손”은 보이지 않는 주먹 없이는 작동할 수 없었다.

그리고 강대국들은 세계화의 ‘평화적’ 과정을 위협하는 북한·이란·이라크 등 “불량 국가”를 공동으로 감독하는 데 동의했다. 이런 맥락 속에서 미국·유럽·중국·러시아가 공존할 수 있었다.

이 점에서, 트럼프의 ‘미국 우선’ 노선은 강대국들 간 군사적 대결 가능성의 새 장을 연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트럼프가 미국 다국적기업들의 중국 생산 시설을 국내로 이전하라고 촉구한 것은 미·중 간 경제적 경쟁이 격화되고 있음을 반영하는 신호였다.

2008년 경제 위기 때 미국 자본주의는 국제적 대응을 조율하려 애썼다. 미국은 부국들의 G8뿐 아니라 신흥국까지 포함한 G20을 불러모아 위기에 대응하고자 했다. 특히, 세계화와 신자유주의의 핵심 기조를 건드리지 않으면서도 중앙은행들이 돈을 풀어 은행 시스템을 구제할 수 있게 했다.

트럼프의 ‘미국 우선’ 노선은 미국이 조율하려 애써 온 국제적 대응이 실패했음을 자인했다는 뜻이다. 2008년에 시작된 세계경제 위기를 극복하지 못했다는 것도 자인한 셈이다.

그 결과 세계 최대 규모 경제들인 미국과 중국 사이에 무역 전쟁이 표면화되고, 그들을 비롯한 주요국들의 군비도 급격히 증강됐다.

그리고 바이든이 얼마 전 방한 때 삼성 반도체 공장을 방문한 것은 중국이 미국을 기술적으로 추월하지 못하게 하겠다는 의지를 상징적으로 보여 준 사건이었다. 대중 관계 면에서 바이든은 트럼프 없는 트럼프주의를 추진하고 있다.

물론 미국과 중국은 경제적으로 깊숙이 상호 침투하고 있어 두 국가의 경제적 경쟁 양상은 복잡하다. 중국은 미국과 유럽연합의 중요한 교역 상대국이다. 중국은 미국 국채(1조 3900억 달러, 약 1770조 원)를 일본에 이어 둘째로 많이 보유하고 있다.

그럼에도 미·중 간 경제적 경쟁은 빠르게 군사적 경쟁의 형태를 띠고 있다. 동아시아를 비롯한 인도·태평양이 주요 각축장이 되고 있다.

특히, 대만이 미·중 갈등의 핵심 쟁점이다. 바이든은 중국이 대만을 무력으로 점령하려고 하면 미국이 군사적으로 개입할 수 있다고 밝혔다. 미국 국방부가 실시한 미·중 간 대만해협 ‘워 게임’(기동훈련)에는 핵무기 맞대응이 포함돼 있다. 미국이 중국의 세력에 대응하기 위해 책정한 내년 국방예산 규모는 7730억 달러(922조 원)이다.

미국과 나토가 러시아를 상대로 벌이는 대리전이 우크라이나에서 격렬하게 진행되고 있지만, 미국 제국주의의 양대 전선(대서양과 태평양)에서 좀 더 중요한 전선은 중국과의 경쟁이다. 중국도 이 경쟁에 사활을 걸면서 러시아와의 경제적·군사적 협력을 강화해 왔다. 러시아도 서방의 제재를 우회하고자 중국에게서 경제적·군사적 지원을 구하고 있다.

이것이 미국과 나토가 우크라이나에서 우크라이나군을 앞세워 러시아와 대리전을 치르는 배경이다.

강대국들의 체스 판에 올려져 있다는 것이 우크라이나의 비극이 탄생한 진정한 원인이다. 이 체스 판에서 우크라이나 지배계급은 서방 제국주의를 지지하며 자신들의 이해관계를 관철시키려 한다. 그럴수록 우크라이나는 서방 의존국이 될 것이다.

그러나 러시아·중국은 물론 미국·서방도 자국의 제국주의적 이익에만 관심이 있을 뿐 평범한 우크라이나인들의 비극은 안중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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