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기사는 영국의 혁명적 마르크스주의자 존 뉴싱어가 혁명적 마르크스주의 이론지 《인터내셔널 소셜리즘》 165호(2020년 겨울)에 기고한 ‘The Christian right, the Republican Party and Donald Trump’를 번역한 것이다. 이예송이 번역했고, 다만 구체적인 미국 기독교 사례는 대부분 생략했다. 최일붕 노동자연대 국제연락간사(운영위원)가 감수를 해서 수정판을 발행했다.

최근 미국 연방대법원이 낙태를 합법적 권리로 인정한 1973년 ‘로 대 웨이드’ 판결을 폐기하면서, 낙태권 공격에 앞장서 왔던 미국 기독교 우파가 주목을 받고 있다. 원문은 2020년 1월에 발표됐기 때문에 그 이후 미국 기독교 우파와 공화당, 트럼프 사이의 관계 변화 등은 반영하고 있지 않지만, 미국에서 기독교 우파가 부상해 정치 세력화한 과정을 잘 다루고 있다.

[  ] 안의 말은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편집팀이 삽입한 것이다. ‘기독교’라는 말은 1970년대 이후 상황을 논의하는 경우 개신교뿐 아니라 가톨릭 교회, 정교회 등도 포함하는 말로 사용했다(한국의 보수 복음주의자들과 다른 용어법이다).


2016년 미국 대선에서 도널드 트럼프를 당선시킨 것은 기독교 우파의 표였다. 전체 유권자의 3분의 1을 차지하는 복음주의 기독교인의 약 81퍼센트가 트럼프에게 투표했다. 많은 복음주의 기독교인들이 트럼프 선거 운동에도 적극 참가했다.

이는 두 가지 물음을 제기한다.

첫째, 어떻게 기독교 우파는 미국 정치, 특히 공화당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됐는가? 기독교 우파는 1970년대부터 공화당에 대한 영향력을 키워 왔고, 공화당 정치인은 누구든 선거에 출마하려면 이들을 자기 편으로 만들어야 했다. 예컨대, 전쟁광이자 보수 우파인 존 매케인(1936~2018년)은 기독교 우파를 경멸했지만, 2008년 대선에서 독실한 복음주의 기독교인인 세라 페일린을 러닝메이트로 택했다. 또, 2016년 공화당 대선 후보 경선에 출마한 자들의 다수는 공립학교에서 창조론을 가르쳐야 한다고 주장했다.

둘째, 어째서 기독교 우파는 도널드 트럼프 같은 자를 지지하게 됐을까? 트럼프가 기독교 우파가 원하는 것을 전부 들어주겠다고 약속하고, 유력한 기독교 우파 인사 마이크 펜스를 러닝메이트로 택하기는 했다. 그러나 아무리 그렇다 해도 어째서 기독교 우파는 모범적 기독교인과는 가장 거리가 멀어 보이는, 온갖 죄악에 물든 성범죄자이자 사기꾼이자 습관성 거짓말쟁이인 트럼프를 지지하게 됐을까?

빌 클린턴 정부 당시 르윈스키 스캔들*로 대통령 탄핵을 추진한 주요 세력이 기독교 우파였음을 떠올려 보라. 그러나 트럼프는 다른 대선 후보라면 결코 살아남을 수 없었을 성 추문에서 살아남았다.

기독교 우파가 트럼프의 핵심적 지지 세력임을 잘 보여 주는 또 다른 사례가 있다. 2017년 버지니아주(州) 샬러츠빌에서 한 파시스트가 반(反)파시즘 시위 참가자를 살해했을 때 트럼프는 파시스트들을 사실상 두둔했다. 당시 백악관 경제 관련 자문위원회에 참여한 여러 CEO들은 넌더리를 내며 사임했지만, 백악관 신앙 자문위원회에서 사임한 목사·전도사는 한 명도 없었다.

좌파들은 흔히 미국 기독교 세력의 지속적인 영향력을 간과한다. 이는 얼마쯤은 현대 사회의 ‘세속화’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하는 듯하다. 왜 미국은 세속화하지 않았는가? 이것은 분명 매우 중요한 쟁점이다. 이에 답하려면 제2차세계대전이 끝나고 냉전이 시작되던 시기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신앙-산업 복합체

제2차세계대전 종전 후 미국에서는 종교 활동이 두드러지게 성장했다. 이는 이례적인 현상이다. 1850년 미국인의 16퍼센트가 자신을 교회의 일원으로 여겼다. 이 수치는 1900년 36퍼센트, 1910년과 1920년 43퍼센트, 1930년 47퍼센트, 1940년 49퍼센트로 늘어났다. 이 수치는 제2차세계대전 중에는 감소했지만 전후 경제 회복 속에서 1950년 57퍼센트, 1960년 69퍼센트로 늘었다.

이에 따라 교회의 수입도 급증했다. 1950년대에 미국 역사상 최대의 교회 건설 호황이 있었다. 성경과 신앙 서적이 날개 돋친 듯 팔렸고, 1955년 설문에서는 미국인의 94퍼센트가 기도에 상황을 변화시킬 힘이 있다고 답했다.

신앙 부흥은 아래로부터 자생적으로 이뤄진 것이 아니었다. 위로부터 계획된, 즉 강력한 “신앙-산업 복합체”에 의해 달성된 것이었다. 신앙-산업 복합체는 기독교를 냉전 이데올로기의 무기로 동원해 미국 자본주의와 제국주의를 지키려 했다.

이런 시도는 트루먼 정부(1945~1953년) 때부터 시작됐다. 1946년 초 트루먼은 미국 연방교회협의회(FCC)에 참석해, 신앙 부흥이 없으면 미국이 “방향을 잃을 것”이라고 말했다.

신앙 부흥을 주도한 것은 제너럴일렉트릭(GE) 회장 찰스 E. 윌슨이었다. 트루먼은 윌슨을 국방동원국 국장으로 임명했다. 그런 만큼 윌슨은 상시군비경제의 설계자 중 한 명이라고 할 수 있다.

윌슨은 기업·교회·정부를 끌어들여 “미국인의 삶에 신앙을”(이하 RIAL)이라는 캠페인을 벌이고, 전례없는 기독교 선전 공세를 벌여 ‘국내 전선’에서 사기를 높이고 미국의 제국주의적 대외정책을 정당화했다. 이 캠페인은 대기업들의 후원과 정부의 지지를 받았다. 이것이 신앙-산업 복합체의 핵심이었다.

미국의 광고업도 여기에 적극 가세했다. 미국 전역의 수많은 옥외 광고판이 이 캠페인에 이용됐다. 1956년 300여 편의 TV 프로그램이 종교적 동원을 촉구하는 메시지를 방송했다. 당시 인쇄된 RIAL 캠페인의 포스터를 죽 쌓으면 그 높이가 거의 20킬로미터에 이를 것이라는 추산도 있다. 10여 년간 이어진 RIAL 캠페인은 공공 영역과 민간 영역, 전국 수준과 지역 수준, 신앙과 세속을 불문하고 삶의 모든 공간에 침투했다.

RIAL 캠페인은 하나의 사례일 뿐이다. 1952년 270만 명의 회원을 거느린 재향군인단체 ‘아메리칸 리전’[미국인 군단]은 “하나님에게 돌아가기” 캠페인을 벌이며 냉전 이데올로기를 위한 무장을 갖췄다.

1952년 1월에 창립된 순복음실업인협회도 신앙 부흥의 중요한 일부였다. 이 단체는 부와 권력이 신의 뜻이라고 주장하는 “번영 복음”을 통해 소상공인들을 결집시켰다. 창립자의 한 명인 오럴 로버츠의 전기에 따르면, 이 단체는 “현대사상 가장 강력한 준(準)교회 조직의 하나”였다. 1970년 이 단체의 회원 수는 30만 명에 달했다.

할리우드도 이런 노력에서 예외일 수 없었다. 예컨대 블록버스터 영화 〈십계〉(1956년)가 그런 노력의 일부였다. 그 영화를 감독한 [성공회 신자] 세실 드밀은 영화의 핵심 메시지가 “사람들이 하느님 아래에서 자유로운 영혼이 돼야 하는가, 아니면 국가에 속해야 하는가” 하는 물음이라고 했다.

“하나님 아래 한 나라”

드와이트 아이젠하워의 대통령 당선(1953~1960년 재임)으로 기독교 선전 공세는 더욱 거세졌다. 아이젠하워는 원래 교회에 거의 나가지 않던 “명목상 기독교인”이었지만, 대선 출마를 결심하면서 마음을 고쳐먹었다. 이것은 당선을 위해서이기도 했고, 자신도 기독교 선전 공세에서 한 역할을 해야 한다는 사명감의 발로이기도 했다. 이를 위해 아이젠하워는 당시 인기 있던 [미국 남침례회] 목사 빌리 그레이엄에게서 신앙 조언을 구했다(그레이엄에 관해서는 뒤에서 좀 더 자세히 살펴볼 것이다).

당선 후 아이젠하워는 냉전을 “어둠에 맞선 빛, 예속에 맞선 자유, 무신론에 맞선 신앙심의 전쟁”으로 포장했다(나치와 열전을 벌일 때는 그런 언사의 필요성을 느끼지 않았다). 아이젠하워는 미국 대통령 최초로 취임식에서 기도를 했고, 며칠 후 백악관에서 세례를 받고 장로회 신자가 됐다. 이는 지극히 정치적인 행위였다. 그는 대통령으로서 교회에 출석하여 모범을 보이고 나라의 기강을 잡을 의무가 자신에게 있다고 여겼다. 아이젠하워는 최초로 미국 조찬 기도회를 주관했고, 충성 맹세에 “하나님 아래 한 나라”라는 문구를 넣는 법안을 승인했다.

마지막으로, 전후 신앙 부흥에 관해 알아야 할 두 가지 중요한 점이 있다.

첫째, 복음주의 개신교의 아성인 미국 남부·중서부가 상시군비경제에서 가장 큰 혜택을 입은 곳이었다는 점이다. 종교 관련 정부 지출의 역사를 연구한 액셀 셰퍼는 이렇게 썼다. “막대한 군비 지출은 ‘선벨트’ 지역[일조량이 높은 미국 남부 지역]을 ‘건벨트’로 탈바꿈시켰다. 예컨대 ⋯ 샌디에이고에서는 제조업 고용의 20퍼센트를 군수 산업이 차지했다.

“이처럼 복음주의자들은 냉전이 선사한 막대한 부에서 비롯한 사회경제적·사회인구학적 변화에서 혜택을 입었다 ⋯ 이런 변화는 계층 상승, 근교화, 보수적 개신교인의 증가로 이어졌다.” 1960년대에 이르면 “복음주의자들은 더는 다른 미국인들보다 농촌 거주 비율이 높고 나이가 많고 교육 수준이 낮은 사람들이 아니게 됐다.”

둘째, 미국 자본주의와 대기업, 부에 대한 찬양은 당연히 교회 자체에도 영향을 미쳤다. 교회는 점차 사업체가 됐다. 탐욕이 신성시됐고 목사들은 뻔뻔하게 부를 늘리기 시작했다. 그 결과 1990년대에는 “근본주의적이고 성령파적인 ⋯ 수십 명의 백만장자 목사들”이 있었고, 이들은 “감세와 규제완화의 열렬한 지지자들이었다”고 셰퍼는 지적한다.

빌리 그레이엄

1950년대 신앙 부흥의 핵심 인물 중 하나인 빌리 그레이엄의 궤적은 이런 변화를 잘 보여 준다.

그레이엄은 1949년 9~10월 로스엔젤레스에서 벌인 부흥회를 계기로 이름을 알렸다. 애초에 그 행사는 지역 기업인들의 후원을 받았다. 그러나 미디어 백만장자인 윌리엄 허스트가 그레이엄을 지원하면서 그레이엄은 일약 전국적 유명 인사가 됐다. 그러자 다른 언론들도 그를 띄우기 시작했다. 가장 중요하게는 〈타임〉지 등을 거느린 헨리 루스가 그를 후원해 줬다.

당시 그레이엄은 소련의 위협을 설교의 소재로 한껏 이용했다. 그는 “내부의 적 ⋯ 공산주의자들의 위협”이 로스엔젤레스에서 특히 심각하고, 로스엔젤레스가 뉴욕·시카고 다음가는 소련의 핵 공격 목표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미국이 제2차세계대전에서 핵무기의 위험을 피할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신자들의 기도 덕분이라고 주장했다. 그레이엄의 부흥회는 규모가 계속 늘어나 무려 35만 명이 그의 설교를 들었다.

1957년 5~9월 뉴욕에서 부흥회를 열 무렵 그레이엄의 후원자들은 이제 지역 기업인들이 아니라 보험회사 뮤추얼라이프의 회장 로저 헐, 미국 최대 제철기업 US스틸의 회장 하워드 아이샴 같은 대기업 소유주들이었다. 그레이엄은 97차례 설교를 했고, 도합 300만 명이 그의 설교를 들었다.

그레이엄은 전국을 순회하며 친기업·반공주의 메세지를 퍼뜨렸다. 노조를 이기적인 악한들의 집단이라고 비난하며 노동자들의 근면을 강조했다.

그레이엄은 베트남 전쟁을 지지했다. 남베트남 미라이에서 벌어진 학살이 뒤늦게 알려지자 그레이엄은 그 학살을 이렇게 변호했다. “우리도 다들 저마다의 ‘미라이’가 있지 않던가. 총을 쏘지는 않아도 무심코 던지는 말과 거만함, 이기심으로 다들 타인에게 상처를 주지 않았던가. 너희 중 죄 없는 자가 먼저 돌을 던져라.”

반면 공화당 소속 대통령 리처드 닉슨(1969~1974년 재임)이 반전(反戰) 시위대가 던진 계란에 맞자 그레이엄은 “이런 사건을 엄단할 강력한 법”을 도입하라고 촉구했다.

그레이엄은 닉슨의 열렬한 지지자였다. 닉슨이 베트남 전쟁을 캄보디아로 확대하고, 켄트주립대학교와 잭슨주립대학교에서 반전 시위대가 주 방위군의 발포로 목숨을 잃어 닉슨이 곤경에 처했을 때, 그레이엄은 닉슨을 도우러 나섰다. 그레이엄은 닉슨과 함께 부흥회 연단에 서서, “성경은 권위에 복종하라고 가르친다”고 설교했다. 그레이엄의 전기 작가 한 명은 이 시기에 그레이엄이 사실상 “닉슨 내각의 또 다른 각료, 닉슨 정부의 비공식 정무 목사”가 됐다고 썼다.

그레이엄은 닉슨이 중국과 국교를 터서 많은 복음주의 기독교인들의 분노를 자아냈을 때도, 심지어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닉슨 정부가 몰락하기 시작할 때도 닉슨을 후원했다.

기독교 우파의 부상

1940~1960년대에 복음주의 기독교인들은 대체로 반공주의 공세의 일부로 행동하는 데 만족했다. 미국 남부·중서부에 복음주의를 받아들이는 중간계급 집단이 형성됐다. 이들은 번영 복음을 신봉하고 폐쇄적인 기독교 하위문화 속에서 살았다. 그들의 진정한 걱정거리는 가톨릭 교회나 유대인, 자신들 내의 교파 갈등 정도였다.

그러나 이런 상황은 1960년대에 바뀌기 시작했다. 반전 운동, 낙태권 운동, 페미니즘, 성소수자 해방 운동, 세속화의 증대 등이 기독교 우파의 등장을 자극했다. 복음주의 기독교인들은 이런 변화들을 ‘기독교 미국’을 위협하는 “세속 휴머니즘”으로 규정하고 근절하려 했다. 이것이 이른바 “문화 전쟁”이다.

최초의 계기는 흑인 평등권 운동이었다. 공립학교에서 인종 분리가 폐지되자, 미국 남부·중서부에서는 이에 대한 반발로 백인 사립 기독교 학교가 급증했다. 이런 학교는 1979년 5000여 곳에 이르렀고, 100만 명이 넘는 학생들이 거기에 다녔다. 기독교인들의 홈스쿨링도 급증했다. 뒤에서 살펴볼 기독교 우파 단체 ‘도덕적 다수’를 창립한 목사 제리 폴웰도 자기 교인들을 위한 백인 학교를 세우고, “인종분리 폐지의 배후에 소련의 입김이 있다”거나 “인종 분리가 폐지되면 하나님이 우리를 벌할 것”이라는 악선동을 자행했다.

기독교 우파의 동원 잠재력을 온전히 일깨워 준 운동은 성평등헌법수정안(이하 ERA) 반대 운동이었다. ERA는 “성별에 상관없이 모든 미국 시민에게 동등한 법적 권리를 보장한다”는 내용을 헌법에 포함시키는 것으로, 비교적 온건한 이 개혁안은 상원에서도 초당적 지지를 받았다. 그러나 이 수정안이 통과되려면 38개 주(州)에서 비준을 받아야 했다.

기독교 우파는 이를 저지하러 나섰다. 이를 주도한 것은 우익 가톨릭 교인인 필리스 슐래플리였다. 슐래플리는 ERA 저지 운동을 1972년 10월 시작해 각 주에서 ERA의 비준을 막고, 이미 ERA를 비준한 주에서는 그 결정을 뒤집으려 했다. 마침내 이 운동은 ERA를 좌절시켰다.

이 운동의 중요한 측면 하나는 초교파적 협력이었다. 이 운동에는 앞에서 언급한 개신교 우파 제리 폴웰도 가세했다. 슐래플리는 폴웰의 교회에서 설교를 하기도 했다.

ERA 저지 운동의 성공은 복음주의 지도자들과 공화당 우파 활동가들을 고무했다. 제리 폴웰과 팀 라헤이 등 복음주의 지도자들은 전국적 복음주의 정치조직의 필요성을 느꼈고, 여러 공화당 우파 인사들과 합세해 1979년 ‘도덕적 다수’를 설립했다(흥미롭게도 이 복음주의 지도자들이 정치화에 나선 직접적 계기는 어떤 대단한 도덕적 대의가 아니라, 백인 사립학교의 면세 지위를 폐지하려는 국세청(IRS)의 움직임이었다).

‘도덕적 다수’는 복음주의 교인들 사이에서 공화당 표를 조직하는 활동에 앞장섰다. ‘도덕적 다수’의 목표는 두 가지였는데, 복음주의 교인들로 하여금 공화당에 투표하도록 만드는 동시에, 공화당이 기독교 우파의 의제를 채택하게 하려는 것이었다.

복음주의자들의 사기를 북돋고 지지를 조직하는 방법은 이른바 “문화 전쟁”이었다. 낙태, 성소수자 권리, 공교육의 세속화, 환경 운동, 포르노, 페미니즘 등 이 모든 것들이 미국을 위협하는 것이자, 미국에서 뿌리 뽑지 않으면 안 되는 해악으로 규정됐다.

복음주의 지도자들은 이런 쟁점들을 상당히 의식적으로 이용했다. ‘도덕적 다수’ 창립자의 한 명인 로버트 빌링스는 이렇게 말했다. “사람들을 자극하고 격분하게 해 TV를 보다 말고 뛰쳐나와 뭔가를 하게 만들 감정적으로 민감한 쟁점이 필요하다. 내 생각에는 동성애 문제를 이용해야 한다.”

폴웰은 수많은 교인에게 여러 차례 모금을 호소했는데, 그중 하나만 봐도 그 어조와 분위기를 잘 알 수 있다. “지난주 수요일, 저는 동성애자 무리의 위협에 시달렸습니다. 그 일로 저는 미국이 현대판 소돔과 고모라가 됐다고 확신했습니다. ⋯ 오늘 35달러를 기부해 주십시오.” 이런 식으로 폴웰은 성소수자에 대한 두려움을 조장하고 상당한 기부금을 모았다.

복음주의 하위문화

기독교 우파의 정치는 미국의 독특한 복음주의 하위문화에 바탕을 두고 있다. 그 하위문화는 미국 바깥은 물론, 같은 미국인들에게도 잘 알려져 있지 않아서, 그것을 실제로 접한 사람들은 그 미신적인 성격과 상업주의의 기괴한 결합에 적잖이 놀란다. 그 하위문화를 여기서 체계적으로 다룰 수는 없지만, 기독교 우파의 중요성을 제대로 알려면 그것의 몇몇 측면들을 어느 정도 알아야 한다.

우선, 그 규모와 폐쇄성을 감 잡게 해주는 사례가 있다. 〈뉴욕 타임스〉에 따르면, 1982년 미국의 베스트셀러는 《제인 폰다의 건강 유지 비결》이었다. 그러나 〈뉴욕 타임스〉는 기독교 서점의 판매 실적을 집계에 포함시키지 않았다. 이를 포함시키면 그해의 베스트셀러는 프랜시스 셰퍼의 《기독교 선언》이 된다. 셰퍼의 저서 23종 중 많은 수가 베스트셀러이고, 기독교 학교·대학과 교회 공부 모임의 교재로 사용되지만, 셰퍼는 복음주의 하위문화권 바깥에는 거의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다.

미국 언론인 크레이그 엉거에 따르면, 복음주의 교회는 “무수히 많은 미국인의 실제 필요나 그들에게 필요라고 여겨지는 것들”을 충족시킨다. 그들은 “현대의 홍보 수단을 총동원한, 정교하고 전방위적으로 발달한 복음주의 하위문화”를 이루고 있다.

기독교 학교나 홈스쿨링은 아이들에게 성교육을 하지 않고, 금욕과 창조론을 가르친다. 그 외에도 아이들을 위한 기독교 여름 캠프가 개설되고, 기독교 만화, 기독교 영화, 기독교 음악이 제작된다. 심지어 ‘기독교판 디즈니랜드’라 할 수 있는 놀이 공원도 있다. 게다가 복음주의 기독교인들은 100여 개의 기독교 대학과 전문대학을 운영하고 있다.

복음주의 하위문화는 삶의 모든 영역에 뻗어 있다. 거기에는 기독교 체육관과 골프장, 복음주의 스케이트보더 클럽, 기독교 레슬링 연합, 기독교 식단(《예수님은 무엇을 드셨나? ― 건강을 위한 십계명》), 기독교인 변호사, 기독교 가구점, 기독교 패스트푸드 체인, 신자들을 위한 여행 패키지를 제공하는 기독교 여행사가 있고, 기독교 용품점인 ‘라이프웨이’에서는 기독교 연필, 낙태 반대 티셔츠 등을 판다. 많은 복음주의 목사들은 전화 기도 서비스를 제공한다. 심지어 기독교 우파 지도자들이 쓴 섹스 매뉴얼과 기독교 섹스 토이도 있다. 그리고 기독교 우파들에게 줄곧 증오의 대상이 돼 온 미국시민자유연맹(ACLU)의 기독교 우파적 대항물이라 할 수 있는 미국법정의센터(ACLJ)도 있다.

또, 기독교 우파는 픽션과 논픽션을 아우르는 방대한 복음주의 출판물의 뒷받침을 받는다. 앞서 언급한 책들 외에도 휴거를 소재로 한 연작 소설 《레프트 비하인드》가 불티나게 팔린다. 크레이그 엉거에 따르면 2007년에 이런 책들이 “6300만 부 이상” 팔렸다. 파생 산업도 거대한데, 그런 소설을 기반으로 한 온갖 어린이 동화, 영화, 비디오 게임들이 제작된다.

텔레비전 전도사

‘텔레비전 전도’는 현대 미국 복음주의와 기독교 우파의 핵심적 토대 중 하나다. 기독교 우파를 연구한 사라 다이어몬드는 텔레비전 전도를 “기독교 우파의 부상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로 꼽았다.

1987년 텔레비전 전도는 “매년 20억 달러 매출을 낳는 산업이 됐고, 기독교 방송 사업자들은 1000개의 라디오 방송국과 200개의 방송국을 거느리고 있었다.” 텔레비전 전도 시청자 수는 이미 1960년대에 600만 명에 이르렀고, 1980년대 중반에는 2500만 명으로 불어났다. 이는 당연히 막대한 수익으로 이어졌다.

텔레비전 전도의 생명을 유지시켜 주는 것은 “번영 복음”이다. 부가 하나님의 은혜이자 하나님이 주는 보상이라고 보는 교리다. 이 교리에 따르면, 부자든 가난한 자든 텔레비전 전도사에게 기부를 해서 복음 전파에 기여하면 (더) 부유해질 수 있다. 물론 그 과정에서 텔레비전 전도사도 부유해질 테지만, 그들의 부는 “번영 복음”이 옳다는 증거다.

오럴 로버츠는 이런 “번영 복음”의 선구자였다[한국에서 원조는 조용기 목사였다.] 1975년 로버츠의 추수감사절 방송은 시청자가 2500만 명에 이르렀다. 로버츠는 죽은 자를 살려냈다고 주장하는 신앙 치유자였고 그 명성을 이용해 온갖 방식으로 부를 쌓았다. 그 방식이 어찌나 노골적이었던지 텔레비전 전도사들도 그를 장사치 취급했다.

로버츠의 가장 악명 높은 사기극은 1987년 1월에 벌인 모금 캠페인이었다. 로버츠는 두 달 안에 800만 달러를 모으지 못하면 하나님이 자기를 천국으로 데려가겠다고 했다며 눈물을 흘리며 현금을 호소했다. 어느 시점에는 하루 헌금액이 16만 달러에 이르렀고, 마감 하루 전 130만 달러의 기부가 들어와 로버츠는 ‘목숨을 건졌다’. 물론 유명한 초능력 사기꾼 색출자 제임스 랜디가 지적했듯이, 로버츠가 그렇게 현금이 급했으면 “베벌리힐스, 털사, 팜스프링스에 있는 그의 집을 팔아도 됐을 것이다.”

여러 면에서 이 분야를 선도한 목사 팻 로버트슨은 신앙 치유(신유)가 헌금(비과세 대상)을 모으는 데에 굉장히 유용하다는 것을 깨닫고는, 텔레비전에서 정기적으로 신체적·금전적 장애를 ‘치유’했다. 이런 식으로 주로 노인들을 등쳐먹어서 돈을 모은 로버트슨은 사업가로 변신해, 스코틀랜드은행과 섬유·의류 기업 ‘로라 애슐리’와 파트너십을 맺었다. 그 파트너십은 결과적으로 좌초했지만, 미디어 재벌인 루퍼트 머독과의 거래는 성공했다.

로버트슨은 1997년 그의 ‘패밀리 채널’을 머독의 폭스 사에 19억 달러를 받고 팔았다. 그 후 ‘폭스 패밀리 채널’이 된 이 채널은 지금도 로버트슨이 진행하는 ‘700 클럽 쇼’를 매일 방송한다. [뉴싱어의 글은 2020년에 발표됐고, 팻 로버트슨은 이듬해인 2021년 방송 프로그램에서 물러났다.] 2001년 이 채널이 디즈니에 20억 달러에 팔렸을 때에도 그 계약에는 로버트슨의 쇼를 계속 방송한다는 조건이 붙었다. 그리고 이 백만장자 사기꾼은 훗날 공화당의 주요 인사가 된다.

더 최근에 부상한 인물로는 존 해기 목사가 있다. 미국 최대의 친(親)시온주의 단체 ‘이스라엘을 위한 기독교인 연합’의 설립자이기도 한 해기는 자신에게 “사랑의 선물”(헌금)을 주면 온갖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고 교인들에게 설교해 막대한 부를 끌어모았다.

레이건에서 부시와 트럼프까지

로널드 레이건은 복음주의 신자이기는커녕 교회 다니지도 않았고, 낙태나 동성애에 관해 오히려 자유주의적 태도를 취했었다. 하지만 레이건은 1980년 대선 승리를 위해 기독교 우파의 지지를 구하려 했다.

사실, 레이건의 경쟁자이자 재선을 도모하던 민주당 대통령 지미 카터야말로 신실한 복음주의 신도였다. 카터는 심지어 대통령 임기 중 주일 학교에서 수업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카터는 기독교 우파의 “문화 전쟁”을 지지하지 않았다.

반면, 레이건 측은 폴웰과 ‘도덕적 다수’ 지도부를 만나 “학교에서 기도를 부활시키고, 낙태를 금지하는 헌법 수정안을 지지하고, ERA에 반대하겠다”고 약속했다. ‘도덕적 다수’는 레이건의 선거 운동에 복음주의자들을 동원하는 데 핵심적 구실을 했고, 레이건 혼자서는 얻지 못했을 종교적 후광을 부여했다. 물론 레이건의 경제 정책과 냉전 정책은 기독교 우파들이 전적으로 지지하는 것이기도 했다.

레이건은 “문화 전쟁”에서 기독교 우파의 편을 들어 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레이건은 그러다 미국인 다수의 반발을 살 것을 우려했다. 그래서 레이건 정부는 예컨대, 복음주의자들의 낙태 관련 입장을 지지하는 말을 했지만 실제로는 여론을 거슬러 낙태를 금지하지는 않았다. 그래서 이르면 1982년부터 복음주의자들 사이에서는 레이건에게서 얻은 게 없다는 불만이 나오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기독교 우파는 레이건의 선거에 관여했다. 그러면서 기독교 우파는 주·지역 단위의 공화당 조직에 더 깊숙이 침투하게 됐는데, 특히 남부와 중서부에서는 공화당 조직들을 장악하기 시작했다.

또, 기독교 우파는 레이건 정부가 중앙아메리카에서 벌인 대리전에 깊숙이 관여하기도 했다. 예컨대 팻 로버트슨은 1983년 과테말라·온두라스·엘살바도르를 방문해, 미국이 후원한 니카라과의 우익 반군을 찬양했고 그들을 위한 모금 행사를 열기도 했다. 이런 관여는 기독교 우파를 레이건 정부와 계속 묶어 놓는 고리가 됐다.

하지만 레이건이 “문화 전쟁”에서 보인 태도는 기독교 우파에게 적잖은 실망을 자아냈다. 그래서 1988년 팻 로버트슨은 직접 공화당 대선 후보 경선에 도전했다. 그러나 고배를 마셨고, ‘도덕적 다수’는 1989년 공식 해체를 선언했다.

이런 도전이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못한 것은 아니었다. 1988년 대통령에 당선된 조지 부시 1세는 그 전에 공화당 내 경선 과정에서 기독교 우파를 달래기 위해 어느 정도 노력을 해야 했고, 공화당 내 복음주의자들을 자신의 지도력하에 결집시켰다.

더 중요하게는, 1989년 9월 로버트슨이 기독교 우파의 새로운 선봉으로 미국기독교연합(CCA)을 출범시켰다. 2000명의 회원과 8만 2000달러의 자금으로 출발한 이 조직은 1997년이 되면 190만 명의 회원을 거느리고 2700만 달러 규모의 예산을 굴릴 정도로 성장해, 복음주의 중간계급에 단단히 뿌리를 내렸다.

기독교 우파가 보기에 조지 부시 1세는 여전히 자신들의 “문화 전쟁” 의제를 무시하고 있었다. 부시는 심지어 백악관에 게이 커플들을 초청하기도 했다. 미국기독교연합은 1992년 대선에서 민주당 후보 빌 클린턴에 반대해 부시를 지지했지만, 거기에는 아무 열의도 없었다. 그들은 부시의 임기 동안 주·지역 수준에서 역량을 키우는 데에 집중했다.

많은 복음주의자들은 클린턴을 ‘적그리스도’로 여겼다. 클린턴은 임기 동안 탄핵 시도를 포함해 유례가 드문 비방에 시달렸는데, 대부분은 기독교 우파가 주도한 것이었다.

그러는 동안 복음주의자들은 공화당 안에서 영향력을 키웠고, 2000년에는 조지 부시 2세를 공화당 대선 후보로 만들 수 있었다. 기독교 우파에게 부시 2세는 아버지 부시와 달리 이상적인 후보였다. 아들 부시는 거듭난 기독교인이었고 신실함이 담긴 듯한 말과 감상을 늘어놓는 능력이 있었다. [조지 부시 2세는 미국 연합감리회 교인이었다.]

아들 부시의 당선은 기적으로 여겨졌다. 득표수로는 졌는데도 당선했기 때문이다. 기독교 우파에게 이는 9·11 공격이 다가올 것을 알고 계셨던 하나님의 역사(役事)였다. 기독교 우파는 9·11 공격을 계기로 부시를 더 열광적으로 지지했다. 이 공격이 “문화 전쟁”을 고조시키는 계기가 될 것으로 전망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화 전쟁”에서 부시는 기독교 우파들에게 약속한 만큼 행동하지 않았다. 당시 그 전선이 동성 결혼 쟁점으로 특히 첨예해졌는데도 말이다. 부시 자신은 기독교도였지만 실제 정치를 담당한 그의 책사 칼 로브는 불가지론자였고, 로브가 보기에 기독교 우파는 관리가 필요한 여러 유권자 집단 중 하나에 불과했다.

기독교 우파를 부시 정부에 계속 묶어 놓은 핵심 고리는 돈이었다. 부시는 “온정적 보수주의”를 표방했는데, 현실에서 이는 복지 서비스를 교회와 기독교 자선 단체에 넘기는 것을 뜻했다. 이를 통해 교정 프로그램과 직업 훈련, 청소년 피임 등과 관련된 온갖 복지 사업에 복음주의 목사들이 관여하게 됐다.

부시 정부는 신앙 관련 프로그램에 2003년 약 12억 달러를 썼는데, 이듬해에 그 액수는 20억 달러로 늘었다. 그리고 첫 임기(2001~2004년) 동안 “순결 교육”에 거의 10억 달러를 썼다.

그러나 이 중 어느 것도 부시 정부의 본업은 아니었다. 부시 정부의 본업은 기업과 부자들에게 이롭게 경제를 관리하고 미국 제국주의의 권력을 확장하는 것이었다. 9·11 공격과 그 이후 ‘테러와의 전쟁’에서 부시의 핵심 관심사는 “문화 전쟁”이 아니라 미국의 중동 지배와 석유 통제권이었다.

게다가 부시의 두 번째 임기(2005~2008년)는 아프가니스탄·이라크에서 벌인 전쟁이 실패하고 경제 위기가 분출하면서 재앙으로 끝났다. 이 여파로 버락 오바마가 대통령에 당선됐다. 오바마는 기독교 우파와 어느 정도 타협을 하려 했지만, 기독교 우파가 보기에 이제 미국은 파멸의 길을 걷고 있었다.

트럼프 지지하기

2016년 대선에서 공화당 후보가 될 자는 기독교 우파의 지지를 받는 자여야만 했다. ‘도덕적 다수’나 미국기독교연합 같은 지배적 조직은 이제 없었지만, 미국 대부분의 지역에서 공화당은 기독교 우파 단체들의 손아귀 안에 있었다. 이런 단체들의 회원들을 다 합하면 수백만 명을 헤아린다.

그럼에도 기독교 우파가 다른 복음주의 교인 후보들이 아니라 미국 역사상 가장 기독교적이지 않은 후보인 트럼프를 대선 후보로 택한 것은 놀라운 일이다. [그럼에도 그는 정략적으로 모종의 장로교인 행세를 했다.]

두 가지 요인이 결정적이었다. 첫째, 그들은 트럼프가 이기는 패라고 봤다.

둘째, 트럼프는 기독교 우파가 원하는 모든 것을 약속했다. 트럼프는 기독교 우파 인사(마이크 펜스)에게 부통령 자리를 주고, 기독교 우파 인물들로 정부 요직을 채우겠다고 했다.

무엇보다도 트럼프는 연방 사법 제도에 대한 통제권을 연방대법원으로 넘기겠다고 약속했다. 기독교 우파는 연방대법원에 대한 통제권이 “문화 전쟁”에서 승리하고, 낙태권을 후퇴시키고, 환경 운동에 제동을 거는 데서 핵심적이라고 봤다.

그래서 기독교 우파는 트럼프의 거짓말, 부패, 범죄, 오만함, 파시스트들에게 던지는 추파 등을 모두 눈감아 주기로 했다.

그들은 이런 선택을 어떻게 정당화했을까? 트럼프가 진정한 기독교인으로 거듭났다는 주장은 전혀 설득력을 발휘할 수 없었다. 그래서 유력한 논리는 하나님이 이런 자를 통해 뜻을 펴기도 한다는 것이었다. 예컨대 트럼프는 발람의 나귀에 비유되기도 했다. 하나님이 당나귀의 입을 빌리기도 했는데 트럼프의 입을 빌리지 못할 것은 뭐냐는 것이다.

물론 트럼프는 자신이 당나귀에 비유되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선호된 비유 대상은 이사야서 45장에 등장하는 페르시아의 건국왕 고레스(키루스)였다. 키루스는 이교도였지만 신은 그를 통해 이스라엘을 구원했다는 것이다.

더 솔직한 정당화는 데이비드 브로디와 스콧 램이 쓴 트럼프 전기 《트럼프의 신앙》에서 찾아볼 수 있다. 트럼프는 “여태껏 공화당이 내놓은 것 중에서 가장 생명을 중시하는 [즉, 낙태에 반대하는] 공약”을 내놓았고, “트럼프의 취임식에서는 미국 역사상 어느 때보다도 긴 기도문이 낭독”됐으며, 트럼프는 “믿음이 있는 자들로 내각을 채웠다”는 것이다. 브로디와 램은 트럼프의 내각을 “믿음이 있는 자들로 이뤄진 올스타 정치팀”이라고 일컬었다.

이렇게 속된 동맹이 언제까지 지속될 수 있을까? 현재[2020년 1월]까지는 독실한 복음주의자인 부통령 마이크 펜스가 “그림자 대통령” 구실을 하고 트럼프가 “유명인 대통령”을 하는 식으로 안정적으로 유지되는 듯하다. 백악관 성경공부 모임에는 부통령과 함께 10명의 장관이 정기적으로 참가한다.

한편, 트럼프 정부에서 이탈해 나온 전 측근은 이렇게 말했다. “트럼프가 지독해 보일 수 있지만, 마이크 펜스도 매우 우려스러운 자다 ... 펜스가 대통령이 되면 오히려 트럼프 때를 그리워하게 될지도 모른다.”

물론 이 모든 상황은 바뀔 수 있다. 트럼프 탄핵이 통과되거나, 2020년 대선 결과가 논란거리가 되거나, 또 다른 경제 위기가 찾아오거나, 전쟁이 찾아오거나, 이런 일들이 동시에 결합돼 벌어지면, 미국 기독교 우파의 일부 인자들은 미국 파시즘으로 거듭날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