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진보연대 국제이주팀(이하 사회진보연대로 지칭한다)이 계간 《사회진보연대》 최신호(2022년 여름호)에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규탄하지 않을 이유는 없다」 독자에게’라는 글을 실었다. 필자가 독자에게 대답하는 형식을 취한 이 글은 사회진보연대에 대한 내 비판(‘사회진보연대는 길을 잃고 있다: 미국 주도의 국제 질서에 진보성이 있는가’)을 반박하면서,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러시아 비판에 집중해야 한다는 자신들의 기존 입장을 반복하고 있다.

의도적인 오독?

우선, 내 글이 사회진보연대의 입장을 “의도적으로 오독”(왜곡)하고 있다는 주장을 살펴보자.

사회진보연대는 내가 사회진보연대를 비판하며 “카우츠키의 ‘초제국주의론’까지 언급한 것”은, “사회진보연대의 입장을 친미, 친제국주의로 형상화”하고 “사회진보연대가 미 제국주의에 대한 투쟁을 백안시하고 있다는 인상”을 주려는 왜곡이라고 반박한다. 그러면서 자신들은 러시아 철군 요구를 반대하는 〈민플러스〉 같은 “진보 언론”을 비판하려고 러시아 규탄에 초점을 뒀을 뿐이라고 주장한다.

궁색한 변명이다. 사회진보연대가 정말 러시아를 “비호”하는 좌파들을 비판할 목적이었다고 할지라도, “미 제국주의에 대한 투쟁을 백안시”하고 있지 않다면 러시아 규탄과 나토 반대를 함께 주장할 수 있었을 것이다. 내 비판이 있은 뒤에야 사회진보연대는 이번 글에서 “나토를 비판하고 미국의 세계 전략을 비판하고 무장한 세계화를 비판하는 것과 러시아 규탄은 배치되지 않습니다” 하고 인정했다.

사실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주장과 실천을 통해 러시아 규탄과 나토 반대가 “배치되지 않”음을 보여 주고 있는 단체는 사회진보연대가 아니라 노동자연대다. 노동자연대는 개전 전부터 우크라이나 위기가 러시아와 미국·서방 사이의 제국주의 간 충돌에서 비롯한 것이라는 분석을 내놨고, 개전 당일(2월 24일) 러시아군 철수와 나토의 확전 반대 입장을 밝혔다. 노동자연대가 주도해 개최한 두 차례(3월 6일, 5월 21일) 반전 집회 기조도 마찬가지였다.

반면, 사회진보연대는 한사코 러시아 규탄에 초점을 둬야 한다고 주장하고, 이번 우크라이나 전쟁에 미국과 나토는 책임이 거의 없는 듯 취급한다. 그러면서 “나토의 동진이 러시아를 포위하기 위한 제국주의적 행보”라고 규정하는 노동자연대의 입장이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정당화하는” 명분으로 삼는 것이라고 터무니없는 주장을 한다.

결국 사회진보연대의 주장은 러시아 “비호” 좌파들이 펴는 진영논리의 거울 이미지이다. 즉, 러시아 규탄과 나토 반대, 둘 중 하나만 지지할 수밖에 없다고 보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처음부터 분명하게 러시아 규탄과 나토 반대를 다 주장해 온 노동자연대의 입장이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정당화하는” 것이라고 왜곡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게다가 친서방 국가인 한국에서 활동하는 좌파라는 점 때문에, 사회진보연대의 입장은 위험하다. 한국 국가가 나토를 지지하고 있는 상황에서 사회진보연대의 이런 입장은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서방과 한국 지배자들의 전쟁 노력을 반대하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사회진보연대가 자신들은 “미 제국주의에 대한 투쟁을 백안시”하는 게 아니라고 항변하는 것은, 러시아 규탄에만 초점을 둬야 한다는 사회진보연대의 입장이 점점 더 궁색한 처지로 몰리고 있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노동자연대는 우크라이나 전쟁이 지속됨에 따라 러시아와 서방 사이의 제국주의적 충돌이라는 점이 더 분명해질 것이라고 예측한 바 있다(본지 409호 ‘이렇게 생각한다: 우크라이나 전쟁과 혁명적 좌파의 과제’). 실제로 미국 정부의 우크라이나 지원액은 이제 540억 달러에 이르러 우크라이나 정부의 1년치 예산보다 많다. 나토가 미사일과 첨단 무기 지원을 늘리는 등 서방의 개입과 확전 추세가 뚜렷해짐에 따라 우리의 분석이 옳았음이 입증되고 있다.(본지 421호 ‘이렇게 본다(〈노동자 연대〉 신문 논설): 우크라이나 전쟁과 국제 반전 운동의 전망’)

한편, 최근에는 참여연대 등 NGO와 민주노총 등 노동단체들이 한국의 우크라이나 무기 지원과 윤석열의 나토 정상회의 참석에 반대하는 기자회견을 개최했다. 우크라이나 전쟁 초기에 이 단체들은 사회진보연대와 함께 ‘우크라이나 평화행동’을 만들고, 러시아 규탄에 집중하려고 러시아 대사관 근처에서 반전 집회를 열었는데, 갈수록 나토의 제국주의적 성격이 드러나면서 한국 정부의 우크라이나 무기 지원을 반대하는 것으로 옳게 태도를 정했다.

그러나 사회진보연대는 서방·한국의 우크라이나 무기 지원과 윤석열의 나토 정상회의 참석에 반대하는 입장을 내놓지도 않았다. 윤석열의 나토 정상회의 참석이 확정됐는데도, 6월 24일에 ‘우크라이나 평화행동’ 명의로 러시아 대사관 근처에서 집회를 열려고 했다(이 집회는 최종 취소됐다). 나토가 우크라이나 전쟁에 더욱 개입하고, 중국을 “미국 주도 질서에 대한 도전”으로 규정하며 압박을 강화하는 지금, 사회진보연대가 러시아 규탄에만 집중하는 것은 이런 갈등에서 미국과 나토를 사실상 지지하는 것이다.

나토의 동진과 지정학적 경쟁

사회진보연대는 “냉전 종식 이후 존재할 이유가 없어진 나토가 지금 벌어지고 있는 위기의 한 축이라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라고 인정하면서도, 나토의 동진이 이번 전쟁의 조건을 조성한 책임의 한 축이라는 점을 부인한다.

이번 글에서도 사회진보연대는 냉전 이후 나토의 동진이 “신자유주의적 세계시장의 규율을 세우기 위한 것”이었을 뿐이지, 러시아와의 지정학적 경쟁은 아니었다고 주장한다. 소련 붕괴 후 러시아의 힘이 약화돼 “미국에 위협이 되지 않”아서, “애초에 지정학적 경쟁의 대상도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나토의 동진이 “러시아와의 제국주의적 경쟁을 염두에 둔 것”이라는 노동자연대의 분석은 “현실에 대한 구체적 분석이 아니라 자신들의 내러티브에 맞게 현실을 취사선택”한 것이라고 비판한다.

그러나, 동시에, 사회진보연대는 “미국 주류 학계와 외교정책 입안자 사이에서 나토 동진에 대한 우려는 꾸준히 제기되어 온 문제”였고, “러시아를 자극할 수 있다는 우려는 확실”했다고 인정한다. 이런 우려들이 러시아를 지정학적 경쟁 상대로 고려한 게 아니라면 뭐란 말인가? 게다가 사회진보연대도 인정하듯이, 독일 통일 때 미국은 나토를 동진시키지 않겠다고 러시아에 약속한 바 있다. 물론 미국은 이 약속을 지키지 않았지만, 미국이 이런 약속으로 러시아를 안심시키려 했다는 사실 자체가 미국과 러시아 모두 나토 동진의 지정학적 의미를 알고 있었다는 뜻이다.

미국이 러시아를 위협 상대로 보지 않았다는 사회진보연대의 주장도 옳지 않다. 소련 붕괴 직후인 1990년대부터 러시아는 G7 회의에 초청됐고, G7은 1997년부터 러시아를 포함한 G8으로 확대됐다(이는 2014년 러시아가 크림반도를 병합한 후 G8에서 퇴출될 때까지 유지됐다). 이는 미국을 비롯한 서방 지배자들이 러시아를 강대국으로 인정한 것이다.

2008년 미국이 몰도바·우크라이나·조지아 등의 나토 가입을 논의한다고 밝히자, 러시아는 조지아를 침공해 추가적인 나토 동진에 맞설 것임을 보여 줬다. 당시 러시아는 석유·천연가스 수출로 경제력을 어느 정도 회복했을 뿐 아니라 미국이 아프가니스탄·이라크 전쟁에 발목을 잡혀 있어 그 약점을 노릴 수 있었던 것이다. 이처럼 러시아가 자국의 지정학적 이익을 위해 군사력 사용도 불사할 것임을 명백하게 밝혔는데도 미국은 나토의 동진 시도를 멈추지 않았다. 이번 우크라이나 전쟁 직전에도 미국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나토 불가입 보장 요구를 한사코 거부했다.

이렇듯 나토 동진의 본질은 미국이 러시아와의 제국주의적 경쟁을 염두에 둔 것이었다. 미국 지배자들이 러시아 국경 지대로 군사 동맹을 확장하기로 결정하면서 군사적·지정학적 경쟁을 염두에 두지 않았을 것이라는 사회진보연대의 주장이 얼마나 설득력 있을까.

냉전 시기 제국주의 경쟁

사회진보연대는 냉전 시기 미·소 간의 경쟁이 제국주의적 경쟁이 아니었다고 주장한다. 상당수 좌파가 소련을 자본주의로 보지 않기 때문에 미·소 경쟁을 제국주의 경쟁으로 보지 않는다. 반면, 사회진보연대는 냉전 시기 소련을 국가자본주의로 보기 때문인지 그런 식으로 주장하지 않는다. 독특하게도, 사회진보연대는 미국과 소련이 서로 경쟁할 의사가 없었다고 주장한다.

즉, ‘자유주의적 국제 질서’가 단지 서방만이 아니라 동구권도 포함하는 세계 질서였으며, 미국과 소련이 함께 이 질서를 “설계하고 유지”하려 했다는 것이다.

“이 질서는 경제적인 측면에서 보면 금본위제, 안보적인 측면에서 보자면 ‘얄타 체제’에서 출발했습니다. 미국과 소련이 공히 동의했던 ‘얄타 체제’는 강대국이 무제한적인 무력 투사를 통해 원하는 바를 이룰 수 없도록, 집단안전보장체제를 구성하는 것을 핵심으로 합니다. 서로 다른 이데올로기를 가진 국가의 공존을 보장하는 질서라고도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냉전 시기 미국과 소련은 소련의 경제력 열세 때문에 경제적 경쟁의 형태를 취하지는 않았다. 주로 군사적 경쟁의 형태를 띠었다. 따라서 그 시기 미국과 소련을 ‘평화로운 질서 유지자들’로 묘사하는 것은 미국과 소련이 군사 동맹, 재래식 군대의 전략적 배치, 핵무기 경쟁, 대리전 등 끊임없이 군비 경쟁을 벌였던 현실에 완전히 눈감는 것이다.

물론 핵전쟁에 대한 두려움, 계속되는 군비 경쟁에 따른 부담, 국경 분쟁으로 표출된 중국과 소련의 갈등, 미국의 베트남 전쟁 패배 등 때문에 미국과 소련이 일시적으로 긴장 완화(데탕트)를 추구하게 되기도 했다. 그러나 냉전 시기의 미국/소련 간 경쟁은 본질적으로 더 많은 세력권을 차지해 상대를 꺾으려는 군사적·지정학적 경쟁이었다. 핵전쟁의 위험 때문에 미국/소련 간 전면전은 일어나지 않았지만, 냉전기에 양국이 배후에 있는 끔찍한 대리전들이 벌어졌다는 사실은 이들이 치열하게 경쟁하고 있었음을 보여 준다. 한국전쟁,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이 그런 대리전의 대표적 사례다.

또, 미국과 소련은 “서로 다른 이데올로기를 가진 국가의 공존을 보장”하기는커녕 자신들의 세력권을 지키는 경쟁을 벌이며 약소국의 주권 따위는 수시로 무시했다. 미국이 라틴아메리카·아시아 등지에서 쿠데타와 군사 독재를 지원하고, 중동에서 이스라엘을 지원해 아랍 국가들을 억압했고, 소련은 동유럽 지배를 위해 동유럽 혁명과 반란(1956년 헝가리 혁명과 1968년 체코슬로바키아의 ‘프라하의 봄’)을 잔인하게 짓밟았다. 1960~1970년대 제3세계에서 민족 해방 투쟁이 활발해지자 여기에 개입해 세력권을 확대하려는 미국/소련 간 경쟁도 더한층 격렬해졌다.

‘얄타 체제’가 “강대국이 무제한적인 무력 투사를 통해 원하는 바를 이룰 수 없도록” 했다는 주장도 황당하다. 얄타·포츠담 회담 후 1945년 8월 미국이 일본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핵폭탄을 떨어뜨린 까닭은 바로 “무제한적인 무력 투사”로 전후에 원하는 바를 얻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얄타 회담을 전후한 미국·소련 정상의 회담과 협약들은 자신들의 입맛에 맞게 세계를 재분할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들은 가장 비밀스러운 회담들을 통해 다른 국가들의 운명을 결정하고 국경선을 다시 그었으며, 이 과정에서 난민 수백만 명을 동쪽과 서쪽으로 쫓아냈다. 이런 결정에 피억압 대중의 염원은 전혀 고려 대상이 아니었다. 예컨대 한반도의 분할도 한국인의 의사와는 전혀 무관하게 이들이 결정한 것이었다.

내가 이전 글에서 사회진보연대의 주장이 카우츠키의 초제국주의론의 변형이라고 비판하자, 사회진보연대는 자신들을 “친미, 친제국주의로 형상화”하려는 것이라고 강하게 반발했다. 그런데 자신들이 “친미, 친제국주의”가 아니라고 항변하려고 이번에는 ‘자유주의적 국제 질서’가 미국뿐 아니라 소련도 동의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런데 결국 강대국 사이의 협상과 협약으로 전쟁을 없애고 세계를 평화로운 질서로 관리할 수 있다고 본다는 점에서, 사회진보연대의 주장과 카우츠키의 초제국주의론 사이의 유사성이 더 뚜렷하게 드러난다.(사회진보연대는 내가 냉전기 서방 진영을 설명한 것이 오히려 초제국주의론과 같다며 역공을 하려는 것 같은데, 나는 냉전을 미국/소련 간 제국주의 경쟁으로 규정하고 있기 때문에 그런 비판은 어불성설이다.)

앞서 내가 설명한 냉전 시기의 모든 현실들은, 미국/소련 양대 강국이 말로는 무엇을 주장했든 간에 치열한 제국주의적 경쟁을 벌였다고 봐야만 그 본질을 제대로 파악할 수 있는 것들이다.

제국주의 경쟁 체제

사회진보연대는 냉전기와 냉전 종식 후에도 강대국들이 서로 제국주의적 경쟁을 벌이며 투쟁해 왔다는 사실을 애써 부정하려 한다. 이를 인정한다면 이번 우크라이나 전쟁의 근본 원인이 제국주의적 갈등에서 터져 나온 대리전이라고 규정하게 될 것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사회진보연대는 냉전기와 냉전 종식 후의 “변화된 경쟁의 양상에 대해 제국주의라는 개념을 사용해야 [하는] 필연적인 이유는 불분명”한데도 노동자연대가 억지로 제국주의적 경쟁이라고 규정한다고 반박한다. 특히 이들은 노동자연대가 제국주의를 ‘강대국 간 지정학적 경쟁’으로 느슨하게 쓰는데, 강대국 간 지정학적 경쟁은 역사 이래 수천 년간 지속돼 온 일이므로 그런 개념이 현대 국제질서를 설명하는 데 유용하지 않다는 것이다. 이런 비판은 한편으로 우리의 주장을 오해한 것이지만, 다른 한편으로 제국주의론에 대한 사회진보연대의 이해가 얼마나 얕은지 보여 주는 것이기도 하다.

20세기 초에 고전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제국주의론을 개발한 것은 당시 강대국들 간 적대가 계속 고조되는 현실을 분석하기 위해서였다. 마르크스주의 제국주의론은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에 들어 수천 년간 존재해 온 지정학적 경쟁이 자본 축적 경쟁과 결합돼 새로운 특징을 띄게 됐다고 분석했다. 그래서 레닌은 제국주의를 “자본주의의 최고 단계”라고 표현했다. 즉, 현대 제국주의는 바로 자본주의적 제국주의인 것이다.

자본주의적 국가 관계는 기본적으로 자본 축적 논리에 연동돼 있다. 축적이 진행될수록 기업들의 규모는 더 커지고, 이 거대 기업들은 국민 경제 전체를 지배하게 된다. 이 기업들은 세계 시장을 무대로 더 많은 이윤·시장·자원 등을 위해 치열하게 경쟁하는데, 이 경쟁에서 자국 국가의 지원을 필요로 하게 된다.

다른 한편, 세계는 자본주의 국민국가들로 나뉘어 있는데, 이 국가들도 ‘국익’(자국 지배계급의 이익)을 위해 다른 국가들과 경쟁한다. 그래서 국가도 군사력을 강화시킬 기반을 마련하려고 자국 자본주의 발전에 의존하게 되는 것이다.

물론 자본주의 국가들은 협정을 맺고 국제 기구들을 만드는 등을 통해 다른 국가들과 협력하기도 한다. 그러나 마르크스주의 제국주의론은 이런 협력이 결코 안정적이지 못하다고 본다. 국가 간 협력의 근저에 자본 간 경쟁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레닌은 자본주의가 역동적인 경쟁 체제인 탓에 경제력의 지리적 분포가 계속 바뀌게 되고, 그러면 국가들의 힘도 바뀌면서 강대국들 사이에 세력 재편을 위한 갈등과 전쟁이 벌어지게 된다고 지적했다.

이처럼 마르크스주의의 제국주의론은 자본 축적 경쟁과 국가 간 군사적 경쟁이 서로 교차하며 결합되기 때문에, 자본주의가 사라지지 않는 한 제국주의적 경쟁이 사라질 수 없다고 본다. 결국 제국주의 경쟁의 양상은 계속 바뀔지라도, 제국주의는 현대 자본주의의 본질 중 하나인 것이다.

그리고 이런 마르크스주의적 제국주의론은 현재 국제 질서의 변동에서도 중요한 정치적 길잡이를 제공한다. 제국주의를 강대국들이 경제적·지정학적으로 서로 경쟁하는 체제로 이해하기 때문에, 기존 질서를 유지하려 하는 미국 제국주의든, 이 질서에 도전하는 중국(그리고 러시아) 제국주의든 어느 쪽도 지지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반면, 제국주의론을 거부한 사회진보연대에게 남은 것은 무엇인가? ‘평화’와 ‘질서’를 깨뜨리고 먼저 총을 쏜 강대국을 비판해야 한다는 것이다. 미국이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를 침략했을 때 미국에 반대했듯이, 이번에는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했으니 러시아를 규탄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누가 먼저 총을 쐈냐를 놓고 전쟁의 책임을 따지는 것이 아니라 전쟁의 성격을 분석하는 것이 마르크스주의의 핵심 접근법이다.

사회진보연대는 기존의 ‘자유주의적 국제 질서’를 더 나은 것으로 보고, 이에 도전하는 러시아와 중국을 더 위험하다고 본다. 사회진보연대의 이런 경향은 최근 1~2년 내에 생겨난 문제가 아니다. 10여 년 전부터 사회진보연대는 평화주의를 강조하기 시작했는데, 평화주의는 전쟁이 자본주의적 경쟁으로부터 필연적으로 발생한다고 보지 않기 때문에 국가 간의 타협과 협약으로 장기적으로 안정적인 평화 체제를 구축할 수 있다고 본다. 이런 논리는 평화주의 세력을 자국 지배자들과의 협력으로 이끌기 쉽다.

게다가 사회진보연대의 회원 상당수는 오랫동안 노동조합 관료 기구 안에서 스태프로 활동해 왔는데, 이 과정에서 노동조합 관료 기구 안에서 타협을 하게 된 듯하다.

평화주의와 노동조합 타협주의의 결합이 우크라이나 전쟁에 대한 사회진보연대의 태도를 결정한 듯하다.

그러나 사회진보연대 같은 좌파들이 점점 더 개혁주의적으로 변해 가고, 특히 제국주의간 경쟁에서 서방과 한국 지배자들을 반대하지 않는다면, 세계를 위험천만한 전쟁으로 몰아가는 세력들에 제대로 맞설 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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