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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주의는 이제 옛일인가?

결말이 어찌될지 지금으로선 모르지만, 우크라이나 전쟁이 국제 정치의 중요한 전환점이 될 것임은 분명하다. 거대한 군사력과 경제력을 보유한 제국주의 세력들이 우크라이나에서 노골적으로 힘을 겨루고 있으니 말이다.

우크라이나 전쟁은 강대국들이 벌이는 세계적 경쟁의 일부이고, 그 경쟁을 악화시키는 중요한 계기가 돼 버렸다.

그러나 우크라이나 전쟁을 제국주의적 경쟁의 일환으로 보지 않는 좌파들이 있다. 그들은 러시아의 침략과 우크라이나의 방어전을 이 전쟁의 실체로 여긴다.

이는 적잖은 좌파가 제국주의는 과거지사라는 생각을 받아들여 온 것의 반영일 수 있다. 가령 사회진보연대는 제국주의론이 “레닌이 19세기 자본주의의 특성을 개념화해 설명한 틀”에 불과하고, 오늘날의 자본주의는 레닌 등 고전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살던 100년 전과는 다르다고 한다.

그러나 과연 제국주의는 19세기와 20세기 초 세계만의 특징일까? 고전 마르크스주의의 제국주의론은 더는 쓸모가 없을까?

레닌

1916년 레닌은 《제국주의론》을 쓰면서, 제국주의가 자본주의의 정상 상태를 벗어난 일탈이 아니고, 자본주의의 내재적 동학에서 비롯했음을 보여 주려 했다.

레닌은 마르크스가 살던 때와 달리 이제 기업들이 시장 경쟁 방식에만 의존할 수 없게 됐다고 했다. 기업들이 경쟁을 거듭하면서 더 강하고 효율적인 기업이 더 약한 기업을 누르고 살아남았고, 이런 과정을 거치며 독점 기업들이 등장해 경제를 쥐락펴락하게 됐다. 이런 독점 기업들은 국경을 넘어 세계시장을 놓고 서로 필사적으로 경쟁했다.

그러자 자본주의의 경쟁은 단지 경제적 형태뿐 아니라 국가들 간 군사적 형태를 띠기 시작했다. 독점 기업들과 연계를 맺은 국가들이 ‘국익’을 위해 해외에서 영향력을 확대하려고 애쓰고, 그래서 독점 기업들 간의 경쟁이 세계 여러 지역을 차지하려는 국가들 간의 투쟁으로 발전했던 것이다. 그 결과, 자본주의 강대국들이 세계를 분할하게 됐다.

레닌은 자본주의의 역동성 때문에 강대국들 간의 힘의 차이에 따른 기존의 분할이 세력균형 변동과 금세 맞지 않게 돼, 얼마 안 가 강대국들이 세계 재분할을 둘러싼 투쟁을 다시 벌인다고 지적했다.

그렇기 때문에 자본주의 세계에서 평화는 결코 항구적일 수 없고, 전쟁과 전쟁 사이의 휴전 또는 정전(무장한 평화)이 있을 뿐이라는 것이었다.

레닌의 제국주의론에 약점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예를 들어, 레닌의 이론은 금융 자본을 수출하는 은행의 핵심적 구실에 의존하는 경향이 있었다. 이는 레닌의 당대에도 맞지 않는 면이 있었다. (한편, 레닌의 동료인 부하린은 《세계경제와 제국주의》에서 이런 결함을 피했다.)

몇몇 결함이 있었음에도 레닌(과 부하린)의 제국주의론은 양차 세계대전의 세계를 분석하고 설명하는 데 중요한 길잡이가 돼 줬다.

그러나 일각에서는 지금 우리는 양차 세계대전이 일어난 시대와는 다른 자본주의 시대에 살고 있다고 주장한다. 자본주의가 100년 전과 다르게 완전히 탈바꿈했다는 것이다. 일부 좌파에게 이런 주장은 과거 경제 형태와 조응되는 제국주의도 이제 옛 일이라는 생각으로 이어지고 있다.

100년이 지났지만, 레닌의 제국주의론은 여전히 살펴볼 가치가 있다

물론 두 차례 세계대전 이후 세계 자본주의의 경제적‍·‍정치적 구조에는 여러 변화가 있었다. 일례로, 오늘날 세계경제는 강대국의 본국과 식민지‍·‍반식민지로 구성된 배타적인 세력권들로 나뉘어 있지 않고, 세계경제는 무역과 투자 등에서 상당히 통합돼 왔다.

그러나 몇몇 형태 변화가 있었지만 자본주의의 근본적 특징은 변함없다. 즉, 예나 지금이나 자본주의는 노동자들에 대한 임금노동 착취에 의존하는, 미친 듯한 자본 간 축적 경쟁의 체제다. 이 때문에 오늘날에도 자본주의는 모순돼 있고 거듭 위기를 초래하는 시스템이다.

국가들 간의 국제 관계는 자본들의 이런 경쟁과 연동돼 있다. 세계화로 국민국가와 자본들의 관계가 느슨해졌다는 주장이 한때 유행했었다. 그러나 현실은 이와는 사뭇 달랐다(다르다). 주요 다국적기업들의 경영진은 대부분 특정 선진국 출신들이고, 그 기업들도 선진국들에 본사가 있다. 그리고 선진 자본주의 국가들은 그 나라의 자본가 계급을 대변해 경쟁한다.

이 점은 오늘날 더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다. 중국 국가가 강화된 경제력에 바탕을 두고 지정학적 위상을 강화하려 하는 반면, 미국 국가는 그런 도전에 대응하면서 미국 경제의 경쟁력 제고를 위해 적극적으로 경제에 개입하고 있다.

따라서 제국주의는 “자본주의의 최고 단계”라는 레닌의 핵심 주장도 여전히 유효하다. 우리는 지금 다국적기업들과 그들과 연계 맺은 자본주의 강대국들이 경쟁하고 지배하는 세계에서 살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경제적‍·‍지정학적 경쟁이 자아낸 불안정으로 고통받고 있다.

자유주의적 국제 질서

고전적 마르크스주의의 제국주의론이 더는 유효하지 않다고 주장하는 좌파들의 일부는 카를 카우츠키의 것과 매우 흡사한 초제국주의론을 조용히 받아들인다. 가령 사회진보연대는 제2차세계대전 종전 이후 형성된 자유주의적 국제 질서를 더는 제국주의로 이해하지 않는다. (미국 주도의) 거대한 국제 협력 체제 안에서 주요 강대국들의 이해관계가 통합돼 있다는 것이다.

사회진보연대는 심지어 자유주의적 국제 질서는 서방과 동구권을 아우르는 질서였고 냉전 시절에 미국과 소련 모두 이 질서를 “설계하고 유지”하려 했다고까지 주장한다.

또한 박홍서 교수와 하남석 교수는 오늘날 미‍·‍중 갈등에도 불구하고 미국과 중국이 모두 지금의 자본주의 국제 질서에서 이익을 얻고 있으므로 두 강대국은 갈등만을 지속하지 않고 타협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런 주장들은 자본주의에서 항구적인 평화가 가능하다는 생각으로 흔히 이어진다.

물론 1945년 이후로 열강 사이의 전쟁 가능성이 희박해지는 듯했고, 냉전 종식 이후에는 한동안 미국이 유일 초강대국으로 군림하는 듯했다. 대다수 좌파에게 이런 상황은 강대국들이 서로 세계를 분할하고 재분할하는 투쟁을 하다가 전쟁까지 치달을 수 있다는 레닌의 주장과 어긋나게 보였을 것이다.

그러나 자유주의적 국제 질서는 미국과 소련이 주도한 냉전 속에서 서방 세계에 형성된 국가 간 시스템이었다. 미국은 자국의 패권을 유지하고 자국 자본들이 활개칠 수 있는 국제 질서를 바랐다. 이를 위해 여러 국제 기구를 통해 주요 국가들을 자국 주도하에 규합하는 질서를 세우려 노력했다.

그러나 자유주의적 국제 질서는 결코 평화롭거나 안정적인 질서가 아니었다. 물론 미국과 소련 간에 전면전이 벌어지지는 않았다. 하지만 핵전쟁 위기가 두 차례나 있었다. 미국은 서구 열강과 일본을 자국 패권 아래에 묶어 두기 위해 자신의 힘을 계속 입증해야 했다. 그래서 세계 곳곳에서 전쟁을 벌이거나 대리전을 지원했다.

중국·러시아에 더 단호하게 대응할 것을 천명한 나토 정상회의 ⓒ출처 NATO

냉전 종식 후 미국이 유일 초강대국으로 군림할 것 같은 시절은 그러나 일시적이었다. 여전히 미국이 다른 경쟁 강대국보다 우위에 있(었)지만, 한때 압도적이던 미국 경제의 지위는 상대적으로 약화돼 왔다. 이와 맞물려 자본주의적 국제 질서에도 균열이 커졌다. 경제력의 지리적 분포가 변하면서 미국의 힘은 점점 제약 받은 반면, 다른 강대국들은 운신의 폭이 조금씩 커져 온 것이다. 러시아의 2008년 조지아 침공, 2014년 크림반도 병합이 바로 그런 사례다.

미국은 자국의 지배력을 지키고 특히 중국 같은 경쟁자들을 견제하고자 아프가니스탄 전쟁, 이라크 전쟁 등을 벌였다. 하지만 결국 모두 실패했다.

레닌은 세계경제의 불균등 발전과 모순을 지적하면서, 국가 간 경제력 비중의 중대한 변화가 국제 질서를 불안정에 빠뜨린다고 강조했다.

바로 이런 맥락에서 미‍·‍중 갈등을 이해해야 한다. 중국은 미국의 동맹 체계 바깥에서 성장한 국가이고, 미국의 이해관계와 상충되는 그 나름의 목표를 추구하고 있다. 미국 지배자들은 이런 중국을 미국의 패권을 가장 강력하게 위협하는 존재로 여긴다.

중국이 서태평양에서 미국을 밀어내려 하고 미국이 군사력 배치와 동맹 강화로 이를 억누르고자 하는 양상은 본질적으로 레닌이 말한 세계 재분할 투쟁이라 할 수 있다.

우크라이나 전쟁은 이런 경쟁과 관계있다. 미국은 그간의 실패와 패배를 우크라이나에서 만회하고자 한다. 그래서 우크라이나에서 러시아를 약화시키고 그 기세를 더 중요한 전선인 중국과의 경쟁으로 이어가려고 애쓰고 있다. 이 때문에 전쟁의 양상도 점점 격해지고 확전 위험도 커지고 있다.

미국이 주도하는 동맹인 나토는 최근 정상회의에서 “[강대국들 간의] 더 경쟁적인 세계”에 대응할 것을 천명했다. 제국주의는 과거지사가 아니며, 강대국 간의 전쟁 가능성도 엄연히 오늘날의 현실인 것이다.

레닌(과 부하린)의 제국주의론이 주는 중요한 정치적 메시지는 군사충돌과 전쟁을 끝내려면 제국주의 지배자들 모두에 반대하고, 자본주의 자체에 맞서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는 지금도 중요하며, 우리가 계속 곱씹어 봐야 할 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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