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7월 7일 노동자연대TV가 주최한 온라인토론회 ‘중국 혁명은 사회주의 혁명이었나?’의 발표문이다.


미중 갈등이 나날이 심화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이러다가 한반도가 전쟁에 휩싸이는 날이 오는 것 아니냐는 두려움을 느끼고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 중 일부는 미국에 반대해 중국을 지지하는 것이 비극을 막거나, 아니면 비극이 일어나도 그 참상을 줄일 수 있지 않겠냐 하고 희망을 걸어 보는 듯합니다.

이런 한 가닥 기대를 걸어 보는 사람들의 일부는 좌파로, 그들도 중국이 사회주의 사회라는 통념, 상식을 공유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미중 무역전쟁이나 홍콩 민주화 시위 또는 티베트나 신장 위구르의 독립 운동 등의 쟁점이 불거졌을 때, 중국을 변호하는 입장을 취합니다.

중국이 여전히 공산당이 통치하고 있기 때문이라거나, 또는 중국 사회가 미국 등의 서구 사회와 본질적으로 다르고 진보적인 사회라고 보기 때문입니다. 인민공사의 해체나 시장 개방 같은 변화들이 있었는데도 말입니다.

그렇다면, 인민공사를 설립하고 시장을 거의 폐지했던 1949년의 중국 혁명은 사회주의 혁명이었을까요? 중국 헌법의 서문은 중국에서 “사회주의가 실현”됐고, “착취가 소멸”했고, “무산계급 독재가 발전”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중국을 여행해 보신 분들에게 물어 보십시오. 중국을 무산계급이 지배하고 있고 중국에 착취가 없다는 주장을 믿을 사람들이 얼마나 될까요? 상하이나 베이징 등 대도시 거리를 오가는 수많은 무산계급 사람들이 중국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까? 착취가 없다면 해마다 활발히 일어나는 중국의 노동쟁의는 뭐죠?

그럼에도 사람들은 중국이 사회주의 사회라고 그냥 생각합니다. 국유 경제를 사회주의라고 학교에서 배웠고, 매스 미디어도 이를 상식으로 당연시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마치 수학의 공리처럼 증명이 불필요한 자명한 진리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일찍이 1백 년도 더 전에 카를 마르크스는 사회주의는 노동계급 자신의 행위라고 여러 차례 강조했습니다. 학교와 언론, 정치인들이 무엇을 사회주의라고 부르든 간에 마르크스는 사회주의를 노동계급의 자력 해방 또는 아래로부터의 노동자 권력으로 정의했습니다.

그래서 마르크스는 국유화가 시행된 적도 없는 파리 코뮌을 노동자 국가로, 사회주의 혁명으로 규정했습니다.

1917년 10월 볼셰비키 혁명으로 수립된 소비에트 국가도 내전이 격화되기 시작한 이듬해 7월까지는 국유화를 시행하지 않았습니다. 대신에 혁명 정부는 생산의 노동자 통제를 추진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1917년 10월 혁명이 사회주의 혁명이 아니었다는 뜻입니까?

국유화 여부가 곧 사회주의의 잣대가 아닙니다. 국가가 누구의 것이냐, 곧 국가를 어느 계급이 통제하느냐가 우리가 먼저 던져야 할 질문입니다.

그렇다면, 중국 혁명은 누구의, 어느 계급의 혁명이었나요? 그 혁명으로 탄생한 신생 국가를 누가, 곧 어느 계급이 통제했습니까?

이게 바로 우리가 던져야 할 질문입니다. 저는 오늘 이 질문에 답하고자 합니다. 결론부터 말하면, 1949년 중국 혁명은 일본과 서양 제국주의를 축출하고 독자적 국민 국가를 세우기를 원한 좌파적 지식인들이 지주 제도 폐지를 원한 농민을 지도해서 일으킨 혁명이라는 것입니다. 노동계급의 사회주의 혁명이 아니라 중간계급의 민족 해방 혁명이었습니다.

이 혁명에서 중국 노동계급은 능동적 주체가 아니라 수동적 응원자에 머물렀습니다.

이제부터 이에 관한 얘기를 하겠습니다.

혁명의 성과

1940년대 중국에서는 국민당과 공산당 두 세력이 중국의 패권을 두고 경쟁을 벌였습니다.

장제스가 이끄는 국민당은 미국의 지원을 받았고 고위 관료, 군장성, 지주, 대자본을 기반으로 하는 노골적인 자본주의 정당이었습니다.

반면 마오쩌둥의 공산당은 서쪽 변방의 옌안을 중심으로 그 지역 농민에 사회적 기반을 둔 좌파적 민족주의 정당이었습니다.

국민당 정부는 본질적으로 고위 관료와 4대 부자 가문(쿵 씨, 쑹 씨, 장 씨, 천 씨)을 위한 정부였습니다. 국민당 통치 지역에서는 늘 살인적인 인플레와 대량 실업 그리고 빈곤이 나타났습니다.

국민당 장교들의 부패는 인민해방군의 헌신적 활동과 뚜렷하게 대비됐습니다. 국민당 장교들은 부대원들의 급료와 보급품을 착복하여 사리사욕을 채웠던 것입니다.

1949년 혁명 과정은 본질적으로 국민당 군대와 인민해방군이라는 두 정규군 사이의 전쟁이었습니다. 도시 노동계급과 대다수 농민은 방관자에 불과했습니다. 공산당은 도시 가까이 진격하자 이런 명령을 내렸습니다.

“생업에 종사하는 노동자들과 종업원들은 일을 계속하고 영업은 평상시처럼 돌아가게 하라. … 국민당 관리들과 경찰관들은 자기 직무에 그대로 남아, 인민해방군과 인민 정부의 명령을 따라야 한다.”

물론 국가 경제의 파탄과 빈부격차의 확대, 국민당의 무능으로 인해 대다수 중국인들은 끔찍한 고생과 혼란에서 벗어나는 길은 공산당이 승리하는 것밖에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1949년 혁명은, 물론 진정한 혁명이었습니다. 도시 지식인들이 지휘한 농민 군대가 옛 지배계급을 타도하고, 일본과 서방 제국주의 권력을 중국 대륙에서 내쫓고, 새로운 사회 질서의 토대를 놓은 근본적 사회 변혁이었습니다.

마오쩌둥이 이끄는 새 정부는 토지개혁을 단행해 지주 제도를 철폐했습니다. 이제 지주는 더는 지배 계급으로 존재하지 못하게 됐습니다.

새 정부는 지주들에게서 토지와 가축, 농기구 등을 몰수해, 중국 인구의 압도 다수를 차지하는 농민들에게 동등하게 토지를 분배했습니다. 덕분에 농민들은 분배 받은 토지를 개인 소유로 삼을 수 있었습니다.

1952년 말에 이르면 전국 농민의 90퍼센트 이상이 토지를 분배 받았습니다. 그래서 당시 농민들이 서로 만나면 수천 년 동안 내려오던 인사, “밥 먹었어?” 대신에 “동지, 해방됐어?”라고 안부를 묻기도 했습니다.

또한 1949년 혁명의 성과로 혼인법이 공표됐습니다. 혼인법은 유교적 가족 제도에 억눌려 있던 수천만 여성의 해방을 목표로 한 것이었는데, 수세기 동안 자행돼 온 아동 혼인을 금지하고, 최소 결혼 연령을 남자 20세, 여자 18세로 정했으며, 전족(纏足)이나 축첩(蓄妾) 그리고 유아 살해도 금지했습니다.

이혼은 간단한 쌍방간 동의로 가능했고, 이혼에서 여성의 이익이 우선적으로 보호받았습니다. 또한 여성은 독립적인 존재로 인정돼 분배 토지를 소유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토지 개혁과 민주주의적 개혁만으로는 1949년의 변화를 사회주의 혁명이라고 규정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1949년 혁명의 성격을 더 정확히 보려면 새 정부와 노동계급의 관계를 살펴봐야 합니다. 새 정부의 소수 민족 정책 문제는 시간 제약으로 오늘은 생략하겠습니다.

도시의 접수와 관리

인민해방군이 도시로 입성했을 때 도시 주민들(다수가 노동자)은 인민해방군을 환영했습니다. 하지만 노동자들은 혁명의 능동적 행위자는 아니었습니다.

물론 노동자들이 완전히 무력한 존재는 아니었습니다. 1949년 혁명 전에도 도시 노동자들은 초인플레로 인한 생활수준 하락과 물자 부족 때문에 일본 제국주의와 국민당 통치에 맞서 종종 저항을 벌였습니다.

하지만 공산당은 이 투쟁을 지도하지 않았고, 그래서 이 투쟁으로 공산당 지지가 증대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혁명 후 공산당에게는 “도시 접관(接管)”이 중요한 과제였습니다. “접관”은 접수하여 관리한다는 뜻입니다.

당시 도시 노동자들은 공산당이 토지개혁을 실시한 것을 보고 임금인상이나 노동조건 개선 같은 개혁도 하리라고 기대를 품었습니다. 하지만 마오쩌둥이 시행한 “접관” 정책은 본질적으로 국가 경제와 민생에 유익한 사기업과 민족 부르주아들을 보호하고, 생산의 회복과 발전을 최고 목표로 삼는 것이었습니다.

한 미국인 기자는 이런 조치들의 의미를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공산주의자들이 도시 노동자들에게 과도하게 높은 임금을 지불하여 환심을 사려 하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사유 공장에서 생산에 대한 최고 권위를 경영자에게 부여했다는 것이다.”

1949년 혁명 후 노동조합은 노동자의 이익을 옹호해야 함에도 오히려 생산을 장려하고 관리하는 역할을 맡았습니다. 노동조합이 경영자와 한편이 돼 행동하는 경향이 비일비재하게 나타났습니다.

게다가 산업 생산이 확대되자 공산당과 노동조합 간부들이 경영진으로 자리를 옮기면서, 노동조합은 경영자 양성 훈련장이 됐습니다.

오늘날 중국의 공식 노동조합인 중화전국총공회는 사용자 단체라고 비난받고 있는데, 이런 비난을 받은 것은 이미 이때부터였습니다.

공산당이 일터에서의 민주주의를 강화한다며 추진한 공장관리위원회와 직공대표대회(職工代表大會)도 유명무실하거나 거수기 구실을 하는 기구에 불과했습니다.

이런 껍데기 같은 조직을 두고 오늘날 일부 좌파는 노동자가 생산을 통제하는 “민주관리”라고 찬양합니다. 하지만 막상 중국 노동자들은 당시에 이렇게 비판했습니다. “공산당이 말하는 ‘민주주의’는 ‘민(民)에 대한 주인(主人)’을 의미할 뿐이다.”

중국혁명 직후에 중국의 산업은 여전히 사기업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공산당은 생산성을 높이기 위해서는 사기업주들에게 재산권, 경영권, 해고권 등을 허용하는 일정한 타협을 해야 했습니다.

다른 한편, 공산당은 국유기업 경영 관료의 부패와 비효율을 막기 위해 “3반(부패 반대, 낭비 반대, 관료주의 반대)” 운동을 펼쳤습니다.

공산당이 도시를 접수하면서 취한 일련의 정책들은 강력한 국민국가 건설을 위해 생산을 독려하는 것이었습니다. 강력한 국민국가가 있어야 자본 축적에 성공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공산당은 이 목적을 위해 사기업주와 제휴했고, 개혁에 대한 기대를 품은 노동자들은 억압했습니다.(이 시기 공산당과 노동자들의 관계에 관해서는 필자의 논문 ‘신중국 초기 국가와 노동계급의 관계에 관한 한 연구’를 참고하시오. https://bit.ly/3nU9I8x)

이 과정에서 공산당은 이데올로기 통제도 강화했습니다. 공산당은 1951년 말부터 노동자 통제에 대한 불만이 나오지 않도록 지식인들에 대한 “사상개조운동”을 펼쳤습니다.

그 이듬해에는 이런 공산당의 행태를 비판하는 트로츠키주의자들을 탄압했고 그들의 단체를 불법화했습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트로츠키주의자들은 홍콩으로 건너가 활동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파리 유학 시절부터 덩샤오핑과 함께 활동했던 트로츠키주의자 정차오린(鄭超麟)은 대륙에 남기로 했다가 노동개조소에 감금돼 27년을 보내야 했습니다.

마오 체제의 확립

마오쩌둥은 국유기업과 사기업이 공존하는 경제 체제를 수십년 동안 유지하면서 생산성을 높이고자 했지만 국내외 상황이 이를 뒷받침해 주지 못했습니다.

특히, 1953년 스탈린이 죽고 흐루쇼프가 권력을 장악하자 그동안 잠재했던 소련과의 갈등이 첨예하게 불거졌습니다.

대만으로 도망갔던 장제스는 미국과 힘을 합쳐 동남부 연안에서 중국에 대한 군사적 위협을 가하고 있었습니다.

노동자들의 불만도 커져서 공사합영(公私合營) 기업들에서 파업이 벌어지곤 했습니다. 공사합영 기업이란 국유기업으로 전환되는 과도기의 사기업을 말합니다.

국내외의 압력에 직면한 마오쩌둥은 급속한 공업화를 추진하고 그래서 세계 자본주의 체제 속에서 살아남을 수 있도록 자본 축적에 성공해야 했습니다.

공산당은 이 과정을 “신민주주의를 거쳐 사회주의 과도기를 실현했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실제의 과정은 신중국을 건설한 공산당이 노동계급을 자신의 통제하에 두기 위해 벌인 첨예한 계급 전쟁이었습니다.

이 전쟁은 1956~1957년에 전국적으로 벌어지면서 절정에 이르렀습니다. 1956년은 헝가리에서 노동자 혁명이 일어나 소련 군대에 맞서 저항하다가 패배한 사건이 있었던 해였습니다.

당시 상하이의 한 파업 노동자는 “우리가 헝가리[1956년 헝가리 혁명]에서 배우지 못한다면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 중국에서 또 다른 헝가리 사태를 만들자.”고 주장했습니다.

1957년 2월 마오쩌둥은 ‘인민 내부의 모순에 대한 올바른 처리에 관하여’라는 글을 발표했는데, 거기서 그는 학생들의 동맹휴업이나 노동자 파업, 거리 시위 등이 첨예한 계급 투쟁으로 번지고 있음을 시인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1956년 헝가리와 폴란드에서 일어난 사태가 이런 상황에 영향을 미치고 있음도 인정해야 했습니다.

1955년부터 급속한 국유화를 추진했었는데, 그 바람에 노동자들은 정치적·시민적 권리가 제한됐습니다. 그러나 사회에서 이런 불만을 제기할 지식인들은 “백화제방 백가쟁명” 운동으로 거세됐습니다. 백화제방 백가쟁명 운동이란 1956~1957년 마오쩌둥이 비판의 자유를 허용한다는 유인책으로 좌우파 지식인들을 단속했던 운동이었습니다.

농촌에서는 인민공사 체제가 확립되면서 국가가 농촌의 잉여 농산물들을 수탈해 저렴한 가격으로 도시 노동자들에게 공급했습니다. 농촌에서 도시로 잉여 농산물을 이전한 데서 이득을 본 쪽은 노동자가 아니라 국가 관료였습니다.

맺으며

마오쩌둥이 확립한 이런 체제를 흔히들 사회주의라고 부릅니다. 하지만 앞서도 제가 강조했듯이, 마르크스는 사회주의를 노동계급이 스스로의 힘으로 해방을 성취하는 사회라고 정의했습니다.

신중국 등장 이후 노동자들은 파업권도 없이 노동조합의 감시와 통제 하에서 노동하며 저임금으로 생활해야 했습니다. 이런 처지에 있는 노동자들이 해방됐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국가가 생산수단을 통제하면서 노동자와 농민들을 착취하고 그 잉여가치로 더욱 부강한 국가를 건설하는 체제가 바로 1949년 이후의 중국입니다.

이때 국가 관료는 국가라는 엥겔스가 말한 “집합적 자본”의 인격체로 나타납니다. 이런 사회는 사회주의 사회가 아니라 자본주의의 한 변형인 국가자본주의 사회입니다.

1978년 이후 꾸준히 시장 개방이 이뤄졌지만, 자본주의라는 사회의 기본 성격은 바뀌지 않았습니다. 그것도 여전히 국가 자본주의라는 형태로 말입니다.

소위 ‘중국 특색의 사회주의’와 ‘실질적 노동계급 독재’가 이뤄졌다는 중국 사회에서 그 주인이어야 할 노동자들이 임금인상이나 노동조건 개선을 요구하며 주기적으로 투쟁하고 있고, 중국 정부는 이를 강경하게 탄압하고 있습니다. 중국 사회를 모종의 사회주의가 아니라 국가자본주의로 파악할 때만 이런 모순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중국 사회의 개혁은 공산당 개혁파의 개혁 조치들이 아니라 톈안먼 항쟁과 같은 노동자와 학생들의 투쟁에 의한 것이었음을 중국 현대사는 보여 주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중국 노동자와 학생들이 개혁을 쟁취하는 투쟁뿐 아니라 더 나아가 진정한 사회주의, 즉 아래로부터의 노동자 권력을 위한 투쟁과 조직을 건설하기를 바라고 또 지지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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