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7월 14일 노동자연대TV가 주최한 온라인 토론회 ‘한미 반도체 동맹, 순탄할까?’의 발표문이다.


미국 대통령 바이든이 지난 5월 방한 첫 일정으로 삼성전자 평택 공장을 방문했다. 이것은 한·미 두 나라 모두에 의미심장한 행보였다.

바이든으로서는 미국 중심의 반도체 공급망 재편 정책에 한국을 확실한 우군으로 세우겠다는 선언이었다.

한국은 한국대로 미국과의 밀착을 분명히 하고 있다. 윤석열이 미국 주도의 경제 협력체인 인도·태평양경제프레임워크(IPEF)와 나토 정상회의에 참석했고, 청와대 경제수석 최상목은 “지난 20년간 우리가 누려 왔던 중국을 통한 수출 호황의 시대는 끝나 가고 있다”며 중국 외의 새로운 시장 개척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그러자 그동안 한국이 추구해 온 ‘안미경중’(安美經中, ‘안보는 미국, 경제는 중국’) 노선을 폐기하고 ‘안미경미’(安美經美, ‘안보도, 경제도 미국’)로 가는 것 아니냐는 논란이 일었다.

이 글에서는 윤석열 정부가 이처럼 방향 전환에 나선 까닭과 그 앞에 놓인 정치적·경제적 난관과 모순을 살펴보려 한다. 그 전에 우선 미·중 기술 패권 경쟁의 의미를 살펴보자.

‘4차 산업혁명’과 미·중 기술 패권 경쟁

세계 주요 국가와 기업들은 디지털화를 가속화하며, 새로운 산업 분야를 개척하고 효율을 높이기 위해 치열한 경쟁을 벌이는 중이다. 앞으로 인공지능(AI)과 데이터센터, 사물인터넷(IoT), 5세대·6세대 이동통신, 전기자동차, 자율주행 자동차, 원격의료 등의 산업이 신성장 산업으로 부상하며 경쟁이 더욱 치열해질 것이다.

이런 디지털화에서 반도체는 핵심 부품이다. 핸드폰이나 컴퓨터에 들어가는 고성능 반도체도 있지만, 손전등이나 충전기 등 간단한 제품에도 반도체가 필수적이다. 이 때문에 반도체를 ‘산업의 쌀’로 비유하기도 한다. 단 1~2달러 하는 반도체가 부족해 자동차 수백만 대의 생산에 차질이 빚어진 일은 반도체의 중요성을 분명히 보여 줬다.

현재 전 세계 반도체 산업 규모는 6000억 달러 수준이지만, 반도체가 영향을 끼치는 산업 부문을 따지면 세계 GDP의 40퍼센트에 이를 것이라는 평가도 있다. 앞으로도 반도체 산업의 영향력은 더 커질 공산이 크다.

현재 세계 반도체 산업의 구조를 간단히 살펴보자.

반도체 산업의 주도권은 여전히 미국이 쥐고 있다. 미국은 반도체 설계와 설비 기술을 주도하고 있기 때문에, 반도체와 IT 산업 등에서 ‘기술 표준’을 설정하고, 다른 국가와 기업들이 이를 따르게 할 힘이 있다.

그러나 반도체 생산 부문은 대만과 한국 기업들이 장악하고 있다. 반도체 위탁제조(파운드리) 부문은 대만 TSMC가, 반도체 시장의 30퍼센트를 차지하는 메모리 반도체 부문은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미국·유럽·일본 기업들을 제치고 시장을 장악했다.

그래서 미국이 여전히 반도체 산업을 지배하고 있음에도, 미국 내 반도체 생산량은 1990년 전 세계 생산량의 37퍼센트에서 2020년 12퍼센트로 감소했다. 반면, 한국·대만 등 아시아 지역이 반도체의 70퍼센트를 생산한다. 특히 최첨단 기술이 사용되는 10나노 이하 반도체를 양산할 수 있는 나라는 대만과 한국밖에 없다. 10나노 이하, 즉 선폭이 좁은 반도체를 양산할 수 있다는 것은 고성능 반도체를 값싸게 생산할 수 있다는 얘기다.

중국은 어떨까? 중국은 그동안 선진국에서 반도체나 부품을 수입해, 조립·판매하며 경제를 급속하게 성장시켰다. 그래서 중국은 세계 최대 반도체 수입국이다. 2020년 중국의 반도체 수입액은 3500억 달러(약 457조 원)로, 중국 전체 수입액의 13퍼센트나 차지했다. 원유와 전체 농산물 수입액보다도 많다.

중국 정부는 이와 같은 단순 조립 생산에 불만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중국제조2025’ 정책을 추진하고 있다. 중국 경제를 업그레이드해, 단순 조립 생산은 그만두고 기술적으로 더 발전한 고급 산업을 발전시키겠다는 것이다. 반도체 분야에서 2020년까지 자급률 40퍼센트, 2025년까지 70퍼센트 달성을 목표로 제시하며 관련 기업들에 막대한 보조금을 지급하고 있다.

미국 지배자들은 이를 엄청난 위협으로 여긴다. 미국의 거대 IT 기업들(FAANG 같은)이 장악하고 있는 고수익 산업 부문의 지배력이 위태로워질 뿐 아니라 인공지능, 자율주행차 등 새로운 첨단 분야에서 미국의 지배를 위협할 수 있기 때문이다.

미국의 전략 : 중국 첨단산업 죽이기

그래서 트럼프 정부는 중국의 첨단 반도체 산업 육성 정책을 방해했다. 트럼프는 2020년에 중국의 첨단 기술 기업인 화웨이에 제재 조처를 시행했고, 중국이 네덜란드 ASML사의 반도체 첨단 제조 장비(미국이 핵심 기술 개발국이다)를 수입하지 못하게 가로막았다.

중국 제품에 관세를 매기는 트럼프의 정책은 미국 기업들의 반발을 꽤 사기도 했지만, 중국의 첨단 산업 육성을 막아야 한다는 점에서는 미국 내의 ‘초당적 합의’가 있다.

미국의 기술 제재 때문에 첨단 반도체 생산 능력을 발전시키려던 중국의 계획은 심각한 타격을 입었다. 반도체 전문가들은 중국이 미국의 방해로 수입하지 못한 ASML의 첨단 제조 장비를 자체 개발하려면 최소 15년은 걸릴 것이라고 예상한다.

중국의 2020년 반도체 자급률은 계획했던 목표인 40퍼센트에 훨씬 못 미친 16퍼센트 수준에 그쳤다. 중국 정부의 대대적인 지원을 받으며 반도체 산업에 뛰어든 몇몇 기업들이 제대로 수익을 내지 못해 파산하기도 했다.

물론 중국 정부는 ‘반도체 굴기’를 포기하지 않았다. 중국은 한국이나 대만보다 2~3세대 뒤진 생산 설비를 수입해 저사양 반도체가 필요한 부문에서 반도체 국산화를 진척시키고 있다.

바이든 정부가 들어선 이후에도 상황은 달라지지 않았다. 바이든은 중국이 첨단 기술을 육성하지 못하게 방해하는 트럼프의 정책을 계승했고, 이에 더해 미국의 동맹인 한국·대만·일본 등과 협력해 미국 내의 반도체 생산을 증대시키는 공급망 재편을 시도하고 있다.

이는 동맹들을 더 확실하게 미국에 묶어 둬 반도체 분야 우위를 확고히 하려는 목적과 함께, 향후 대만을 둘러싼 중국과의 전쟁이 벌어질 경우 미국 경제가 심각한 타격을 입을 수 있다는 우려가 작용한 것이다.

코로나19로 공급망이 교란되면서 반도체 부족 사태가 지속되고,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에너지·곡물 등의 공급이 차단되는 상황은 미국 내에 반도체 생산 시설을 만들어야 한다는 바이든 정부의 주장을 강화시켰다.

예컨대 구글 전 회장 에릭 슈미트는 언론 기고에서 첨단 반도체를 생산하는 대만 TSMC의 제조 시설들이 전쟁으로 파괴되거나 중국의 손에 넘어가면 미국은 궤멸적인 타격을 입을 것이라고 우려했다.

물론 바이든 정부만 이런 우려를 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유럽연합(EU)은 2030년까지 약 430억 유로를 지원해 유럽연합 내의 반도체 생산량을 현재 전 세계 생산량의 10퍼센트 수준에서 20퍼센트까지 늘리겠다는 계획을 밝혔다. 일본도 대만 TSMC를 끌어들여 10조 원 규모의 반도체 생산 공장을 짓기로 했다.

미국 바이든 정부가 이처럼 미국 내 반도체 생산 시설을 늘리며 공급망을 재편하려고 하지만, 아직까지는 중국을 반도체 공급망에서 완전히 몰아내려는 것은 아니다. 미국과 그 동맹국들이 중국과 맺고 있는 경제적 관계가 여전히 강력하기 때문에 그럴 수 없다.

미국이 중국으로 들어가는 반도체 장비와 반도체를 완전히 규제하면 중국 IT 산업이 무너지겠지만, 그와 동시에 애플 등 미국의 주요 IT 기업들도 심대한 타격을 받을 것이다.

유럽·일본·한국 등 미국의 동맹들이 중국을 매력적인 시장으로 보고 있는 것도 미국이 제재를 더 강화하기 어렵게 한다. 바이든 정부의 기술 규제가 한창인 2021년에도 한·미·일 기업들은 중국에 반도체 장비를 141억 4200만 달러어치나 수출했다. 이는 2020년보다 55퍼센트나 증가한 것이다.

미국에 협조하는 윤석열 정부

분명 윤석열 정부는 바이든 정부의 경제 정책에 더 협조하는 태도를 취하고 있다. 최근 한미 정상회담 공동선언에서 한국은 미국과 “핵심기술 관련 해외 투자심사 및 수출통제 당국 간 협력”을 하기로 했다. 이는 첨단 기술 분야에서 중국의 성장을 견제하는 협력을 강화하겠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한국 지배자들 내에서 우려의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 한국의 대중국 무역 비중이 25퍼센트나 되고, 한국의 최대 수출품인 반도체는 60퍼센트가 중국(홍콩 포함)으로 향하며, 중국에 70퍼센트 이상 의존하는 원재료·공산품이 700여 개나 되는데, 중국과의 관계를 너무 가벼이 여긴다며 말이다.

그러나 현재 윤석열 정부가 중국 시장을 가벼이 여기고 ‘안미경미’로 완전히 돌아섰다고 보는 것은 다소 단순한 관측이다. 한국 기업들의 행보도 ‘미국에 줄서기’를 확정했다고 보기는 힘들다.

예컨대, 삼성전자는 바이든 방한 후에 미국에 20조 원 규모의 반도체 생산 공장 설립을 추진하겠다고 발표했지만, 올 초에는 중국 반도체 공장 증설을 마무리하고 중국 생산을 늘렸다. SK하이닉스는 바이든 방한 4일 전인 5월 16일에 중국 다롄에서 반도체 공장 착공식을 열었다.

그럼에도 윤석열 정부가 미국의 대중 경제 제재 정책에 협조하는 쪽으로 더 기운 것은 사실인데, 이는 두 가지 목적 때문인 듯하다. 둘 다 그저 미국을 추종해서가 아니라 한국 지배계급의 이해관계를 반영한 것이다.

첫째, 한국의 지배계급 상당수는 반도체를 비롯한 첨단 기술 분야에서 미국이 중국을 견제하는 것을 기회라고 보고 있을 것이다. 중국이 경쟁력을 높여 시장을 잠식해 올 수 있다는 위기감에서 벗어나 한국이 한동안 기술적 우위를 지킬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기술 우위만 유지된다면 중국의 높은 한국 의존도가 유지될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말이다.

둘째, 한국 정부와 기업주들은 새로운 첨단 산업 시장을 확보하려면 미국과 협조해야 한다고 보고 있다. 한국 반도체 기업들은 이미 확고하게 장악한 메모리 반도체 시장을 넘어 시스템 반도체와 파운드리 분야로 확장하고 싶어 한다. 바로 이 분야가 전기자동차·자율주행차, 인공지능, 사물인터넷 등의 핵심 분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삼성전자는 ‘반도체 비전 2030’을 발표하고, 2030년까지 파운드리 분야에서 대만 TSMC를 넘어선다는 목표를 발표한 바 있다. 한국 기업들이 이미 대만이 장악한 시장을 잠식하려면 미국과 유럽 기업들의 수주를 받아 내야 한다.

이처럼 윤석열 정부는 미국의 대중국 기술 제재가 현실화한 상황에서 미국과 동맹을 강화해 경쟁력을 높이는 게, 중국 시장에서의 높은 점유율도 유지하고 새로운 시장도 확장하는, 두 마리 토끼를 잡는 길이라고 보고 있는 듯하다.

반도체 동맹, 순항할까?

그러나 한미 반도체 동맹을 강화하려는 윤석열 정부의 계획 앞에는 적잖은 난관이 놓여 있다.

우선, 윤석열 정부가 미국의 대중국 경제 제재에 협조하는 것은 미·중 간 제국주의 경쟁 격화에 일조하는 것이다. 오늘날의 제국주의는 경제적 경쟁과 지정학적 경쟁이 부분적으로 분리돼 있던 냉전 시절과는 다르다. 설사 미·중 간 경쟁 격화가 당장은 지정학적 충돌(예를 들어 대만을 둘러싼)로 발전하지 않는다 해도, 갈등 증대는 미국과 중국 중 어느 한쪽 편을 더 확실하게 들어야 한다는 압력을 키울 것이다.

이런 압력이 높아질수록 두 마리 토끼를 잡겠다는 희망은 일장춘몽이 되기 쉽고, 한국 지배자들 내에서 해법을 두고 갈등이 심각해지며 정치 불안정성이 높아질 수 있다.

둘째, 세계적인 금리 인상으로 경제 위기가 심화하고 한국·대만·미국의 반도체 기업 간 경쟁이 치열해지면, 바이든 정부가 이해관계를 조율하며 반도체 동맹을 유지하는 게 쉽지 않을 것이다.

영국 〈이코노미스트〉는 삼성전자, TSMC, 인텔 등 주요 반도체 기업들이 팬데믹 기간 동안 920억 달러(약 120조 원)의 시설 투자를 단행했다고 보도했다. 이는 지난 팬데믹이 본격화되기 직전인 2019년보다 73퍼센트나 증가한 수치다. 경제 위기가 심화하면, 이런 ‘과잉투자’의 손실을 누가 더 져야 할지를 두고 경쟁이 치열해질 것이다.

셋째, 반도체 공급망 재편을 주도하는 미국 측의 문제도 있다. 우선, 바이든 정부가 520억 달러(약 68조 원) 규모의 반도체 지원법을 8월 초까지 처리할 수 있을지 불확실하다. 미국 공화당은 이 법안 처리에 시큰둥하기 때문이다. 공화당 내에는 굳이 재정을 지출해 가며 반도체 공장을 미국에 짓고, 외국 기업들에 보조금을 지급하는 것에 회의적인 목소리가 있다. 8월 초까지 법안이 처리되지 못하고, 11월 중간선거에서 공화당이 승리하면 공급망 재편 계획이 중지될 위험도 있는 것이다.

사실 바이든 정부가 주도하고 있는 IPEF도 참여국에게 줄 수 있는 혜택이 불확실하기 때문에 미국의 뜻대로 대중국 견제에 힘을 모을 수 있을지 회의적인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미국의 시장을 제공하는 등의 혜택을 주지 못한다면 일부 국가들은 중국과의 거리를 좁힐 수도 있다.

이처럼 미국 정부가 중국 위협을 이유로 동맹국들의 경제적 이해관계를 조율하는 게 어렵다는 점은 현 세계 질서가 단순히 ‘신냉전’으로 재편되고 있지 않음을 보여 준다.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미국과 보조를 맞추는 윤석열 정부의 정책은 미·중 갈등에 일조하는 것이고, 한국 경제의 경쟁력을 강화하고 경제 위기를 헤쳐나갈 수 있는 길이 되기도 어렵다.

그런데도 윤석열 정부는 반도체 산업 경쟁력을 강화해야 한다며, 탄력근무를 확대해 노동자들을 더 싸게 마음대로 부려 먹으려 하고, 임금 인상을 억제하며, 법인세를 낮춰 기업을 지원하는 정책을 추진하고 있다.

민주당 등은 윤석열 정부가 중국을 자극하는 언행을 하는 것에 불만을 제기하지만, 반도체 산업 경쟁력 강화를 위해 노동자가 양보하고 희생해야 한다는 점에서는 이견이 없을 것이다. 지난 정권 시절 이미 이런 일들이 벌어졌다.

‘국익’의 이름으로 노동자에게 희생을 강요하고, 반도체 산업의 미래를 위해 현재 노동자들의 삶을 악화시키는 정책에 반대해야 한다. 또, 노동자들의 생활수준을 방어하는 투쟁을 지지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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