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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반도체지원법과 한국의 딜레마

8월 25일 미국 대통령 바이든이 반도체지원법을 본격 시행하기 위한 조정위원회를 구성하라는 행정명령에 서명했다. 이 위원회는 신속한 집행을 위해 정부 부처 간 업무를 조정하고 지원 우선순위를 정하는 구실을 한다. 7월에 미 의회를 통과한 반도체지원법 시행에 본격 시동을 건 것이다.

바이든은 행정명령에 서명하면서, “경제적이고 국가적인 안보 위기를 해소해야” 하며, 이를 위해 “해외 생산에 대한 의존을 줄여야 [한다]”고 말했다. 이 말에 바이든 정부의 핵심 의도가 담겨 있다.

지난 8월 9일 미국 반도체지원법에 서명하는 바이든 ⓒ출처 백악관

중국 시진핑 정부는 ‘중국제조2025’ 정책을 추진하며, 중국 경제를 기술적으로 더 발전한 경제로 업그레이드하려 노력해 왔다. 첨단 산업의 핵심 부품인 반도체 분야에서 중국은 국내 기업들에 막대한 보조금을 지급하며 반도체 자급률을 높이려 한다.

그러나 미국 지배자들은 중국의 ‘반도체 굴기’를 중대한 위협으로 여긴다. 미국 거대 IT 기업들의 시장 지배력을 갉아먹을 수 있을 뿐 아니라, 자율주행차 같은 차세대 첨단 산업에서도 미국을 위협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특히 중국 자본주의의 기술 업그레이드는 군사력 경쟁에도 영향을 미친다. 2020년 미국은 “반도체 기술이 중국군에 이용될 수 있다”며 중국 반도체 기업 SMIC을 거래제한 명단에 올린 바 있다.

이런 이유들 때문에 트럼프 정부 때부터 미국의 견제가 본격화됐다.

이 때문에 반도체 자급률을 높이려는 중국 정부의 목표 달성 노력은 차질을 빚고 있다. 그럼에도 중국 정부와 기업들은 중저가 반도체 생산 시설에 투자를 계속 늘리고 있다. 최근엔 중국 반도체 기업 YMTC가 세계에서 세 번째로 200단 이상 낸드플래시 제품 개발에 성공했다. ‘반도체 굴기’는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칩4 동맹

그래서 바이든 정부도 트럼프 못지않게 반도체 문제에서 중국에 강경하다. 8월 31일 바이든 정부는 자국 반도체 기업인 엔비디아와 AMD에게 인공지능(AI)용 첨단 반도체를 중국에 수출하지 말라고 통보했다.

반도체지원법에도 중국 견제가 핵심 목표로 담겨 있다. 이 법은 미국의 보조금을 받는 기업이 10년간 중국에 반도체 시설의 신·증설을 하지 못하게 하며, 첨단 반도체 제조장비를 중국에 반입하는 것도 금지한다.

바이든은 미국 내 반도체 생산 시설을 늘리면서 동시에 동맹국들인 한국·일본·대만 등과 협력해 반도체 공급망을 재편하려고 한다. 이 동맹국들에 ‘칩4 동맹’ 참여를 제안한 까닭이다. 반도체지원법은 ‘칩4’(반도체 동맹)에 참여하라고 동맹국들을 압박하는 수단도 된다.

미국의 대중국 제재로 미·중 간 경쟁이 격화되는 가운데, 윤석열 정부는 반도체 문제에서 미국과의 협력을 진전시켜 왔다. 5월 한미 정상회담에서 윤석열은 첨단 기술 분야에서 중국의 성장을 견제하는 데 협력하기로 미국에 약속했고, 8월에는 칩4 예비 회의에 참여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윤석열 정부와 한국 기업들이 미국에 일방적으로 줄을 서려는 것은 아니다. 반도체 문제에서 한국은 미국과 핵심 이해관계를 공유하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일치하는 것은 아니며, 중국과 이해관계가 겹치는 부분도 무시할 순 없다.

한국의 반도체 수출 60퍼센트가 중국으로 향하며, 반도체 생산에 필요한 원료의 중국 의존도도 크다. 그래서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모두 중국 현지에 반도체 공장을 운영한다. 신규 투자도 진행 중이다.

그런데 미국의 반도체지원법 때문에 중국에 대한 투자와 장비 반입이 막힐 수 있어 난감한 처지가 된 것이다.

한국이 칩4에 정식으로 참여한다면, 반도체 최대 고객인 중국의 거센 반발을 살 수 있다. 중국 관영 언론은 한국의 칩4 참여가 “상업적 자살 행위”라고 비판했다.

공급망

그래서 윤석열 정부는 칩4 예비 회의에 참여하는 한편, “한국 기업의 중국 내 설비에 대한 추가 투자가 가능하도록 미국의 대중 제한 조치를 완화”해 달라고 미국에 요구했다. 중국 정부에게 윤석열 정부는 칩4가 중국 배제 동맹이 아니라고 강조하며, 8월 27일 중국과 공급망 협력에 관한 양해각서를 체결했다.

두 마리 토끼를 잡으려는 듯한 이런 행보는 대선 기간에 윤석열과 우파가 비판한 문재인 정부의 줄타기 행태와 닮았다. 우파는 중국에 대한 ‘자주(할 말은 하는)’와 가치(‘자유와 민주주의’) 외교를 강조해 왔다.

이런 혼선은 미·중의 반도체 전쟁을 둘러싼 한국 지배계급의 복잡한 이해관계와 딜레마를 보여 준다.

그럼에도 윤석열 정부는 미국과의 협력 강화를 지속하려는 점에 무게중심을 두고 있다. 산업 경쟁력을 강화하고, 첨단 산업에서 우위를 확보하려면 미국과의 협력이 제일 중요하긴 한 것이다. 첨단 기술 분야에서 미국이 중국을 견제하는 것은 한국 기업들이 중국 기업들의 거센 추격을 따돌리는 데도 득이 될 것이다.

한국의 대미 협력은 미·중 간 제국주의 경쟁 격화에 일조하는 꼴이 될 것이고, 한국이 경쟁하는 제국주의 국가들 중 한쪽 편을 들어야 한다는 압력은 더 거세질 것이다.

앞으로 골치 아픈 과제가 한국 지배계급에 계속 들이닥칠 것이다. 그러면 미·중 반도체 전쟁 대응 해법을 두고 한국 지배자들 사이에서도 갈등이 불거질 수 있다.

그러나 한국 지배자들 모두 한국 반도체 산업의 경쟁력을 높여야 한다는 목표에서는 의견이 일치한다. 결국 이들은 애국심에 호소하며 노동자들에게 희생을 떠넘기는 것으로 딜레마를 피해가려 할 것이다.

지배자들은 국익을 강조하며 외국 기업들에 맞서 한국 자본가와 노동자가 단결해야 할 공통의 이해관계가 있다고 얘기한다. 그러나 이는 사회의 근본적 분단선인 계급 적대를 은폐하는 것이다.

당장 정부·여당은 특별연장근로 인가 대상에 ‘반도체 연구·개발(R&D)’을 확대하기로 했고, 기업들에 세율 인하 혜택을 주는 등의 정책을 추진하고 있다. 국회에서 논의되는 반도체 지원 법안들에도 노동시간 연장, 화학물질 규제 완화 등 각종 독소 조항들이 포함돼 있다.

한국 정부가 제국주의 경쟁 악화에 일조하는 데 반대하면서, ‘국익’을 앞세워 노동자들의 희생을 강요하는 데도 맞서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