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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나요? 1925~27년 중국 노동자 혁명

이 기사는 9월 15일 노동자연대 온라인 토론회의 발제문이다. 이 토론은 시리즈 토론회인 ‘당신이 알아야 할 현대 중국의 모든 것 – 마르크스주의 관점’의 첫 번째 시간이었다.

중국에서 벌어진 혁명을 얘기하면, 사람들은 대부분 1949년 마오쩌둥이 장제스의 국민당을 몰아내고 중화인민공화국을 수립한 사건을 생각한다. 물론 1949년에 벌어진 일도 혁명이다. 마오쩌둥의 좌파 민족주의 세력이 일본과 미국 제국주의를 몰아내고 근대적 국민국가를 수립한 민족해방혁명이다. 그러나 그것은 사회주의 혁명이 아니었고, 노동계급이 주도하지도 않았다.

이와 달리 1925~27년에 벌어진 중국 혁명은 노동자 혁명이었다. 제국주의 열강의 영향력하에 있던 중국에서 노동계급은 반제국주의 요구와 자기 계급의 고유한 요구를 결합해 투쟁하면서 사회 변혁의 주도 세력으로서 잠재력을 보여 줬다.

20세기 초반 중국 상황과 노동운동의 성장

1925~27년 중국에서 노동자 혁명이 어떻게 분출했는지를 알기 위해, 20세기 초반의 중국 상황을 간단하게나마 설명하겠다.

중국은 19세기 중반 이후 제국주의 열강의 영향 아래 있었는데, 청조는 제국주의 확장을 저지하는 데 무능했다. 1911년 민족주의 봉기인 신해혁명으로 청조가 무너졌지만 중국 자본가 계급은 새 중국을 건설하지 못했다. 자본가 계급과 그 정당인 국민당은 광저우와 홍콩 등지에서만 기반을 갖고 있었고, 나머지 지역들은 지역 군벌들이 나눠서 장악하고 있었다.

중국 지식인들은 제1차세계대전이 끝나자 독일이 장악하고 있었던 산둥성을 되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다. 그러나 파리 강화조약에서 서방 열강은 이 지역 지배권을 신흥 제국주의 국가인 일본에 넘겨줬다. 게다가 북경의 군벌 정권이 이미 1915년에 산둥성 지배권을 일본에 넘겨준 사실(21개 조약)이 폭로되면서 분노가 폭발했다.

이를 배경으로 1919년에 5·4운동이 벌어졌다. 학생들의 전국적 항의로 시작된 5·4운동은 수많은 대중을 투쟁으로 끌어들였다. 5·4운동은 노동계급이 조직된 세력으로 투쟁에 나선 최초의 사건이었고, 1925~27년 혁명의 전조였다.

1919년 당시 중국은 심각한 위기를 겪고 있었다. 근대적 국민국가로 통일되지 못한 채 지역 군벌들이 지배하고 있었고, 농촌에서는 여전히 지주 세력이 강력했다. 그럼에도 동남부 연안에 있는 서방 열강의 조차지를 중심으로 산업이 발전했고, 덕분에 노동계급이 급성장했다. 1920년대 초반에는 농촌에서도 농민 운동이 벌어져 농민협회 등이 여러 지역에서 조직됐다.

노동자와 농민 운동의 고양을 배경으로 1921년에 중국공산당이 창당됐다. 창당 주역들은 1917년 러시아 혁명과 볼셰비키에 큰 영향을 받았다. 중국공산당은 창당 초기에 당원이 57명에 불과한 선전그룹에 지나지 않았지만, 홍콩·광저우·상하이 등지에서 벌어진 노동운동과 관계를 맺으면서 빠르게 성장했다.

1920년대 초반 중국에서는 노동자 투쟁이 활발하게 벌어졌다. 특히 홍콩, 광저우, 한커우, 우한, 상하이 등지에서 두드러졌는데, 1925년 5월 30일 운동은 그 절정이었다.

상하이의 일본인 소유 공장에서 중국인 노동자가 살해된 것이 발단이었는데, 이 항의는 점점 확산돼 6월 13일에는 13만 명이 참가한 파업이 벌어졌다. 몇 주 동안의 이 항의 운동에 전례없이 많은 노동자들이 참가했다. 제국주의에 반대하는 투쟁에서 이제 노동계급은 단지 운동의 일부가 아니라 운동을 이끄는 세력이 됐다.

이 운동은 중국의 다른 지역으로 확산돼, 베이징에서 30만 시위가 벌어지고 광저우와 우한 등 주요 도시에서도 시위가 끊이지 않았다.

상하이에서 시작된 노동자 투쟁은 홍콩에서는 이중권력 상황으로까지 나아갔다. 홍콩의 노동조합 총연합체인 홍콩총공회가 6월 19일 전면 파업을 호소했고, 7월에는 5만여 명이 파업에 돌입했다. 영국 경찰의 발포로 52명이 죽고 100여 명이 다치자 홍콩총공회는 총파업으로 맞섰다.

파업 노동자들의 조직인 ‘파업노동자대표회의’ 집행위원회는 파업 참가자들의 식사와 주거와 여가까지 조직했다. 또, 주간 신문과 노동자들을 위한 학교를 개설했고, 규찰대 수천 명을 조직해 내부 치안도 담당했다. ‘파업노동자대표회의’ 집행위원회는 사실상 중국 최초의 소비에트였다.

계급 갈등의 증대와 중산함 사건

노동자 투쟁이 폭발적으로 증가하자 쑨원이 이끄는 국민당과 중국의 자본가 계급은 모순에 봉착했다. 중국 자본가 계급은 처음에는 5월 30일 운동에 지지를 보냈다. 그러나 외국인 공장에 비해 임금과 노동조건이 더 열악한 자신들의 공장에서도 노동자들이 언제든지 파업에 나설 수 있다는 생각에 늘 불안했다. 국민당은 노동자 투쟁이 부상하자 좌우파로 분열했다.

이런 상황에서 장제스의 쿠데타 예행연습이라고 할 수 있는 중산함 사건이 벌어졌다. 1926년 3월 20일 황포군관학교 교장이던 장제스는 공산당원이 자신을 소련으로 납치하려 했고 공산당이 정부 전복을 기도했다고 주장하며 계엄령을 발표했다. 장제스는 홍콩의 ‘파업노동자대표회의’ 집행위원회와 광저우의 노동조합을 탄압했고, 소련 고문단을 감금했다.

당시 공산당은 국민당 입당을 통한 통합인 제1차 국공합작을 추진 중이었는데, 소련공산당과 코민테른 지도자인 스탈린과 부하린은 장제스의 요구를 모두 수용하라고 중국공산당에 지시했다.

스탈린은 서방 언론들이 장제스의 쿠데타 사실을 폭로하자 ‘국민당과의 혁명적 동맹을 깨뜨리려는 음모’라고 비난했다. 코민테른의 대표로 중국에 온 스탈린의 수족 미하일 보로딘은 공산당이 ‘초좌파적 활동’으로 장제스의 심기를 건드린 것이 문제라며, 장제스의 요구대로 소련 고문단을 본국 송환하고 중국공산당원 명단을 국민당에 제출했다.

1920년대는 중국 자본가들에게 황금기였다. 전후 소비재 소비가 늘면서 이윤이 크게 증가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노동자 투쟁이 폭발적으로 증가했고, 홍콩·광저우·상하이의 군벌은 이를 제압하지 못하고 있었다. 바로 그때 장제스가 나타나 노동자들을 짓밟았던 것이다. 불안하던 자본가와 지주들에게 장제스는 구원자처럼 보였다.

중산함 사건 이후 자본가와 지주들은 기가 살아서 조직폭력배나 무장단을 동원해 노동조합과 농민 단체를 공격했다. 중국공산당은 방어를 위해 소련 무기를 요청했지만, 보로딘은 이를 거부하면서 “지금은 공산당이 국민당에 머슴처럼 봉사해야 할 때”라고 말했다.

중산함 사건으로 국민당 내 주도권을 쥔 우파 장제스는 지역 군벌들을 제압하고 국가를 통일하고자 북쪽 군벌을 정벌하는 북벌을 추진했다. 군벌을 제거하면 지주제가 폐지될 것이라고 기대한 농민들은 장제스의 북벌을 환영했고, 덕분에 장제스 군대는 파죽지세로 북상했다. 노동자와 농민의 혁명적 운동 덕분에 반제국주의와 군벌 제거의 과제를 어느 정도 해결할 수 있었다.

상하이 노동자 혁명

노동자 투쟁은 1925~26년 홍콩과 광저우에서 다시 상하이로 옮아가면서 고양됐다. 1927년 2월 19일 중국공산당이 이끄는 상하이총공회는 장제스 군대의 진격을 기다리면서 노동자 35만 명이 참가하는 총파업에 돌입했다. 노동자들은 “장제스와 북벌군을 지지한다”, “군벌 쑨촨팡을 타도하자!” 등의 구호를 외쳤다.

그러나 장제스 군대는 상하이로 진격하지 않았고, 그러는 동안 상하이 주둔군 사령관 리바오장과 외국 조계 경찰들 그리고 두웨셩 같은 깡패들이 파업 노동자들을 공격했다. 거리에서 전단을 뿌리던 학생과 파업 노동자들을 그 자리에서 참수하거나 총살했다. 그리고는 참수된 희생자의 머리를 전신주 꼭대기에 매달아 전시하거나 큰 소반 위에 올려놓고 거리를 돌아다녔다. 리바오장의 학살로 파업 투쟁은 패배했다.

그러나 상하이 노동자들은 한 달 뒤인 3월 21일 다시 투쟁에 돌입했다. 이번에는 50~80만 명이 파업에 참가했다. 봉기 계획이 신중하게 결정됐고, 훈련된 5천 명의 규찰대가 봉기의 선두에 섰다. 당일 오후 2시가 되자 기차역과 경찰서 등 상하이 주요 시설들이 봉기 노동자들의 수중에 들어왔다. 다음 날 상하이 북역에 백기가 나부꼈고 상하이 지역 대부분을 파업 노동자들이 장악했다.

장제스는 며칠이 지난 3월 26일이 되어서야 상하이에 들어왔다. 상하이의 자본가들은 파업과 봉기를 일으킨 노동자들의 위력을 봤고, 장제스의 군대만이 대중운동을 분쇄할 수 있다고 봤다.

그러나 상하이 노동자 50만 명이 봉기에 참여하면서 무장했고, 수천 명의 노동자 규찰대가 도시를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장제스 군대 3천여 명으로는 노동자들을 당장 분쇄할 수 없었다. 더구나 장제스 군대의 일부는 봉기를 일으킨 노동자들에게 호의적인 태도를 보이기까지 했다.

자본가 단체인 상공회의 대표들은 장제스 주변에 모여들어 거액의 지지금을 제공하며 서서히 움직였다. 장제스는 상공연합회 같은 온건 노동조합 연합체를 구성해 상하이총공회에 맞서게 했고 비밀리에 두웨셩 같은 깡패들을 동원해 노동조합을 공격했다.

그러나 중국공산당은 이런 상황에 아무 대비가 없었다. 당시 코민테른을 이끌던 부하린과 스탈린은 중국 혁명은 ‘자본가 계급이 이끌고, 민족자본가-노동자-농민-학생 4자 연합에 의해 수행되는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이라고 봤다. 그래서 장제스의 군대를 혁명군으로 여겼고, 장제스의 상하이 입성이 중국 혁명의 새 국면을 열었다고 봤다.

스탈린은 장제스가 쿠데타를 일으키기 일주일 전에 이렇게 말했다. “장제스는 규율에 복종하고 있습니다. 국민당은 우파와 좌파 그리고 공산당의 연합이자, 일종의 혁명적 의회입니다. 장제스가 왜 쿠데타를 일으키겠습니까? 우리가 다수를 차지하고 있고, 우파가 우리를 따르는 상황에서, 왜 우파를 내쳐야 합니까?"

그러면서 코민테른과 소련공산당은 중국 노동자들을 무장 해제시켰다. 봉기에 참여한 노동자들을 설득해 무기를 장제스에게 넘겨주거나 무기를 숨겨서 불필요한 충돌이 벌어지지 않도록 하라고 중국공산당에 지시했다.

중국공산당과 그들이 지도하는 상하이총공회는 장제스, 은행가, 산업 및 상업 자본가들과의 연합에 사활을 걸었고, 그들과 협력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성취할 수 없다고 여겼다. 이것은 봉기에 참가한 노동자들의 손발을 묶는 행위였다. 심지어 4월 4일에는 총공회가 파업을 자제하는 일련의 규약을 발표하기도 했다.

무장한 노동자들이 상하이를 실질적으로 장악하고 있었음에도 중국공산당은 계급연합 전략을 추진하면서 노동계급의 주도권을 완전히 포기한 것이다.

장제스의 반혁명과 쓰디쓴 교훈

1927년 4월 12일 새벽 4시, 장제스의 쿠데타가 시작됐다. 일부 지역에선 노동자들의 저항이 있었지만 금세 쿠데타군에 의해 제압됐고, 규찰대와 지지자들은 그 자리에서 총살당했다. 하루 동안만 수백 명이 살해됐다.

중국공산당은 노동자들의 저항을 호소했고, 쿠데타 다음 날인 4월 13일에 노동자 10만 명이 파업에 들어갔다. 그러나 상하이에서의 세력 관계를 역전시킬 수는 없었다.

그럼에도 중국 노동자 투쟁이 완전히 무너진 것은 아니었다. 장제스의 쿠데타로 상하이 운동은 일격을 당했지만, 혁명적 분위기가 중국 전역으로 확산되고 있었다. 주요 도시들의 노동자 조직들은 파괴되지 않았고, 농민 투쟁도 계속되고 있었다.

그러나 코민테른과 그 지시하의 중국공산당은 상하이에서 실패한 전략을 돌아보기는커녕 우한에서 그대로 되풀이했다. 스탈린은 우한의 국민당 좌파 정부가 혁명의 중심이 됐다고 선언했고, 노동자와 농민이 군벌과 제국주의에 맞서 이 정부를 지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국민당 좌파 정부의 수장 왕징웨이는 공산당을 배신하고 7월에 장제스와 제휴했다. 스탈린은 중국공산당을 또 다른 부르주아 정당인 국민당 좌파에 종속시킴으로써, 또 노동계급의 이익을 민족적 단결이라는 신화에 종속시킴으로써, 중국 혁명을 전진시킬 절호의 기회를 내버린 것이다.

당시에 트로츠키는 중국공산당이 국민당 좌파에게서 독립하고, 그들 자신의 무기와 조직과 힘에 의존해야 하며, 국민당 좌파가 아니라 농민과 연대해 혁명적 열기를 모아 소비에트 건설로 나아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중국 노동계급이 반제국주의 과제와 자기 고유의 이익을 결합해 사회주의 혁명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그러나 스탈린은 트로츠키의 주장이 노동자 대중에게 알려지지 못하게 가로막았다. 코민테른과 스탈린, 중국공산당의 과오는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그들은 광저우·상하이·우한에서 기회주의와 타협주의로 입은 손상을 일거에 만회할 심산으로, 이번에는 정반대의 모험주의로 나아갔다. 1927년 하반기에 준비도 되지 않은 추수 봉기와 광저우 봉기를 일으킨 것이다.

광저우의 노동조합 연합체는 1926년에만 해도 20만 명을 거느린 강력한 조직이었다. 그러나 장제스의 중산함 사건으로 타격을 입은 뒤로 노동자들은 수동적 방관자로 남아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공산당이 일으킨 광저우 봉기는 노동자들의 눈에 ‘갑작스럽고 돌발적인 사건’에 지나지 않았다.

광저우 봉기를 주도한 코민테른 파견자는 이 봉기가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고 나중에 실토했다. 그런데도 코민테른과 소련공산당 지도자 스탈린과 부하린은 중국 혁명에서 자신들이 저지른 과오를 덮고 트로츠키의 통합반대파 세력을 제압하기 위해 봉기를 일으켰다. 소련 내에서 자신의 지위를 강화하려고 중국 혁명을 장기판의 졸처럼 이용한 것이다.

중국은 1925~27년 혁명을 통해 제2의 러시아가 될 수 있었다. 중국 노동자들은 그런 잠재력을 보여 줬다. 그러나 스탈린과 부하린의 과오 때문에 중국 혁명은 패배하고 노동자들은 학살당했다. 부르주아 혁명을 거친 다음에야 사회주의 혁명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단계론, 노동계급의 독립성을 내버리고 자본가 계급에 종속시킨 계급 연합, 준비되지 않은 봉기를 일으켜 남아 있던 공산당 조직과 지지자들을 궤멸시킨 모험주의 등이 그것이다.

[이 글에 이어서 중국 혁명에 관한 트로츠키의 평가, 그로부터 우리가 배워야 할 교훈을 다룰 예정이다.]

[노동자연대 온라인 토론회 기획 시리즈]

당신이 알아야 할 현대 중국의 모든 것 – 마르크스주의 관점

중국과 관련된 굵직한 사건들이 며칠이 멀다 하고 벌어집니다. 홍콩 항쟁, 미·중 무역전쟁, 위구르 탄압, 중국 학생 시위, 그리고 최근 대만해협 위기까지. 10월 중하순에는 시진핑 3연임이 예고되고 있죠. 이런 사건을 접할 때마다 어떻게 봐야 하나 고민인가요? 노동자연대TV는 이런 분들을 위해 현대 중국의 역사적 사건과 쟁점, 그리고 중국 사회 성격을 살펴보는 시리즈 토론회를 기획했습니다. 세계가 격동에 접어든 지금, 사회 변혁을 바라는 사람들에게 중국을 어떻게 볼 것인가는 점점 더 중요한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중국 문제를 바라보는 마르크스주의 관점을 갖고 싶다면, 지금 시리즈 토론회를 신청하세요.

발제자: 이정구 (마르크스주의 관점에서 중국 문제를 탐구해 온 전 한신대 강사, 중국 경제 전공자)

– 자세한 내용 보기: https://ws.or.kr/p/27886

– 문의: 02-2271-2395, 010-4909-2026(문자 가능), wsorg@ws.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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