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기사는 9월 22일 노동자연대 온라인 토론회의 발제문이다. 이 토론은 시리즈 토론회인 ‘당신이 알아야 할 현대 중국의 모든 것 – 마르크스주의 관점’의 두 번째 시간이었다.


이 글에서는 트로츠키가 1925~27년 중국 혁명에 관해 뭐라고 주장했는지, 그것이 후대 사회주의자들에게 어떤 교훈을 주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트로츠키는 중국 혁명 당시 코민테른을 지도한 스탈린이나 부하린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입장이었다. 핵심 쟁점은 중국 혁명의 성격은 무엇이고 어떤 세력이 이끌어야 하는가, 그에 비춰 중국공산당은 국민당과 어떤 관계를 맺어야 하는가였다. 이 차이는 중국 혁명의 결정적 국면에서 어떤 전략과 전술을 채택해야 하는지를 두고도 차이를 낳았다.

코민테른과 1차 국공합작

중국 혁명은 신생 노동자 국가였던 러시아의 사회주의자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러시아의 혁명가 빅토르 세르주는 “중국 혁명은 우리 모두를 깜짝 놀라게 했다. 나는 소비에트 세계 전체를 들어올리는 듯한 긍정적인 열정에 큰 감명을 받았다” 하고 말했다.

당시 세계 공산주의 운동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던 코민테른과 소련공산당은 중국공산당이 창당할 때부터 적극 관여했다. 1920년대 초반에 코민테른은 그레고리 보이틴스키와 헨드리퀴스 마링(네덜란드인으로 본명은 스니블릿)을 중국에 보내 중국공산당의 창당과 활동을 도왔다.

마링은 1921년 중국에 와서 홍콩의 선원 노동자 파업을 보고 큰 감명을 받았고, 그 투쟁 지도부가 국민당 지지자라는 것을 알게 됐다. 마링은 1921년 12월에 국민당 지도자 쑨원을 만나 국공합작에 대해 처음 논의했다.

그 뒤 마링은 코민테른의 식민지문제위원회에 ‘국공합작’ 정책을 제안했다. 마링은 “국민당은 노동자 계급과 연계를 가지고 선원 파업을 지도했고, 많은 선원들이 국민당에 가입했[다]”며, “국민당은 노동자 정당”이기에 “공산당원들은 국민당 안에서 정치 활동을 해야 한다” 하고 주장했다. 코민테른 지도부는 이 보고에 기초해 국공합작 정책에 동의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마링은 1922년 8월 중국공산당 2차 당대회에서 코민테른의 권위를 이용하고서야 가까스로 국공합작에 대한 동의를 이끌어 냈다. 당시 천두슈 등 중국공산당 지도부가 국공합작에 강하게 반대했기 때문이다.

1923년 3월 소련을 대표한 아돌프 요페와 국민당 지도자 쑨원의 공동선언이 발표되며 1차 국공합작이 공식 시작됐다. 그 내용은 공산당원들이 국민당에 개인 자격으로 입당하고 국민당의 당규를 따른다는 것이었다. 소련은 국민당을 위해 황포군관학교를 지어 주고 재정 지원을 해 주고 군사 고문을 파견했다.

1924년 황포군관학교 입학식. 가운데 인물이 국민당 지도자 쑨원(1866~1925), 그 오른쪽에 군복 입고 차렷한 이가 장제스다

코민테른 집행위원회는 “중국공산당이 독립적 조직을 유지해야 한다”는 결의안도 채택했다. 그러나 이것은 개인 자격으로 국민당에 입당한다는 것과 모순이었고, 그 뒤 실천을 보면 이 결의안은 공문구였다.

당시 트로츠키는 소련공산당 정치국 안에서 홀로 국공합작에 반대했다. 나중에 트로츠키 자신이 동료인 맥스 샥트먼에게 보낸 편지에 그렇게 썼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트로츠키는 중국공산당 지도자 천두슈가 처음부터 국민당 입당에 반대했고 그 뒤 결정적 시기마다 국민당에서 나와야 한다고 코민테른에 호소했음을 알지 못했다. 스탈린과 부하린이 그 사실을 비밀에 부쳤기 때문이다.

중국공산당을 국민당에 예속시킨 스탈린과 부하린

당시 역사를 돌이켜 보면, 노동자 투쟁이 절정을 향해 가던 1925년 5·30 운동 이후에는 중국공산당이 국공합작을 중단하고 국민당에서 나와 독자적으로 활동해야 했다. 당시 홍콩에서 소비에트라고 할 만한 기구가 등장하고 이중권력 상황이 펼쳐졌기 때문이다.

이 기회를 놓쳤더라도 중국공산당은 장제스가 쿠데타를 시도한 1926년 3월 중산함 사건 뒤에는 반드시 국민당에서 나와야 했다. 이 사건은 장제스와 국민당이 대표한 중국 자본가 계급의 이해관계와 중국 노동자·농민의 이해관계가 충돌한다는 것과 함께, 장제스가 노동자 투쟁을 짓밟기 위해 무슨 짓까지 할 수 있는지를 분명하게 보여 줬기 때문이다.

1925년 5·30 운동으로 노동자 투쟁이 크게 고조됐지만, 중국공산당은 국공합작에 계속 매여 있었다

그러나 스탈린과 부하린은 중국공산당이 계속 국공합작에 매여 있도록 했다. 심지어 중산함 사건 직전에 코민테른은 국민당을 준회원으로, 장제스를 명예회원으로 받아들였다.

당시 트로츠키는 소련공산당 정치국 내에서 이 결정에 반대한 유일한 인물이었다. 트로츠키는 장제스가 중국 노동운동을 궤멸시킬 것이라고 경고하면서, “장제스는 사형집행인의 역할을 맡기 전에 세계 공산주의의 보호막이 필요했고, 마침내 그것을 얻는 데 성공했다” 하고 지적했다.

스탈린과 부하린은 중국이 제국주의에 의해 민족 억압을 받고 있기 때문에 계급을 뛰어넘어 민족적 단결을 이뤄야 하고 중국공산당이 그에 복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중국에서 일어날 혁명은 부르주아 혁명일 것이기에 자본가와 국민당이 이 혁명을 지도해야 하고, 중국공산당은 국민당과의 단결을 무엇보다 우선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스탈린과 부하린은 자신들이 레닌의 1905년 입장을 계승했다고 했지만, 사실 그것은 멘셰비키의 입장이었다. 멘셰비키는 러시아 혁명을 부르주아지가 주도해야 한다면서 부르주아지와의 동맹을 추구했다.

반면, 1905년에 레닌은 러시아에서 일어날 혁명의 성격을 부르주아 혁명이라고 보기는 했지만, 부르주아지와 동맹을 맺는다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노동계급이 혁명을 이끌어야만 하고, 그러면 부르주아지와 충돌할 수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트로츠키의 비판

트로츠키는 제국주의의 지배를 받는 중국에서는 계급투쟁을 자제해야 한다는 스탈린과 부하린의 주장을 정면 비판했다. 제국주의의 압력은 중국 내의 계급투쟁을 약화시키기는커녕 더 첨예하게 만들 것이라고 주장했다.

“제국주의에 맞선 혁명적 투쟁은 계급들 사이의 정치적 차이를 … 오히려 강화시킨다. 제국주의는 중국 내 사회관계들에 매우 강력한 힘을 미친다. 그 힘의 주요 원천은 … 외국 자본과 토박이 부르주아의 경제적·정치적 유대이다. … 차별당하고 착취당하는 대중이 자기 발로 서려 할 때마다 민족 부르주아는 제국주의자들의 품에 안기고야 말 것이다.”

1920년대 중국 자본가들은 강대국들과 무역을 하며 성장한 상인들이었고, 지주 계급 출신이거나 그렇지 않더라도 지주들과 끈끈한 관계였다. 트로츠키는 농민을 지도하는 노동자 계급이 제국주의와 타협하는 자본가들을 분쇄할 때에만 반제국주의 과제를 성취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트로츠키의 주장은 비극적으로 입증됐다. 장제스가 쿠데타를 일으켜 1927년 3월 상하이에서 일어난 노동자 혁명을 분쇄한 것이다. 국민당은 대중운동을 자기들 이익을 위해 이용하고 나서 파괴한 것이다. 그럴 수 있었던 것은 코민테른 덕분에, 급성장하는 중국공산당을 국민당에 예속시킬 수 있었기 때문이다. 중국 노동자들은 국민당에 저항하지 못하게 손발이 묶인 셈이었다.

장제스가 쿠데타를 일으키기 직전에 트로츠키는 장제스의 쿠데타를 경고하고 이에 대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소련공산당 정치국에 제안서를 보내 중국에서 봉기한 노동자와 농민이 소비에트를 조직한다면 장제스의 쿠데타로부터 혁명을 구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얼마 뒤 트로츠키의 경고대로 장제스가 쿠데타를 일으켰고, 중국공산당원들과 노동자들을 대량 학살했다. 그런데도 스탈린과 부하린은 생각을 바꾸지 않았다. 그들은 이번에는 중국공산당에게 국민당 좌파인 왕징웨이를 지지하라고 지시했다. 이 정책도 3개월 뒤인 1927년 7월 왕징웨이의 배신으로 또다시 비극적 결말을 맞이했다.

1926년 광저우, 1927년 상하이와 우한에서 겪은 세 번의 패배로 중국 혁명은 큰 타격을 입었지만, 아직 가능성은 남아 있었다. 트로츠키는 혁명 세력이 장제스의 독재와 무능을 폭로하고, 언론·출판·결사의 자유 같은 민주주의 쟁점을 내걸고 지지 세력을 넓혀서 다음 기회를 노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스탈린과 부하린은 자신들의 오류로 인한 패배를 은폐하려고 중국공산당에 준비되지 않은 무장봉기를 일으키게 했다. 그 결과 봉기는 패배했고 혁명의 힘은 완전히 소진됐다.

스탈린(좌, 1878~1953)과 부하린(우, 1888~1938)

스탈린과 부하린이 왜 중국공산당을 국민당에 예속시키고 중국 혁명을 재앙으로 이끌었는지를 알려면, 1920년대 초반 국제 혁명 운동과 소련 내 상황을 간단하게나마 살펴봐야 한다. 1923년 독일혁명의 패배는 러시아 혁명의 운명에 큰 영향을 미쳤다. 세계 자본주의 체제의 엄청난 경제적·군사적 압력이 소련에 가해졌고, 소련 관료들은 ‘헛되이’ 국제 혁명을 추구하기보다 ‘일국사회주의’를 방어하고 발전시키는 것에 관심을 갖게 됐다.

1924년 무렵 코민테른은 국제 혁명에 대한 관심이 아니라 소련을 방위하는 외교정책에 종속돼 그 명령을 충실히 따르는 도구로 변질됐다. 당시 소련 지도자들이 작고 미약한 영국공산당보다는 영국노총(TUC)이 소련 방어를 위해 힘쓸 수 있는 실세라고 여기며 ‘영·소 위원회’를 만든 것이나, 중국공산당을 국민당에 예속시키고 국민당의 환심을 사려 했던 것은 모두 이와 같은 소련 관료의 이해관계를 반영하고 있었다. 또한 스탈린과 부하린은 중국에서 부르주아 혁명이 성공한다면 트로츠키의 좌익반대파를 제압하고 당내 주도권을 쥘 수 있다고 봤다.

이런 재앙적인 정책으로 노동계급 기반을 완전히 잃은 뒤에 중국공산당이 택한 노선이 바로 마오쩌둥주의였다. 마오쩌둥은 생산에 기반을 두지 않은 게릴라를 이끌고 중국 서북부 지역인 옌안에 둥지를 틀고 있다가 국민당과의 내전에서 승리하면서 도시를 장악하고 중화인민공화국을 세웠다. 그러나 1949년 혁명으로 수립된 것은 노동자 권력이 아니라 국가자본주의 체제였다.

중국 혁명과 연속혁명론

트로츠키는 중국 혁명에 관심을 기울이고 중국 혁명을 평가하는 많은 글을 써 후대 사회주의자들에게 귀중한 교훈을 남겼다.

그러나 1927년 상하이 노동자 무장봉기 직전까지는 트로츠키는 중국에 대한 글을 별로 쓰지 않았다. 하나는 1925년 5·30 운동을 다룬 짤막한 글이고, 다른 하나는 소련공산당 정치국에 제출한 보고서로 “중국과 일본에 대한 우리 당의 문제들”이라는 글이다. 마지막으로 1926년 9월에 라데크에게 보낸 편지가 있는데, 이 글에서야 비로소 중국 혁명에 대한 분석이 나온다.

중국공산당 창당부터 노동자 혁명이 꽤 전개된 시기까지 공백이 있었던 것이다. 몇 가지 이유가 있었다. 우선, 트로츠키가 내전 기간에 전쟁 담당 장관으로서 러시아 전역을 돌아다니며 백군과 싸우느라 바빴던 것이 한 이유일 것이다. 또, 중국 상황에 관한 정보 제한 같은 스탈린의 방해도 있었다.

트로츠키(1879~1940)는 중국 혁명을 평가하며 후대 혁명가들을 위한 귀중한 교훈을 남겼다

그러나 트로츠키 자신의 문제도 있었다. 그는 1924년 말부터 1926년 6월까지 정치 활동을 거의 하지 않았다. 또, 트로츠키가 좌익반대파를 이끌며 부하린-스탈린과 맞설 때, 또 지노비예프-카메네프와 제휴해 통합반대파를 만들었을 때, 자기 진영 인물들에 타협을 많이 한 것도 공백의 또 다른 이유였다.

예를 들어, 국공합작을 처음 추진한 마링, 쑨원과 함께 국공합작을 선포한 아돌프 요페는 좌익반대파 성원이었다. 또 다른 좌익반대파 성원인 카를 라데크는 1922년 코민테른 4차 대회에서 중국공산당 지도자 천두슈가 국민당 입당에 반대한 것을 강하게 비판했고, 1927년 3월까지도 이 입장을 고수했다. 지노비예프는 1926년 5월까지 코민테른 의장을 지내면서 중국에 대한 잘못된 정책을 추진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제약 속에서도 트로츠키는 중국 혁명의 고비마다 정세를 정확히 파악하고 중국공산당이 나아갈 방향을 올바로 지적했다.

1926년 9월 이후에 트로츠키의 분석대로 중국공산당의 정책을 바로잡을 수 있었다면, 또 1927년 4월 장제스의 쿠데타 이후에라도 중국공산당이 국민당 좌파에 종속되지 않고 독립적으로 투쟁을 조직했더라면, 상황은 완전히 다르게 전개됐을 것이다.

중국 혁명이 참혹하게 패배하고 그것이 세계 혁명 운동에 미친 악영향을 생각하면, 트로츠키의 제안이 현실에 적용되지 못한 것이 너무 안타깝다.

그럼에도 트로츠키가 중국 혁명을 평가하며 남긴 글들은 중국 혁명가들에게 영향을 미쳐 1930년대 초반 중국에서 트로츠키주의 조직을 건설하는 데 큰 도움을 줬다.

트로츠키는 중국 혁명을 평가하며 연속혁명 이론을 발전시켰다. 이를 통해 후대의 혁명가들을 위한 귀중한 교훈을 남겨 줬다. 그 핵심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후진국의 부르주아지는 봉건제와 제국주의에 맞서 민주적·혁명적 해결책을 일관되게 제공할 수 없다. 둘째, 그 혁명을 이끌 결정적인 구실은 인구에서 소수일지라도 노동자 계급의 몫이다. 셋째, 농민은 독자적 권력을 세울 수 없고 결국 노동자 계급의 지도를 따를 것이다. 넷째, 노동자 계급이 이끄는 민주주의 혁명은 즉시 사회주의 혁명으로 성장·전화할 것이다. 다섯째, 사회주의 혁명은 한 나라에서 시작할지라도 전 세계 차원에서 완수될 것이다.

트로츠키는 연속혁명 이론의 관점에서 중국 혁명을 분석한 중요한 글들도 여럿 남겼다. 《레닌 이후의 제3인터내셔널》 3장에 실린 “중국 혁명의 개괄과 전망”이 그중 하나다.

그런데 1949년에 일어난 중국 혁명은 트로츠키의 주장을 전면 부정하는 듯했다. 당시 노동자들은 민족해방혁명을 이끌기는커녕 주변적 구실만 했다. 그러나 1949년 중국 혁명은 공산당이 이끌었지만 사회주의 혁명이 아니었고, 이 혁명을 통해 수립된 것은 국가자본주의 체제였다.

중국 혁명을 거치면서 트로츠키가 일반화한 연속혁명 이론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의미가 크다. 두 가지를 강조하고자 한다. 먼저, 선진국뿐 아니라 후진국에서도 노동자 계급이 사회 변혁을 이룰 유일한 집단이라는 점이다. 물론 이것은 자동적이지 않다. 노동자들이 혁명적 투쟁을 지도할 수 있는 독립적인 정치세력으로 발전하는 것이 중요하다. 다른 하나는 국제주의이다. 자본주의는 국제적 체제이므로 일국의 발전과 투쟁을 세계적 차원에서 이해해야 하고, 어떤 혁명이든 살아남으려면 세계로 확산돼야 한다는 것이다. 트로츠키의 유산을 적용하는 몫은 우리에게 있을 것이다.

※ 공공도서관 또는 대학 도서관에서 구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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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제자: 이정구 (부산대학교 중국연구소 객원연구원, 중국 경제 전공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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