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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2년 10월 쿠바 미사일 위기:
미국과 러시아가 핵전쟁 문턱까지 갔을 때

우크라이나 전쟁이 1962년 10월 쿠바 미사일 위기 이후 최악의 핵전쟁 위기 상황에 직면해 있다.

러시아 대통령 푸틴은 핵무기를 포함해 “모든 수단을 사용”할 것이라고 선언했고, 이는 “허풍이 아니”라고 덧붙였다.

미국 대통령 바이든은 “냉전 시대 쿠바 미사일 위기 이후 어느 때보다 세계가 ‘아마겟돈’에 가까워졌다”고 말했다. 우크라이나 대통령 젤렌스키는 푸틴이 핵무기 공격을 해도 러시아에 굴복하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이런 상황은 인류 역사에서 가장 절체절명의 순간을 맞이했던 쿠바 미사일 위기와 많이 닮았다. 그러나 매우 중요한 차이가 있다. 쿠바 미사일 위기는 핵전쟁 직전에 해결된 반면, 우크라이나 전쟁은 그 결말을 알 수 없다는 점이다.

쿠바는 어떻게 냉전의 최전선이 됐나?

1962년 10월 16∼28일은 냉전 질서가 핵전쟁의 문턱에 가장 가까이 다가선 시간이었다.

쿠바 미사일 위기는 옛 소련(이하 러시아)이 1962년 미국 플로리다주에서 불과 200여 킬로미터 떨어진 쿠바에 미사일 기지를 건설하면서 촉발됐다.

1958년 미국은 중거리 핵 미사일 주피터를 튀르키예(터키)와 이탈리아에 배치하기로 결정했다. 반면, 러시아는 미국 본토를 사거리에 두는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개발을 완성하지 못해 위기감을 느끼고 있었다.

1959년 피델 카스트로가 쿠바 혁명을 일으켜 집권했다. 소련공산당 서기장 니키타 흐루쇼프는 쿠바의 전략적 가치에 주목해 미사일 기지를 설치하기로 결정했다. 그리 되면 러시아도 미국 도시들에 대해 동등한 타격 능력을 가지게 될 것이다.

카스트로와 체 게바라도 러시아제 미사일을 미국에 대한 억지 수단으로 보고 환영했다. 이제 쿠바는 카리브해의 조그만 섬에서 냉전의 최전선으로 바뀌었다.

1962년 10월 15일 미군 정찰기 U-2가 쿠바 상공에서 찍어 온 사진에 미국 동부 지역을 타격할 수 있는 러시아의 지대지미사일이 포착됐다.

소련이 쿠바 기지에 배치하려던 준중거리 미사일

미사일 위기에 대응하는 백악관의 모습은 심사숙고나 합리적 의사결정과는 거리가 멀었고 혼란에 가까웠다. 미국 대통령 존 F. 케네디는 흐루쇼프를 “빌어먹을 거짓말쟁이,” “비열한 깡패”라고 부르며 길길이 날뛰었다. 그러고는 미사일 기지에 대한 국부 공습과 쿠바 전면 공습이라는 두 가지 선택지를 떠올렸다.(세르히 플로히, 《핵전쟁 위기 - 쿠바 미사일 위기의 교훈》, 삼인, 2022)

미국 전함들이 쿠바로 가는 러시아 함정의 항행을 저지하기 위해 쿠바 주변 해역을 봉쇄했다. 대륙간탄도미사일 부대들, 미사일 탑재 잠수함들, 1400대의 폭격기들이 비상 대기했다. 핵무기를 서너 개씩 탑재한 폭격기 수십 대가 상공에 대기하면서 명령이 하달되는 즉시 러시아 영토 내 목표물로 날아갈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또, 미국은 플로리다에 제2차세계대전 종전 이후 최대 규모의 침략군을 집결시켰다. 침략군은 4만 명의 해병대를 포함해 병력 10만 명, 함정 90척, 68개 비행 중대, 항공모함 8척으로 구성돼 있었다.

케네디 정부는 자국의 영향권에 무단 침입한 세력에 경고하기 위해 쿠바를 기꺼이 침몰시키고자 했다.

미국과 소련이 금방이라도 핵전쟁을 벌일 듯했다. 전 세계의 수많은 사람들이 핵 아마겟돈의 공포에 떨었다.

노동자들은 다시는 일터에 나가지 못할 거라고 걱정하며 일과를 시작했다. 교실 책상에 앉아 있는 어린 학생들을 두고 교사들은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두 국가의 충돌 시간을 쟀다. 미국의 학교와 가정에서는 대피 훈련과 방공호를 파는 작업이 실시됐다.

실제로 미국 정부는 쿠바의 핵미사일을 제거하기 위해 핵전쟁을 무릅쓸 용의가 있었다.

케네디가 소집한 국가안보회의 집행위원회(엑스콤) 회의의 비밀 녹음 테이프를 푼 《존 F. 케네디의 13일》(셀던 M. 스턴, 모던타임스, 2013)을 보면, 세계 최강대국 정부가 정말로 러시아를 상대로 핵전쟁을 감수할 용의가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존 F. 케네디 대통령의 동생인 로버트 케네디 당시 법무장관의 회고도 그때 인류가 핵전쟁의 위험에 얼마나 근접해 있었는지를 보여 준다.

“러시아가 쿠바를 위해 전쟁까지 벌이겠다고 한다면 그것은 곧 핵전쟁도 감수하겠다는 뜻일 것이므로, 어차피 그들과 결판을 내야 한다면 반년 뒤에 하느니 지금 하는 것이 낫다는 게 우리 전부의 생각이었다.”

쿠바 미사일 위기를 풍자한 그림

케네디와 카스트로

케네디 정부의 입장에서 쿠바는 감정을 자극하는 문제였다. 1959년 카스트로가 혁명을 일으켰을 때까지 이 섬은 미국의 위성국이었다.

케네디가 1961년 대통령에 취임한 뒤 내린 최초의 결정이 미수에 그친 피그스만 침공 승인이었다. 그 뒤 케네디는 ‘몽구스’ 작전(CIA의 비밀 암살 작전)을 승인했지만 또다시 카스트로 제거에 실패했다. 이 실패들로 인해 케네디는 카스트로를 극도로 증오하게 됐고, 카스트로 전복에 병적으로 집착했다.

그러나 쿠바에 대한 케네디의 집착은 더 큰 고민거리, 즉 미국의 세계 패권이 약화될 수 있다는 우려와 연결돼 있었다.

엑스콤(국가안보회의 집행위원회) 회의에서 케네디와 그의 참모들은 라틴 아메리카의 또 다른 정부가 몰락할 위험이 없는지 거듭 논의했다.

무엇보다, 그들은 유럽에 대한 미국의 영향력 문제를 집중 논의했다. 특히, 러시아가 쿠바 미사일 배치를 통해 새롭게 형성될 세계적 세력 균형을 이용해 독일에 대한 미국의 영향력을 위협할까 봐 크게 걱정했다.

러시아 미사일이 쿠바에 배치되면 동유럽의 러시아 군대에 미국이 핵 위협으로 대응하는 것이 어려워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 되면 미국의 세계적 영향력이 크게 손상될 것이다.

이런 위험에 어떻게 대처할지를 두고 엑스콤 회의에서 논쟁이 벌어졌다.

공군 참모총장 커티스 르메이 같은 자는 쿠바를 즉각 공습하고 전면 침공하는 것을 지지했다. 스티븐슨 아들라이 UN 대사 같은 자는 군사적 위협을 가해 소련이 미사일 철수 협상에 나오도록 압박하는 것을 선호했다.

케네디 형제는 두 입장 사이에서 결정을 내리지 못해, 일단 공습과 침공 계획을 추진하되 최종 결정은 며칠 미뤘다.

그러던 차에 10월 27일 쿠바 군대가 쿠바 상공에 있던 미군 정찰기 U-2를 지대공 미사일로 격추시켰다. 러시아가 쿠바에 배치된 미사일을 은폐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쿠바 미사일을 제거하기 위해 미국이 즉각 쿠바를 공격해야 한다는 압력은 더 커졌다.

문제는 쿠바에 배치된 러시아 미사일을 폭격기가 100퍼센트 제거한다는 보장이 없고, 폭격 과정에서 러시아 군인이 살상되면 흐루쇼프가 보복을 할 수 있다는 점이었다. 당시 쿠바에 배치된 러시아군은 무려 4만 3000명이었다.

“눈싸움”

다행히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미국 정부 내 비둘기파 때문이 아니었다. 흐루쇼프가 마지막 순간에 한 발 양보해 미사일 철수에 합의했기 때문이다. 흐루쇼프는 그 결정을 소련공산당 정치국에서 간신히 통과시켰다.

소련 선박과 미국 항공기가 대치하는 “눈싸움” 와중에 이 소식을 접한 미국 국무장관 딘 러스크는 “저쪽에서 먼저 눈을 깜박거린 것 같군”이라고 속삭였고, 케네디는 격침 명령을 취소했다.

이 결과를 두고 보통 케네디를 ‘승자,’ 흐루쇼프를 ‘패자’라고 부른다. 그러나 사실 양측 모두가 눈을 감았다. 흐루쇼프도 케네디에게서 쿠바 침공 금지와 튀르키예에 배치된 핵미사일 제거를 약속받았다.

흐루쇼프가 미사일을 철수한 것은 러시아 지도부가 미국과 러시아 사이에 성립된 기존의 세계 분할 구도에 도전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는 뜻이다.

1956년 헝가리 혁명 때 미국이 그 구도에 도전하지 않았듯이 말이다. 당시 헝가리 노동계급이 미국에 원조를 요청했지만 거절당했다. 미국 대통령 아이젠하워는 “우리는 무장 반란을 주장하거나 촉구한 적이 결코 없다”고 말했다. 미국 국무부는 이미 혁명 초기에 그 상황을 이용해 러시아의 이익을 해칠 의도가 전혀 없음을 확인하는 메시지를 크렘린궁에 전달했다.

쿠바 미사일 위기 이후 15년 동안 ‘데탕트’(긴장완화)가 냉전의 불안정을 완화했다.

그러나 ‘데탕트’ 동안에도 미국과 러시아는 계속해서 막대한 양의 핵무기를 비축했다. 결국 1980년대에 다양한 신무기들이 두 숙적 간의 오랜 세력 균형을 위협하면서 불안정이 재발했다(당시 용어로 신냉전).

교훈

쿠바 미사일 위기는 미국과 러시아의 지배자들이 인류의 생명을 얼마나 무시하고 냉소하는지를 보여 준다. 그들은 평화 협상과 인류애를 말하다가도 한순간에 돌변해 전쟁을 벌일 수 있다.

끔찍한 사실은 이 과정에서 인류가 "철의 장막"(동서 냉전의 경계) 양편에 의해 핵 인질로 잡혔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것이 과거지사가 아니라 또다시 맞닥뜨릴 위험일 수 있다.

철의 장막 한편의 핵무기가 다른 편의 핵무기에 비해 방어적이었다는 주장은 헛소리이다. 미국제 핵무기이든 러시아제 핵무기이든 둘 다 인류를 멸망시킬 대량 살상 무기일 뿐이다.

쿠바 미사일 위기는 핵무기를 제국주의에 맞선 투쟁에 이용할 수 있다는 생각도 잘못됐음을 보여 줬다. 쿠바는 핵 도박을 걸었지만, 그 결과는 어땠는가?

흐루쇼프와 러시아 관료들은 “경쟁적 공존”을 통한 세력 확장이 위험해지자 쿠바를 가뿐하게 차 버렸다. 러시아가 쿠바 한 나라를 위해 미국과 핵전쟁을 벌여 자국 도시들이 파괴될 위험을 무릅쓸 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쿠바 지도자들은 러시아의 미사일 철수 결정에 몹시 당황했다. 카스트로는 이렇게 말했다. “소련과 우리의 관계는 악화됐습니다. 이 일은 오랫동안 쿠바와 소련의 관계에 영향을 끼쳤습니다.”

체 게바라는 러시아의 제3세계 정책을 비판하며 쿠바를 떠나 콩고-자이르와 볼리비아에서 게릴라 투쟁을 하다 전사했다.

지금 우크라이나 전쟁은 핵 아마겟돈의 공포를 다시 불러일으키고 있다. 쿠바 미사일 위기에서 보듯, 지배자들은 경쟁국을 억지하기 위해 여차하면 핵 도발을 감행할 수 있다.

지배자들의 ‘이성’에 호소하는 것이 아니라, 핵무기를 만들어 내고 핵전쟁의 위협을 가하는 지배자들에 맞설 수 있는 아래로부터의 광범한 투쟁의 중요성에 주의를 집중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