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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오쩌둥과 문화혁명 ─ 신화와 진실

이 글은 같은 제목으로 10월 18일에 열린 노동자연대 온라인 토론회(영상 보기)의 발제문이다.

문화혁명 하면 홍위병들이 톈안먼 광장을 가득 메운 장면이나, ‘주자파’(자본주의를 추구하는 자들)로 몰린 사람에게 고깔 씌우고 비행기 태우는 장면 등을 떠올릴 것입니다. 중국 현대사에서 가장 유혈낭자했던 사건의 하나가 문화혁명일 것입니다. 적어도 수십만 명이 사망했습니다.

당시 대부분의 서구 좌파들은 마오쩌둥과 문화혁명에 환상을 가졌습니다. 예컨대 당시 프랑스의 철학자들인 루이 알튀세르나 알랭 바디우 같은 좌파들은 마오쩌둥주의자였고, 문화혁명을 찬양했습니다. 당시 미국과 긴장 완화를 추구하고 있던 소련 대신에 마오쩌둥과 문화혁명에서 사회주의의 미래를 찾으려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문화혁명은 혁명도 아니었고, 사회주의도 아니었습니다.

문화혁명의 배경과 시작

1949년 중국 혁명은 지주 제도를 폐지하고, 제국주의를 몰아내고, 국민 국가를 세운 민족해방 혁명이었습니다. 그래서 신중국 건국자들은 부국강병 국가를 만들고자 했습니다.

그런 비전 속에서 마오쩌둥은 1958년부터 1960년까지 ‘대약진운동’이라고 부른 엄격한 자립경제 정책을 시행했습니다.

그러나 실패로 끝났습니다.

그 결과로 마오는 실권을 잃고 경쟁자 류사오치가 대신 그 자리에 앉았습니다.

한편, 중국의 대對소련 관계가 1950년대 말부터 급격히 악화되고 있었습니다. 마오는 미국과 긴장 완화를 추구하기 시작한 소련을 ‘수정주의’라고 비난했습니다.

게다가 소련 흐루쇼프의 스탈린 격하 운동에 대항해 마오쩌둥은 이데올로기적 정통성을 강조해야 했습니다.

이 두 가지 이유, 즉 경제의 실패로 실권을 잃은 것과 소련과의 관계 악화라는 상황에 직면해 마오쩌둥은 이데올로기적·정치적 통제력을 되찾으려고 문화혁명을 시작했습니다.

실권을 잃어 국가 관료 내에서 기반이 약했던 마오는 1966년 문화 분야에서 권력 투쟁을 시작했습니다. 1966년 3월 마오쩌둥의 친위대장 격인 린뱌오 당시 국방장관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문예라는 이 진지는 무산 계급이 아직 점령하지 못하고 자본가 계급이 확실히 점령하고 있어 투쟁이 불가피하다.”

그리고 4월, 인민해방군 기관지 〈해방군보〉는 이런 제목의 사설을 실었습니다. “마오쩌둥 사상의 위대한 붉은 깃발을 높이 들고 사회주의 문화혁명에 적극 참가하자.” 이때 ‘문화혁명’이라는 용어가 처음 등장했습니다.

마오쩌둥은 당권파를 권좌에서 제거하기 위해 기층 대중을 동원했습니다. 바로 이들이 홍위병이었습니다.

홍위병의 시작은 베이징대학교 철학과 시간강사인 녜위안쯔 등 7인이 베이징대학교 총장과 당 위원회 그리고 베이징 시당 위원회를 ‘반당 분자’이자 ‘반동’이라고 비판하는 대자보를 붙이면서였습니다.

마오쩌둥은 이 대자보를 “20세기 60년대 중국에서의 ‘파리 코뮌 선언서’”라고 칭송했습니다. 포퓰리스트 데마고기에 따른 운동을 역사상 최초의 노동자 국가였던 파리 코뮌과 같은 반열에 올려놓은 것입니다.

1966년 7월 27일 마오는 “반란에는 이유가 있다”는 제목의 홍위병 대표단 성명서에 지지를 표명했습니다. 이에 고무된 홍위병들은 학교 당국과 주도적 국가 관료들에 맞서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이 젊은 홍위병들이 바로 문화혁명의 행동대 구실을 했습니다.

마오는 홍위병의 열기를 등에 업고 1966년 8월 5일, “사령부를 포격하라”라는 성명을 발표했습니다. ‘사령부’는 당권파를 뜻했습니다.

1966년의 마지막 몇 달 동안 수백만 명의 홍위병들이 마오의 초상화를 들고 마오 어록인 붉은 책자를 흔들며 도시의 거리를 돌아다녔습니다.

홍위병은 문화혁명의 처음 기치인 네 가지 구습(구사상, 구문화, 구풍속, 구관습) 타파를 넘어 당권파 자체로 공격을 확대했습니다. 마오 파가 아닌 당 관료와 정부 관리들은 체포되어 고깔모자를 쓰고 거리를 행진해야 했고, 일부는 대중 집회에서 자신의 ‘반혁명적’ 행위를 고백하고 각종 ‘비판투쟁대회’에 끌려가는 등 온갖 고초를 겪어야 했습니다.

1966년 말에 1200만 명의 홍위병들이 베이징에 상경해 집회를 열었고, 마오쩌둥은 이들을 환영했습니다. 이들은 소위 혁명 경험을 교환하기 위해 다시 방방곡곡으로 흩어졌고, 자본가나 지주 등 소위 성분이 좋지 않은 인물들을 조리돌림 했습니다.

대중 동원

왜 마오의 대중 동원에 많은 학생들이 홍위병을 자처하고 많은 노동자들도 이 대열에 합류했을까요?

1949년 부패한 구체제와 제국주의로부터 해방됐지만 노동자와 학생들의 현저한 조건 개선은 이뤄지지 않았습니다. 당과 국가의 관료 지배가 정착되면서 권력과 지위와 보상의 불평등이 오히려 확대됐을 뿐 아니라 심지어 대물림되는 상황이 됐습니다.

서방의 압력에 맞서야 한다는 이유로 노동자들은 혹심한 희생을 강요당했고, 중고등 학생들은 억압적인 학사행정과 반강제적인 정치학습 등에 불만이 커지고 있었습니다.

마오쩌둥이나 그 반대자들이나 모두 경제의 비전을 놓고는 별 차이가 없었습니다. 1960년대 초반 류사오치나 덩샤오핑 등의 당시 당권파는 자립경제 정책의 실패를 보완하기 위해 각 농가에 자유 시장을 부분적으로 허용하고 텃밭을 제공하는 등의 완화 조치들을 시행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노동계급을 착취하고 억압하는 국가자본주의 체제는 확고히 고수했습니다.

지방 권력 장악 투쟁과 내전

1967년 문화혁명은 새로운 단계로 나아갔습니다. 당 중앙은 홍위병 운동을 중단시키기 위해 갖은 노력을 다 기울였지만, 운동이 노동자들과 군 사병들에게로 확산된 것입니다. 이들은 지방, 성, 지구의 당과 행정기구로부터 ‘권력을 빼앗는’(脫權) 단계로 나아갔습니다.

마오의 대중 동원은 그 결과가 뜻밖으로 나타났습니다. 세 가지 상이한 유형을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마오를 지지하는 노동자 집단이 노동자 파업을 진압하고 지방 권력을 장악한 상하이 사례.

둘째, 지방 당 조직·군대의 후원을 받는 노동자 조직과 마오 지지 노동자 조직이 내전에 돌입한 우한의 사례.

셋째, 가장 선진적인 정치조직이었던 후난성의 성무련 사례입니다.

첫째 사례에 대해 얘기하겠습니다. 중국에서 제조업이 가장 발전한 지역의 하나인 상하이는 1956년에 노동자들이 총파업을 벌였던 곳이었습니다. 상하이에는 안정적인 숙련 노동자들이 있었지만 국영기업에 값싼 노동력을 제공했던 계약직과 임시직 노동자들도 많이 있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상하이 노동계급 내부의 처지와 요구가 서로 달랐고 가끔씩 충돌하는 경우도 있었는데, 이런 상황에서 문화혁명이 벌어졌습니다.

1966년 11월 방직공장의 젊은 노동자인 왕훙원(4인방 중 1인)이 자주적으로 등장한 상하이노동자혁명조반총사령부(약칭 노동자총사령부)를 지도해 상하이에서 당과 정부 조직을 와해시키고 그 지역을 통제하게 됩니다.

그런데 또 다른 노동자 조직인 상하이 ‘노동자 적위대’가 1966년 12월 31일 총파업을 선언했습니다. 이 파업으로 상하이가 마비되자, 마오의 측근인 장춘차오는 파업 노동자들에게 공장으로 돌아가라고 명령했습니다. 임금 인상을 요구하는 노동자들을 ‘경제주의’라고 공격하며 비정규직과 임시직 처우 개선 등의 요구를 묵살했습니다.

이듬해 1월 말 장춘차오는 보안경찰과 인민해방군을 동원해 파업 노동자들을 진압하고 상하이 시당 위원회를 장악했습니다. 파업 노동자들이 진압당한 뒤에야 ‘모든 권력을 인민공사(코뮌)에게로’라는 슬로건이 상하이에서 울려 퍼졌습니다. 이는 이른바 ‘인민공사(코뮌)의 성격이 무엇인지 잘 보여 줍니다.

상하이의 인민공사와 비슷한 조직이 다른 지역에서는 혁명위원회라는 이름으로 등장했지만 사정은 마찬가지였습니다. 마오쩌둥 파가 당권파를 몰아내고 쟁의 참가 노동자들을 진압하면서 등장한 것이 인민공사이자 혁명위원회였던 것입니다.

둘째 사례에 대해 얘기하겠습니다. 상하이에서는 파업이 벌어져 마오 세력에 의해 진압됐다면, 우한에서는 내전이 벌어졌습니다.

1967년 7월 우한에는 50만 명의 숙련 기술노동자들로 구성된 ‘백만웅사’(百萬雄師)가 지방 당 조직과 우한 군구 사령관 천짜이다오(陳再道)의 지지를 받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40만 명을 거느린 마오 지지 조직 우한 노동자총사령부가 지방의 당과 정부 권력을 빼앗으려 했습니다.

그러자 지방 당 조직과 군사령관 천짜이다오로부터 무기와 군대를 지원받은 백만웅사가 마오 지지 조직인 노동자총사령부를 포위하여 공격했습니다. 결국 중앙 정부는 많은 군대를 동원해서야 천짜이다오와 백만웅사를 진압할 수 있었습니다.

우한의 반란을 경험하고는 마오쩌둥은 내전이 전국적으로 확산될 수 있다는 두려움을 가지게 됐습니다. 그래서 1967년 하반기에 마오쩌둥은 홍위병과 문화혁명을 확산시키자는 분파를 단속하고 대중 운동과 지역의 권력 탈취 운동을 통제하기 위해 인민해방군을 동원했습니다.

셋째 사례에 대해 얘기하겠습니다. 문화혁명으로 동원되어 명멸한 대중운동과 조직들 중에는 매우 급진적이고 정교한 논리를 갖춘 정치 조직도 있었습니다. 후난성에 있었던 성무련(후난성무산계급혁명파대연합위원회)이 바로 그런 조직이었습니다.

성무련은 지역의 청년·학생들과 노동자들로 이뤄진 그룹으로, 당시 중국 사회가 사회주의이긴 하지만 저우언라이로 대표되는 관료 집단이 새로운 지배계급으로 부상했다고 보았습니다. 성무련은 ‘붉은 자본가 계급’인 관료가 옛 국가 기구를 장악하고 있을 뿐 아니라, 새로 등장한 혁명위원회의 권력까지도 탈취했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래서 성무련은 파리 코뮌의 대중 민주주의에 기초해 인민공사를 설립하자고 주장했습니다.

성무련의 급진적 성격 때문에 마오쩌둥은 이들을 ‘무정부주의자’, ‘트로츠키주의자’라고 비난했고 보안경찰과 군대를 통해 잔인하게 진압했습니다.

문화혁명의 분위기 속에서 등장한 대중 운동은 1968년 전반기에는 대부분 끝났습니다. 정적 제거와 실권 회복이라는 목적을 달성한 마오쩌둥이 보기에 홍위병은 더는 정치적 유용성이 없었습니다. 게다가 홍위병은 마오의 목적에서 더 나아가 당 조직 전체를 공격하면서 마오가 보기에 무정부주의적 위험을 낳고 있었습니다.

마오쩌둥은 문화혁명을 통해 당권파를 몰아내고 당과 국가 기구의 주도권을 장악한 후에는 ‘계급대오정화’ 운동이라는 캠페인을 벌였습니다. 이 과정에서 흑5류(지주, 부농, 반혁명분자, 악질분자, 우파분자) 출신자들이 박해를 받았습니다. 하지만 이 운동의 진정한 목적은 문화혁명 동안 공격받았던 당 간부와 국가 관료들을 정치적으로 복권시켜 주는 것이었습니다.

린뱌오와 4인방의 몰락

1969년 4월에 중국 공산당 제9차 당대회가 열렸습니다. 그 당대회는 당시 국가 주석이자 마오쩌둥의 정적인 류사오치를 반혁명 수정주의 분자로 공표하면서 문화혁명의 ‘위대한 승리’를 자축했습니다. 그 뒤에 벌어진 일들은 대중 동원은 전혀 없었던 순전히 지배계급 분파들 사이의 책략과 갈등 그리고 정적 제거의 드라마였습니다.

가장 먼저 제거된 집단은 인민해방군(중국공산당이 이끄는 군대)의 지도자이자 마오쩌둥의 후계자로 공표됐었던 린뱌오와 그와 동맹자들이었습니다. 문화혁명을 거치면서 인민해방군의 세력이 커지고 그에 따라 린뱌오가 마오의 잠재적 경쟁자가 됐기 때문입니다.

1971년 9월 린뱌오는 비행기를 타고 소련으로 망명을 하다가 몽고에서 추락사를 당했습니다. 그가 죽은 뒤에 당권을 쥔 4인방(마오의 부인 장칭, 왕훙원, 장춘차오, 야오원위안)은 린뱌오가 노예제 사회를 지지했던 공자의 추종자라는 뜬금없는 비난을 하며 ‘비림비공’(린뱌오를 비판하라, 공자를 비판하라) 운동을 벌였습니다. 하지만 이 운동의 진정한 표적은 당시 국가 주석이던 저우언라이와 덩샤오핑이었습니다.

그러던 터에 1976년 1월 저우언라이가 사망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를 애도했습니다. 하지만 친마오 핵심 그룹인 4인방은 이를 방해했습니다. 이에 반대해 1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청명절인 4월 5일 톈안먼 광장에서 항의 시위를 했습니다. 생활수준의 꾸준한 하락과 맞물린 오래된 불만과 분노가 폭발했던 것입니다. 이 사건이 1976년의 톈안먼 항쟁입니다.

그런데 1976년 9월 9일에는 마오쩌둥이 사망했습니다. 마오의 권위에 의존했던 4인방은 새 주석 화궈펑과 인민해방군의 원로들에 의해 제거됐습니다. 그들이 초래하는 불안정을 중국 관료 모두가 우려했기 때문입니다. 이를 통해 덩샤오핑이 주도권을 잡고 중국이 세계시장으로 다가가는 길을 열었습니다.

그러나 4인방을 비롯한 친마오 세력이 친노동자적이거나 반제국주의적이었던 것은 결코 아닙니다.

친마오 세력은 문화혁명 중에 노동자들의 주요 요구, 즉 임금 차별과 상여금 폐지, 평등한 분배 제도, 임시직·계약직 제도 폐지, 국가에 의한 할당이 아닌 노동자의 공장 및 기업 선택의 자유, 당의 노동조합 통제 폐지 등을 모두 묵살했습니다.

또, 1969년 중소 국경에서 소련과 군사적 충돌이 벌어지자 핑퐁 외교를 거쳐 닉슨의 중국 방문을 성사시킨 것도 마오쩌둥과 저우언라이 그리고 4인방이었습니다. 그들은 나중에는 미국과 수교를 맺었고, 1971년에는 유엔에 가입했습니다. UN은 국제연맹의 후신으로, 레닌과 코민테른은 국제연맹을 “제국주의 강도들의 연맹”이라고 불렀는데 말입니다.

마오쩌둥이 잃어버린 실권을 되찾기 위해 불러일으킨 환상에 고무돼 중국 노동계급이 상당 부분 동원됐지만, 성무련의 사례에서 보듯이 중국 사회의 성격과 마오쩌둥주의에 대한 정치적 착각으로 인해 대안적인 세력이 되지 못했습니다.

특히, 1952년 트로츠키주의자들이 탄압으로 제거되고, 1956~57년에는 마오쩌둥에 대항할 다른 세력들도 모두 탄압을 당한 뒤라, 문화혁명이 시작될 시기에는 독립적 좌파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1989년 톈안먼 항쟁 때도 비슷한 양상이 재현됐습니다. 중국 사회의 본질을 제대로 인식할 수 있는 정치적 명료함과 이에 기반한 진정한 마르크스주의 조직의 건설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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