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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섹스할 권리》:
남녀 대립적 페미니즘의 약점을 고찰한 책

“섹스가 진정 자유로워지려면 무엇이 필요할까?” 이런 물음에 천착해 오늘날 섹스 문제를 둘러싼 논쟁과 페미니즘 내부의 문제점을 다룬 책이 나왔다.

《섹스할 권리》 아미아 스리니바산 지음, 김수민 옮김, 창비, 2022년, 392쪽, 22,000원

《섹스할 권리》의 저자인 인도 출신의 철학자이자 페미니스트 아미아 스리니바산은 성별 이분법에 비판적이고 교차 페미니즘을 지향한다. 미국의 흑인·여성 해방운동의 투사인 앤절라 데이비스를 지지하며 《여성, 인종, 계급》 등 그의 책 구절을 수차례 인용했다.

《섹스할 권리》는 섹스를 개인의 자유 거래로만 보는 성적 자유주의와 남성의 지배 행위로 보는 안티섹스 페미니즘 모두에 반대한다. 전자는 구조적인 사회 문제를 기각하고, 후자는 남성 배제에만 골몰하며 성적 보수주의로 흐르기 때문이다.

이 책은 섹스와 성적 관계를 굴절시키는 정치적·사회적·경제적 문제에 주목하며, 국가 권력을 이용한 처벌 강화 정치는 대안이 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 한국에서도 남녀 대립적 페미니즘이 비슷한 문제점을 보여 온 상황에서 이 책은 귀중한 통찰을 제공한다.

미투 운동의 구호 돌아보기

《섹스할 권리》는 총 여섯 개의 에세이로 구성돼 있는데, 그 중 ‘누가 남성을 음해하는가’, ‘포르노를 말한다’, ‘섹스, 투옥주의, 자본주의’ 이 세 글이 특히 흥미롭고 유익하다.

‘누가 남성을 음해하는가’에서는 미투 운동에서 주류 페미니스트들이 사용한 구호 ‘여성을 믿자’(이른바 피해자 중심주의)에 담긴 약점을 고찰한다.

저자는 이 구호의 취지가 “여성 차별적이고 편파적인 법제도”에 맞서는 데 있다는 점에는 공감을 보낸다. 그렇지만 이 구호에 담긴 논리, 즉 여성은 “진실을 말하고” 남성은 “거짓을 말[한다]”는 것에는 비판적 태도를 취한다.

드물지만 엄연히 존재하는 여성의 허위 고소 때문에 무고한 남성이 범죄자로 몰려 “인생이 황폐해지는” 문제를 간과해서는 안 된다는 저자의 지적은 매우 타당하다.

성폭력 허위 고소와 자백 강요가 인종차별 유지·강화에 이용된다는 점도 잘 보여 준다. 가령, 미국에서 짐 크로법(흑인과 백인을 분리하는 인종차별법)이 시행되던 시기에는 백인 여성의 허위 강간 진술로 수많은 흑인 남성들이 린치를 당하고 살해당했다.

백인 여성을 강간했다는 누명을 쓰고 사형 등 중형을 받았던 흑인 남성 4명을 기리는 기념비(2020년) ⓒ출처 The Historical Marker Database

오늘날 양상은 달라졌지만, 허위 고소는 여전히 국가나 인종차별주의자들이 흑인 등 유색인을 억압하고 편견을 조장하는 무기로 사용되고 있다. 1989년~2020년 동안 미국에서 허위 고소로 유죄 판결을 받은 사람의 52퍼센트가 흑인 남성이었다. 흑인 남성은 미국 남성의 고작 14퍼센트를 차지하는데도 말이다.

부자 남성들은 허위 고소를 당하든 진짜 성범죄를 저지르든 비싼 변호사를 고용해 형량을 대폭 줄이거나 빠져나갈 수 있지만, 흑인 등 가난한 유색인은 속수무책인 경우가 많다.

그래서 저자는 이렇게 반문한다. “가난한 사람과 유색인에게 제도적으로 불리한 감금을 목적으로 하는 접근법이 과연 성적 정의를 실현할 수 있을까?”

이 책에는 남성을 잠재적 가해자 취급하며 처벌 강화로 치닫는 정치가 사회 구조를 바꾸지 못하고 혼란과 모순을 낳는다는 점을 보여 주는 사례가 많이 나온다.

가령 2014년 캘리포니아에서 페미니즘 운동가들의 지원을 받아 통과된 캠퍼스 성폭력 방지법안은 성행위에서 합의 여부 판단 기준으로 “의식적이고 자발적인” 긍정적 합의가 “성행위 내내 계속 돼야” 한다고 명시했다.

이런 과도한 규정으로 명백한 동의 없음과 거절 사이에 존재하는 회색지대의 성관계나 여성이 불편하거나 불만족스러웠던 성행위 등도 모두 ‘강간’으로 규정될 수 있었다. 어떤 학생들(주로 가난하고 유색인 남학생들)은 법적으로 무혐의를 받았음에도 학교에서 성범죄자로 낙인 찍히고 배척당했다.

처벌 강화 정치의 모순

이 책은 국가 권력을 이용해 처벌 강화를 추구하는 페미니즘 운동이 성적 보수주의 강화로 귀결되는 것도 날카롭게 들춰낸다.

1970년대에 미국의 급진 페미니스트들은 포르노를 여성 억압의 원인으로 규정했다. 즉, “포르노는 이론이고 강간은 실천”이라는 것이다.

캐서린 맥키넌과 안드레아 드워킨은 1980년대에 국가에 포르노 규제를 촉구하며 기독교 우파와도 손을 잡았다. 이런 운동의 결과, 성범죄가 아니라 성적 자유가 옥죄게 됐다. 1992년 캐나다 대법원은 매키넌과 드워킨의 입장을 이용해 포르노를 범죄화했는데, 그 후 경찰은 캐나다 최초의 게이·레즈비언 서점을 공격해 레즈비언 잡지를 몰수했다.

2014년에도 영국은 ‘나쁜’ 포르노를 단속하기 위해 특정 성행위 금지 목록을 만들어 검열을 강화했다.

저자는 성매매 불법화 운동도 성매매 여성을 궁지로 내몰았을 뿐 효과가 없었다는 점을 여러 사례를 들어 설명한다. 성매매 여성의 안전을 위해 성매매를 비범죄화하고 궁극적으로는 “성을 사고 팔지 않는 세상을 만드는 일로 나아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런 입장은 매우 타당하다. 포르노와 성매매는 자본주의 여성 차별과 성적 소외의 산물이지 그 원인이 아니고, 포르노·성매매 반대 운동은 우파나 지배계급 전체에 이용되기 쉽다.

저자는 국가 권력의 처벌 강화에 집중하는 페미니즘 활동은 진정한 성적 자유와 여성 차별 해소에 도움이 안 된다고 단언한다.

“페미니스트들이 (경찰들이 거리를 순찰하고 남성들을 감옥에 보내는) 투옥 해결책을 받아들일 때 이는 지배계급이 범죄 대부분의 가장 심각한 원인이 되는 빈곤과 인종 지배, 국경, 계급 제도 같은 문제의 해결을 거부할 수 있게” 해 주기 때문이다.

1994년에 미국 대통령 빌 클린턴은 여성 폭력 범죄를 단속하는 예산을 늘렸지만, 여성들에게 절실한 복지 예산은 대폭 삭감했다. 이는 가난한 여성들을 더욱 취약하게 만들었다.

저자는 여성들을 불행하게 만드는 불평등과 가난을 해결하기 위해 “주택과 의료 서비스, 교육과 보육의 사회화, 양질의 일자리”를 요구하며 노동운동과 여성운동, 인종차별 반대 운동이 함께 연대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긴축과 복지 삭감으로 여성의 처지가 악화되는 것에 맞서려면 광범한 대중 투쟁이 필요하므로, 이런 연대를 강조하는 것은 단연 이 책의 장점이다.

그러나 이 책은 계급 차별을 여러 차별의 하나로만 볼 뿐, 자본주의 사회의 핵심적 사회관계로 보지 않는 교차 페미니즘의 약점을 갖고 있다. 그럼에도 페미니즘 운동 내의 도덕주의와 엄벌주의에 대한 저자의 날카로운 비판은 진지하게 곱씹어 볼 가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