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냐치오 베니토 라 루사는 전직 국방장관으로, 그의 아버지는 무솔리니의 파시스트당의 간부였다. 라 루사는 조르자 멜로니와 함께 이탈리아형제당을 창당했다.

라 루사는 올 10월에 이탈리아 상원의장으로 선출됐다.

라 루사는 자기 집에 전시된 수많은 파시스트 유물들을 자랑하는 영상에서 이렇게 말했다. “공산당의 상징도 있는데, 그건 무솔리니 동상 발밑에 깔아 뒀다.”

라 루사는 이탈리아사회운동당(MSI) 청년 지부에서 정치 경력을 시작했다. 이탈리아사회운동당은 무솔리니 지지자들이 1946년에 창당한 당이다.

멜로니는 “이탈리아형제당의 DNA에는 파시즘·인종차별·반유대주의에 대한 그리움”은 없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냐치오의 남동생이자 이탈리아형제당 소속 유럽의회 의원인 로마노 라 루사가 지난달 한 장례식장에서 팔을 곧게 뻗는 파시스트식 경례를 하는 모습이 사진으로 찍혔다. 이탈리아형제당은 “로마노는 다른 사람들더러 팔을 내리라고 부탁하던 중이었다”고 해명했다.

오리처럼 생기고 오리처럼 걷는 자들이 ‘나는 오리가 아니요’ 하고 꽥꽥댄다 해서 좌파가 그들을 토끼라고 불러 주는 것은 어리석은 일일 것이다.

이탈리아사회운동당은 제2차세계대전 종전 이후 창당됐다. 이 당을 창당한 파시스트들은 1943년 연합군이 시칠리아를 침공한 후 이탈리아 북부에 세워진 나치 괴뢰 정부에서 중책을 맡았던 자들이었다.

이탈리아사회운동당의 약자인 MSI는 “무솔리니여, 영원불멸하소서(Mussolini, sei immortale)”의 머리글자를 딴 것이기도 하다. 이 당의 추종자들은 전임 파시스트 정권이 충분히 급진적이지 않았다고 평가하며, 폭력 혁명을 추구하는 파시즘으로 회귀하기를 바랐다.

이탈리아를 파시즘으로부터 해방시킨 것은 연합군이 아니라 나폴리·로마·토리노·밀라노 등 도시들에서 파시즘 지배에 맞서 벌어진 대중 파업과 무장 항쟁이었다.

그러나 이탈리아 공산당 지도자들의 비겁함과 미국의 간섭 때문에 전후 이탈리아에는 좌파들을 배제하기 위한 정치 구조가 세워졌다.

국가

무솔리니가 권력을 장악할 당시 지배계급 기구들은 히틀러의 독일보다 뿌리가 훨씬 취약했다.

그래서 무솔리니는 파시스트 지배와 기존 국가의 무장력을 훨씬 수월하게 결합시킬 수 있었다. 무솔리니에게는 돌격대가 필요 없었다. 무솔리니는 경찰을 이용했다.

이러한 국가 기구는 제2차세계대전 종전 후에도 비교적 온존했다. 이탈리아 정치에서는 탈(脫)나치화가 일어나지 않았는데, 기업주들에게 위협이었던 것은 파시스트가 아니라 좌파였기 때문이다.

1948년 시행된 이탈리아 헌법은 “해산된 파시스트당을 어떤 형태로든” 재건하는 것을 명시적으로 금지한다. 이탈리아사회운동당은 연립정부에서 배제됐다. 또한 그래서 이탈리아사회운동당은 창당 직후부터 완곡 어법을 썼다.

하지만 이탈리아사회운동당이 1960년에 정부에 발을 들이지 못했던 것은 전국적 시위·파업·소요 덕이었다. 국가 기구에 속한 자들 및 파시스트들의 일부는 테러리즘에 기댔지만 1970년대에 파시스트들은 대체로 주변화됐다.

정치의 틀 안에 파시스트 사상을 남겨 놓기 위한 기념일과 추모 행사들을 둘러싸고 제한적인 싸움이 벌어지기도 했다.

그러나 최근 파시스트들은 정부에 발을 들이기 시작했다. 1994~2011년 사이 집권했던 네 번의 정부들(안이하게도 “중도우파” 정부로 분류됐다)이 파시스트에게 재기할 기회를 열어 줬다.

1990년대 초 일련의 부패 스캔들이 터지고 냉전기에 자리잡은 이탈리아의 지배적인 정치 구조가 무너졌다.

구 우파와 그들의 적수인 사회민주주의 세력 모두 심각한 위기에 빠졌다.

이탈리아전진당이 부상했다. 언론 재벌 실비오 베를루스코니가 이 당을 이끌었다. 베를루스코니의 반공주의는 파시스트가 부활할 토양을 제공했다.

베를루스코니는 무솔리니가 이탈리아 역사에서 한 구실에 대한 수정주의적 견해를 공공연히 옹호하기 시작했다. 베를루스코니는 무솔리니가 이탈리아의 “가장 위대한 정치인”이었고 “이탈리아를 위해 좋은 일을” 했던 “온화한 독재자”였으며 무솔리니가 세운 수용소들은 모두 “휴양 시설”이었다고 했다.

재생

파시스트 이데올로기의 부흥은 속도가 빨라졌고, 이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베를루스코니에 이어 북부동맹도 파시스트들이 재기할 토양을 닦는 데 합류했다. 북부동맹은 비교적 부유한 이탈리아 북부 지방의 자율성을 확대하고자 한 정당이었다.

북부동맹은 인종차별적 우파 정당이었지만 파시스트 전통에서 비롯한 당은 아니었다.

베를루스코니의 또 다른 동맹이었던 국민연합은 파시스트 전통에서 비롯했다. 국민연합은 이탈리아형제당의 전신이고, 이탈리아사회운동당을 계승한 당이었다. 국민연합의 파시스트들은 무솔리니와의 연결성이 주목받는 상황에서, 포스트파시즘이라는 용어를 채택해 무솔리니와 거리를 뒀다.

지금은 다시 명칭이 바뀌기도 했지만 바로 이들 세 집단[이탈리아전진당, 북부동맹, 파시스트]이 현재 이탈리아 정부를 구성하고 있다.

지난 10년 동안, 여러 차례 우경화한 사회민주주의 정부는 위기에 형편없이 대응하면서 노동계급 지지층과 유리됐다. 부자들의 요구를 받아들여 노동계급 공격을 감행하기도 했다.

베를루스코니가 파시스트들에게 문을 따 줬다면 [극우 정치인] 마테오 살비니는 그 문을 활짝 열어 줬다. 살비니는 자신이 속한 북부동맹을 장악했다.

살비니는 [이탈리아 북부] 지역주의를 버리고 [이탈리아] 민족주의를 받아들였으며, 극우에게 지지를 호소했다. 살비니는 “이탈리아 우선”이라는 구호를 채택했는데, 이 구호는 이탈리아의 또 다른 파시스트 정당 ‘카사 파운드’가 사용했던 것이었다.

그러나 살비니는 지난 2년을 은행가 [출신인 드라기] 정부를 지지하며 허비했다. 이제 사람들은 진짜배기에게로 관심을 돌리고 있다.

멜로니는 자신이 “유일한 야당”이었고 “진짜 이탈리아인”들과 교감한다고 자처할 수 있었다.

파시스트 멜로니의 총리 취임이 곧 파시즘의 승리는 아니지만, 그 위험성을 간과하는 것은 극도로 위험하다 ⓒ출처 이탈리아 정부

파시스트

멜로니는 “내가 파시스트였다면 파시스트라고 말할 것”이라고 했다. 멜로니는 파시스트를 파시스트라고 부르는 것이 파시스트적이라고 주장한다. 의도적인 반(反)이성적 정치다.

멜로니는 이탈리아의 출산율이 하락하는 “비상사태”에 대응하고 이른바 “유대-기독교”의 뿌리를 지키기 위해 임신중지권을 제약하고자 한다. 멜로니는 이민자 유입을 침공으로 간주하고, 유엔에 의한 “대교체 음모”의 일부라고 본다.

멜로니는 “좌파의 세속주의와 급진 이슬람이 우리의 뿌리를 위협한다”고 분명히 말한다. 멜로니는 우파 정당들이 “성소수자들의 로비”와 “젠더 이데올로기”에 분명하게 반대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 자들이 파시스트인지 아닌지가 중요한 이유 중 작은 사례 하나는 이탈리아 대통령직 문제다.

이탈리아형제당은 집요하게 대통령의 권한 강화를 요구하며, 대통령 직선제를 주장한다(현재는 총리가 지명한다). 그들의 주장인즉슨, 국민이 대통령을 직접 선출하면 국민의 목소리가 지금처럼 의회 내 뒷거래에 의해 걸러지는 것이 아니라 직접 표현되리라는 것이다.

솔깃하게 들릴 수 있다. 하지만 파시스트들이 이렇게 주장하는 것은 위장술이다.

그들이 이런 주장을 하는 이유 중 하나는 대통령 직선제를 도입하면 정치를 이른바 거리로 가져갈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면 이들은 의회를 나쁜 방식으로 우회해 정책을 펼 수 있게 될 것이다.

원한다고 다 이뤄지는 것은 아닐 테지만, 이는 새 정부가 이루고 싶어하는 핵심 사안이긴 하다.

이탈리아가 부채 문제에 대응하려면 유럽연합과 관계를 맺어야 한다.

그러니 서로 싸우는 극우 집단들 중 누가 우크라이나의 편이고 누가 유럽연합에 가장 덜 우호적인지를 두고 벌어지는 가짜 쟁투는 정부 직책을 둘러싼 갈등의 일환이지, 원칙을 둘러싼 싸움 같은 게 아니다. 멜로니가 유럽연합의 자금을 원하고 전쟁을 지지한다는 것이 꼭 그가 파시스트가 아니라는 증거는 아니다.

무솔리니는 1920년대에 이탈리아 좌파를 분쇄할 때 과격하고 파괴적인 자였다. 하지만 무솔리니는 미국 금융가의 사랑을 받았고, 무솔리니 역시 외국계 자금과 투자를 적극 유치했다.

과소평가

자유주의자들은 파시스트를 그저 그런 인종차별적 깡패라고만 여긴다. 그들을 상대로 제대로 된 청문회를 열고 개중 나은 (체제에 순응적인) 자들에게 규율을 부과하면 쉽게 쫓아낼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파시즘의 위험성을 과소평가하는 것이다. 그런 과소평가가 끔찍하게 위험한 것임은 과거에 밝혀진 바 있다. 그리고 이제 또 그런 일이 벌어질 수 있다.

최근 몇 년 동안 일부 파시스트들은 자신들이 자본에게 대우받을 만하게 보이려고 선거적 기반을 구축하려 해 왔다.

하지만 이들은 그에 발맞춰 거리의 군대를 건설하지는 못하고 있다.

파시스트들이 온전히 승리하려면 서로 연결된 두 가지가 모두 필요하다. 첫째, 사회에 파고들 수 있는 적극적 대중운동이 필요하다.

그런 운동이 있어야만 파시스트들은 다른 사회 세력, 특히 조직 노동계급에 맞설 수단을 가질 수 있다.

그래서 무솔리니의 당이 무장 집단을 만들고, 히틀러가 1930년에 10만 명 규모의 무장력을 갖췄던 것이다.

둘째, 지배계급과 국가기구의 결정적 일부가 파시스트들에게 권력을 넘겨줘야 한다. 무솔리니와 히틀러 모두 대중운동이냐 지배계급 지지 확보 전략이냐 사이에서 긴장을 겪었다.

하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두 전략은 서로 조응했다.

파시즘은 선거를 이용해 거리의 파시즘이 성장할 틀을 구축할 수 있다.

그리고 파시스트 깡패들이 이탈리아의 주요 노총 본부 건물을 습격한 지 1년밖에 되지 않았다는 사실도 기억해야 한다.

양차 세계대전 사이에 오스트리아와 스페인에서도 그런 일이 있었다. 두 나라 모두에서 유혈 낭자한 억압적 우파 정부가 노골적인 파시즘으로 진화했었다.

‘로마 진군’과 무솔리니의 권력 장악 사이에는 몇 주가 아니라 몇 년이 걸렸다. 독일에서 히틀러는 쿠데타 실패 후 권좌에 오르기까지 10년이 걸렸다.

따라서 파시스트 멜로니의 이탈리아 총리 취임이 곧 파시즘의 승리를 뜻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 위험성을 간과하는 것은 극도로 위험한 일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