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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는 외환위기 막고 싶어도 시장주의 때문에 진퇴양난이다

10월 23일(일) 윤석열 정부와 한국은행 등이 모여 비상 거시경제금융회의를 열고, 금융 시장에 50조 원 이상의 자금을 공급하겠다고 발표했다. 최대 20조 원을 투입하겠다고 10월 20일에 발표한 지 사흘 만에 추가 대책을 내놓은 것이다.

경제 정책을 총괄하는 수장들이 휴일에 회의까지 하고 대책을 내놓은 것은, (최근 부동산 프로젝트 파이낸싱[PF] 위기에서 시작된) 금융 불안정을 빨리 잠재우지 못하면 자칫 2008년 글로벌 금융 위기나 1997년 ‘IMF 위기’가 재현될 수 있다는 위기감 때문일 것이다. 국민의힘 유승민과 민주당 이재명 대표도 ‘IMF 때와 비슷하다’는 취지의 경고를 했다.

회의 직후 기획재정부 장관 추경호는 이렇게 말했다. “현재의 시장 상황이 매우 엄중하다는 점에 인식을 같이하면서 필요시에는 가용한 정책 수단을 총동원하겠다.”

정부가 휴일에 대책을 내놓았지만 ‘IMF 위기’가 재현될 수 있다는 불안감이 높아지고 있다 ⓒ출처 기획재정부

그러나 정부 대책 발표 뒤에도 금융 불안정은 전혀 해소되지 않고 있다.

5대 대기업의 회사채 금리가 7~8퍼센트대로 치솟았어도 채권 발행 목표액을 채우지 못하는 일이 속출하고 있다. 한국가스공사와 인천도시공사처럼 정부와 지자체가 보증하는 공기업들도 채권 발행 목표액을 다 채우지 못했다.

이처럼 정부 대책이 큰 효과를 내지 못하는 까닭은 정부나 한국은행이 금융 시장에 직접 돈을 투입하지는 않고 있기 때문이다.

정부 대책은 산업은행과 시중 은행들, 주택도시보증공사처럼 상대적으로 신용도가 높은 금융기관이 50조 원을 마련하고, 이를 이용해 회사채나 부동산 개발 사업에 투자한 PF 등을 매입하는 방안이다.

그런데 상대적으로 신용도가 높은 이 기관들도 지원 자금을 마련하려면 채권을 발행해 돈을 빌려야 한다.

그러다 보니 금융 시장에서 자금이 산업은행이나 시중 은행들로 쏠리는 현상이 더욱 심해지고 있다. 그리고 증권사·저축은행·카드사 같은 제2금융권이나 다른 기업들은 자금을 구하기 더욱 어려워지는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정부는 대형 증권사들도 1조 원을 거두어 중소형 증권회사들의 PF 관련 채권을 매입하라고 촉구했다.

정부 눈 밖에 나지 않으려고 돈을 모으기로는 했지만 제 코가 석 자인 대형 증권사들은 ‘경쟁 회사 빚까지 떠안아야 하느냐’는 불만을 토로하고 있다.

여러 금융회사가 한국은행이 나서서 자금을 추가로 공급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인플레이션을 잡아야 한다며 금리를 올리고 돈줄을 죄고 있는 한국은행은 추가 자금 지원을 계속 거부하고 있다. 한국은행은 은행과 일부 대형 증권사 채권을 매입해 주기로 했지만, 대신 국채를 그만큼 덜 사는 것이기 때문에 회사채나 부동산 PF 분야의 자금 경색을 해소하는 데 큰 효과는 없을 듯하다.

한국은행은 자신이 추가로 자금을 공급하면 한국의 금융 불안정을 시인하는 게 돼 버려 오히려 외환위기를 부를까 봐 두려워한다. 한 금융권 관계자는 “한은이 시장에 유동성[자금]을 직접 공급하는 방안을 내놓으면 외국에서는 사태를 심각하게 볼 것”이라고 말했다.

최근 영국에서도 외환위기 위험이 커지자 중앙은행이 금리를 올리고도 채권 시장에 추가 자금을 공급하는 일이 있었다.

사실 정부가 지원하겠다는 50조 원은 기업들의 자금 수요를 감당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 나이스(NICE)신용평가의 조사를 보면, 증권사와 건설사가 올해 연말까지 마련해야 하는 PF 관련 부채만 해도 32조 3908억 원이고, 내년 상반기까지 추가로 57조 3759억 원을 조달해야 하는 등 PF 관련 부채가 90조 원에 육박한다.

금융연구원은 정부의 규제를 받지 않는 PF와 부동산 펀드·신탁 등 부동산 관련 금융 규모가 750조 원에 이른다고 추산했다. 이 중 202조 원가량은 부실 위험이 높다고 한다.

최근까지 이어진 저금리 덕분에 기업이 진 부채만큼 갚아야 하는 부채도 크게 늘었다. 기업이 1년 안에 갚아야 하는 단기차입금은 지난 6월 말 기준 532조 5193억 원으로, 역대 최대 규모이다.

이처럼 현재의 위기는 저금리 시대에 이곳저곳에서 생겨난 부채의 지뢰들이 금융 시스템 전반을 위협하고 있는 형국이다. 상황이 열악한 중소형 증권사·건설사부터 부도가 나면 연쇄적으로 위기가 전염돼 금융 시스템 전체가 마비될 수 있다.

윤석열 정부와 한국은행은 진퇴양난에 빠져 있는 듯하다. 금융기관들을 동원해 위기를 진정시키기에는 역부족이고, 정부와 한국은행이 직접 개입했다가는 그건 그것대로 외환위기를 발생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세계적인 금리 인상, 수출 감소 등 실물경제 타격, 위안화와 엔화 가치 하락으로 인한 동아시아에서의 외환위기 가능성 등 곳곳에 지뢰가 널려 있다.

대출 금리 제한하고 부채 탕감하라!

한편, 금리가 치솟고 금융회사들도 자금을 마련하느라 급급해지면서, 노동자를 비롯한 서민층의 삶은 벼랑 끝으로 내몰리고 있다.

토지주택연구원이 최근 발표한 보고서를 보면, 지난해 말 주택을 보유한 1245만 1000가구 가운데 대출 원리금 상환에 어려움을 겪는 ‘하우스 푸어’는 103만 가구(8.3퍼센트)나 되는 것으로 추산됐다. 하우스 푸어 가구는 은행 빚을 못 갚아 집을 처분해야 할 상황에 놓인 가구를 뜻한다.

지난해 이후 기준금리가 2.5퍼센트포인트나 오르면서 주택담보대출 이자도 급등하고 있음을 감안하면, 하우스 푸어의 숫자는 훨씬 늘었을 가능성이 크다. 수백만 명이 피땀 흘려 모은 돈과 집을 잃을 위험이 커진 것이다.

다른 한편, 저축은행·카드사 등이 자금 경색으로 고통받으면서 서민 대출을 대폭 줄이고 있다.

최근에는 대부업계마저 저신용자를 대상으로 한 대출을 사실상 중단하면서 수십만 원의 급전조차 구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생기고 있다. 대부업체에서까지 밀려난 저신용자들은 자칫 불법 사금융으로 내몰릴 수도 있다.

앞으로 금리가 더 오를 것이기 때문에 저신용자들의 대출은 더욱 어려워질 전망이다.

서민을 위한 공공 대출 확대, 대출 금리 제한과 부채 탕감 같은 요구를 내놓고 생계비 위기와 고통 전가 공세에 맞서는 광범한 대중 저항이 일어나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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