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29일 서울 용산구 이태원에서 압사 참사가 일어났다. (31일 오전 현재) 사상자 287명, 사망자가 154명에 달한다. 2014년 304명이 숨진 세월호 이후 최대 참사다.

코로나 방역으로 사적모임 인원과 영업시간이 제한된 2021년 핼러윈 데이조차 금토일 3일 동안 17만 명이 이태원에 몰렸다. 토요일에만 8만 명이 모였다.

3년 만에 거리두기 없는 핼러윈이니, 더 많이 모일 것은 불을 보듯 뻔했다. 경찰도 올해 토요일은 10만 명이 넘는 인파를 예상했다.

따라서 지자체와 경찰, 행정안전부는 안전사고를 예방하는 계획과 대책을 세우고 점검하고 실행해야 했다.

게다가 이미 당일 저녁 6시 30분부터 참사를 예고하는 아찔하고 위험한 상황들이 속출했다.

인파의 대부분은 평범한 십 대와 이십 대였다. 팬데믹 기간 십 대와 이십 대의 우울증, 자살률, 실업률이 급증했고 이런 답답하고 우울한 마음을 즐겁게 풀기 위해 모였을 것이다.

윤석열은 재빨리 대국민 담화를 통해 “사고의 원인을 철저하게 조사해서” “근본적으로 개선하겠다”고 했다.

세월호 참사 이후 정권 몰락을 경험한 자들이 허겁지겁 움직이는 것이다. 정부는 일주일간 국가 애도 기간을 선포했다.

민심을 잃은 정부와 참사

민심을 잃은 정부 하에서 참사가 또 일어났다. 미디어도 사람들도 세월호를 다시 떠올렸고 윤석열과 권력층도 그랬을 것이다.

사람들이 충격에 휩싸였고 슬픔에 잠겼다. 그러나 울음을 삼키며 물을 것이다. ‘대체 왜 이런 참사가 청년들의 삶을 집어삼켰나?’

“안전관리 및 재난대비 총괄부처”인 행정안전부 장관은 이렇게 대답했다.

“경찰·소방 인력을 미리 배치함으로써 해결될 수 있었던 문제는 아니었던 것으로 지금 파악하고 있다” “서울 시내 곳곳에서 소요와 시위가 있어 경찰 경비 병력이 분산됐던 측면이 있었다.”

다시 말해서 정부 책임은 없고 시위가 문제였다는 뉘앙스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그보다 잘 분석했다. 참사가 일어난 곳은 예상 가능했고 충분히 대비할 수 있었다.

정부는 이 사건을 빨리 마무리 짓고 싶을 것이다. 그러나 정부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이제 더 정부에 반대할 이유가 생겼다.

어떤 사건들은 나중에서야 비로소 수많은 사람들에게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극적으로 드러난다.

왜냐하면 우리 가슴속 슬픔과 분노는 지금 당장 측정될 수 없기 때문이다.

좀 더 길고 넓게 볼 때 사회적 영역에서 일어난 비통한 사건들은 평범한 사람들이 시달리는 자신들의 경제적이고 사회적인 곤경과 곤란에 대한 울분들에 영향을 미치곤 한다.

세월호 참사가 오랫동안 그랬고 지난여름 신림동 반지하 발달장애인 가족의 죽음도 그랬다. 김용균과 SPC의 청년 노동자의 산재 사고도 많은 사람들에게 그러하다.

또한 우리는 참사의 원인, 요인을 개인적 영역에서 찾으려는 시도에 맞서야 한다. 개인의 부주의함, “철없음”, “군중심리”, “[상인들의] 이기심” 등 어떤 것이라도.

물론, 아직 그런 관점도 시도도 지지받지 못하는 듯하다. 세월호 투쟁 덕분일 것이다. 미디어조차 제법 공적 영역에서 원인을 찾고 있다.

힐즈버러 참사의 교훈

1989년 영국의 힐즈버러 축구장 참사의 진실 규명 과정은 우리에게 교훈을 준다. 역시 예고된 참사였고 압사 사고의 희생자들도 대부분 십 대와 이십 대였다.

마거릿 대처 정부와 경찰은 압사당한 94명의 시신에서 혈중알콜검사를 했고 시신에서 알콜이 나오면 전과를 조회했다. 참사의 원인을 술 취한 청년들 탓으로 몰고 가기 위해서였다.

경찰은 생존자들이 사망자들의 물건을 훔쳐갔고 의식 없는 여성을 강간하려 했다고 모욕했다. 그러자 언론이 이 말들을 퍼뜨렸다.

증거도 없었고 CCTV에도 그런 장면은 없었다. 그러나 희생자들을 탓하기 위해 경찰들 진술을 거의 200곳이나 조작했다.

23년의 투쟁을 통해 진실이 밝혀졌고 30년 만에 책임자가 처벌됐고 비로소 희생자들의 명예가 회복됐다.

사랑하라 방어하라 투쟁하라

경제위기, 생계위기, 기후위기의 고통을 평범한 사람들에게 떠넘기는 윤석열 정부는 “마약과의 전쟁”, “범죄와의 전쟁”, 촉법소년 연령 하향 같은 사회 단속 방향의 시도를 계속 하려할 것이다.

가난하고 취약한 처지의 사람들에게 이미 일상이 재난 수준이다. 더구나 미래는 훨씬 많은 재난을 품고 있다. 화석연료에 미친 자본주의가 양산하는 점증하는 기후 재난들, 전쟁 위험, 에너지 위기, 경제공황과 팬데믹까지.

그러나 이번 참사 현장에서도 사람들은 서로를 돕고 구조에 나섰다. 생존자들은 거의 탈진할 만큼 절박하게 심폐소생술을 반복했다.

혹독하고 힘겨운 자본주의 세상 속에서도 재난 현장의 평범한 사람들 다수는 서로 돕고 연대했다. 올여름 폭우의 현장도 그랬고, 세월호 때도 그랬다.

2006년 델라웨어 대학 재난연구센터가 700여 건의 재난들을 분석한 결론도 같다. 재난 현장에서 평범한 사람들은 협력과 연대가 늘어났다.

지금이야말로, 우리가 미국의 마르크스주의자 마이크 데이비스(1946~2022)의 말처럼 해야 할 때다.

“우리가 계속 살아가는 에너지의 가장 밑바탕에 있는 것은 서로에 대한 사랑, 복종에 대한 반발, 남이 정한 결론에 대한 거부다. 그것이 평범한 사람들의 도리다. 서로 사랑하라. 서로를 방어하라. 투쟁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