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11월 29일에 같은 제목으로 열린 노동자연대 온라인 토론회(영상 보기)의 발제문이다. 이 토론은 기획 시리즈 ‘당신이 알아야 할 현대 중국의 모든 것 – 마르크스주의 관점’의 여섯 번째 시간이었다.


오늘 발제에서는 덩샤오핑이 추진한 개혁·개방을 살펴보려 합니다. 덩샤오핑은 마오쩌둥과 함께 중국 현대사의 가장 유명한 인물입니다.

흔히들 덩샤오핑의 개혁·개방 덕분에 오늘날 중국이 경제 대국을 이뤘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반쪽 진실입니다. 왜 그런지, 덩샤오핑 개혁·개방의 효과가 진짜로 무엇이었는지 지금부터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제4강에서 ‘마오쩌둥과 문화혁명’을 다루면서 1976년 마오쩌둥의 사망 때까지 살펴봤습니다. 마오쩌둥이 죽자 마오의 권위에 의존해 권력을 장악했던 4인방이 몰락했습니다. 마오쩌둥에 이어 화궈펑(華國鋒)이 당 주석이 됐습니다. 화궈펑은 4인방을 체포해 재판에 회부하고, 문화혁명 때 고초를 겪었던 관료들을 복권시켰습니다.

그러나 화궈펑은 마오쩌둥의 문화혁명과 완전히 단절할 생각은 없었습니다. 그는 “마오쩌둥의 결정과 지시는 모두 옳다”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중국 지배 관료 내 개혁파는 이와 생각이 달랐습니다. 그들은 문화혁명으로 파탄 난 경제를 수습하고 개혁·개방을 하고자 했는데, 만약 마오쩌둥이 모두 옳다면 문화혁명을 비판하고 경제 전략도 전환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마오쩌둥을 변호하는 화궈펑과 개혁파의 갈등은 피할 수 없었습니다. 두 분파는 진리 검증의 기준을 둘러싸고 이른바 ‘진리표준논쟁’을 벌였습니다. 중세 그리스도교의 스콜라주의 논쟁을 연상케 하는 그 논쟁의 본질은 사실 중국이 나아갈 방향을 둘러싼 갈등이었습니다.

이전 발제에서 밝혔듯이, 마오쩌둥은 강력한 신중국 건설을 목표로 삼았습니다. 그러나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농촌의 빈곤은 사라지지 않았고, 제조업과 과학·기술도 정체했습니다. 1970년대 신흥공업국 4인방, 즉 한국, 대만, 홍콩, 싱가포르는 눈부신 경제 성장을 하고 있었는데 말이죠. 그래서 중국 지배 관료는 마오쩌둥의 방식 탓에 중국이 뒤처졌다고 봤습니다.

당시 뒤처졌다는 낙오감을 느낀 것은 중국 지배계급만은 아니었습니다. 헝가리, 유고슬라비아, 체코슬로바키아 등 동유럽 국가들의 지배계급도 그렇게 느꼈습니다. 그들은 서방의 시장 자본주의가 세계화와 무역 자유화를 통해 빠르게 성장하는 것을 보면서, 경제 구조의 제한적 개혁과 부분적 시장 개방으로 경제 성장을 이루고자 했습니다. “시장 지향적 국가자본주의”로 전환하고자 한 것입니다.

중국에서는 바로 덩샤오핑이 이런 개혁과 개방을 추진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 과정은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성공을 향한 탄탄대로가 아니었습니다. 다양한 모순과 갈등이 빚어졌습니다.

개혁·개방을 향하여

중국이 개혁·개방으로 방향을 튼 시점은 1978년 12월 중국공산당 제11기 3중전회입니다. 그 회의에서 농가생산책임제 도입, 국영기업 개혁, 경제특구 건설, 자본주의 국가와의 기술 교류 등이 결정됐습니다. 이런 개혁 조처들이 어떤 내용인지 살펴보겠습니다.

중국의 경제 개혁은 농촌에서 시작됐습니다. 마오쩌둥 시기에 농촌 생활은 인민공사라는 기관을 통해 조직됐습니다. 인민공사 아래에는 생산대대와 생산대가 있었고, 대략 5천 가구가 속해 있었습니다. 인민공사는 농산물의 공동 생산과 분배, 공산품의 공동 구매와 소비, 기타 공산품의 배급 등을 결정했습니다. 이 체계는 농민을 기아에서 구원해 주긴 했지만 빈곤에서 해방시키지는 못했습니다.

그런데 일부 농민들은 비밀리에 공동 토지를 자기들끼리 나눠서 경작하고는, 정해진 곡물량을 인민공사에 납부하고 남는 농산물을 챙겼습니다. 중국 당국은 점차 이런 방식을 인정하게 됩니다. 기존 인민공사 체제보다 더 많은 목표 생산량을 달성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바로 농가생산책임제입니다.

기존 인민공사 체제는 농민들을 공동 경작지에 나와 일하게 하고, 노동점수에 따라 필수품을 배급하는 방식이었습니다. 반면, 농가생산책임제는 농민들에게 경작지를 나눠 주고 정해진 할당량이나 세금을 납부하면 나머지는 농민들이 갖게 하는 제도입니다.

둘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었습니다. 새로운 농가생산책임제하에서는 농민들은 할당받은 토지에서 어떤 곡물을 어떻게 생산할지 결정할 수 있고 그 결실을 온전히 가질 수 있습니다. 1982년 무렵에는 중국 전역에서 인민공사 체제가 해체되고 농가생산책임제가 도입됐습니다.

농촌에서 나타난 또 다른 변화는 향진기업의 등장입니다. 향진기업의 ‘향’과 ‘진’은 농촌의 말단 행정 단위입니다. 향과 진에 등장한 민간기업이 바로 향진기업입니다.

향진기업의 전신은 인민공사 체제하에 있던 농촌 국영기업이었습니다. 향진기업은 중국의 개혁·개방 초기인 1980년대에 농촌의 부족한 공산품을 조달하면서 우후죽순처럼 성장했습니다. 각종 농기구 생산에서 시작해 농산물 가공 및 포장 기업으로 발전했습니다. 나중에는 도시와 해외의 시장을 겨냥한 공산품 생산으로 사업을 확장했습니다.

여기서 한 가지 눈여겨봐야 할 점은 향진기업이 지방정부 관료와의 긴밀한 유착과 비호 속에서 발전했다는 것입니다.

도시에서는 국영기업 개혁이 진행됐습니다. 도시의 국영기업은 단위(單位) 체제로 조직돼 있었습니다. 이 체제는 하나의 소우주와도 같았습니다. 노동자들은 이 단위 체제하에서 평생 일하고 생활하고 복지를 제공받았습니다.

이 단위 체제는 이익이 생기면 국가에 반납하고 손실이 나면 국가가 지원해 주는 제도에 근거하고 있었습니다. 바로 이런 제도가 비효율을 낳는다고 보고 이를 해결하려는 것이 국영기업 개혁이었습니다.

그래서 덩샤오핑은 1979년에 이윤유보제를 시행했습니다. 이는 단위 체제에서 생긴 이윤의 일부를 각 단위에 머무르게 해 경영진과 노동자에게 상여금을 주는 제도였습니다. 1983년에는 일부 기업들에 이개세제도(利改稅制度)를 실시했습니다. 세금을 납부하고 남은 이윤의 일부를 기업들에 귀속시키는 제도였습니다.

이 제도들은 이윤에 대한 인센티브를 경영자에게 제공하지만 손실에 대한 책임을 묻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정부는 1987년에 청부경영책임제를 시행하면서 손실이 나면 경영자가 책임을 지게 했습니다. 청부경영책임제는 경영자가 정부와 계약을 맺고 국영기업을 마음대로 경영할 수 있도록 해주는 제도입니다.

국영기업 개혁의 절정에 해당하는 것은 1994년 국무원이 확정한 조대방소(抓大放小) 정책입니다. 큰 것은 잡고 작은 것은 버린다는 뜻인데요. 큰 국영기업은 국가가 통제와 관리를 하고, 작은 국영기업은 민간에 매각해 사기업화한 것입니다.

이 정책으로 6000만 명이 넘는 노동자들이 해고됐습니다. 한편, 국유기업으로 분류된 에너지, 철강, 석유, 통신망 등 기간산업은 국가의 지원을 받아 세계적 기업으로 성장했습니다.

경제 개혁이 낳은 모순과 정치적 갈등

중국의 개혁·개방을 살펴볼 때 놓치지 말아야 할 특징 하나는 바로 쌍궤제(雙軌制)입니다. 쌍궤제란 국가가 관리하고 통제하는 국영부문과, 시장을 허용하는 민간부문으로 경제를 나눠서 운영한다는 것입니다.

1978년 개혁·개방 이전의 중국 경제는 거의 100퍼센트가 국영기업이었습니다. 그러나 1980년대에 앞서 말한 향진기업이 생겨나고, 1990년대 이후 민간기업들이 점점 늘어났습니다.

지금은 중국 경제의 3분의 1을 민간 부문이 차지하고 있지만 1980년대에만 해도 그 비중은 매우 작았습니다. 외자기업도 1980년대에는 광둥성과 푸젠성의 경제특구에 한정돼 있었습니다.

그런데 쌍궤제에는 모순이 있었습니다. 국영부문에서는 국가가 관리하는 가격으로 생산물이 거래됐지만, 민간부문에서는 시장 가격으로 거래됐습니다. 그런데 전반적으로 물자가 부족했기 때문에 시장가격은 대개 관리가격보다 높았습니다. 그러다 보니 경영자들은 국가와 계약하는 생산물의 생산량을 줄이고 시장에서 판매할 생산물의 양을 늘려, 이익을 극대화하는 전략을 추구했습니다. 그 결과 민간부문 경제가 급속히 성장했습니다.

중국 지배 관료는 시장을 도입한 중국 사회를 “사회주의 시장경제” 또는 “중국 특색의 사회주의”라고 부르면서 국영부문이 주(主)고 시장은 종(從)이라고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이런 주장과 달리 국가 계획이나 국영부문은 시장을 통제하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중국의 경제 전체가 세계 자본주의 체제가 가하는 압력에 따라 움직였습니다. 물론 국영부문도 진정한 사회주의와는 아무 관계 없는데요. 이는 제3강에서 다뤘습니다.

어쨌든 개혁 조처 덕분에 경제 상황이 마오쩌둥 시절보다 나아진 것은 사실이었습니다. 농산물 생산이 증대해 농촌에서 빈곤과 아사의 두려움은 사라졌습니다. 그리고 농촌의 만성적 과잉인구가 향진기업에 고용되면서 농촌의 소득수준이 높아졌습니다.

변화는 도시에서도 나타났습니다. 도시 국영기업의 경영자들은 각종 인센티브를 통해 얻은 이윤을 재투자함으로써 부를 축적할 수 있었고, 민간기업들도 급속하게 성장했습니다.

그러나 이런 변화는 개혁의 폭과 속도를 둘러싼 지배계급 내의 갈등을 불렀습니다. 민간부문 경제가 급성장하자 덩샤오핑의 정적들인 보수파 관료는 중앙 국가가 경제에 대한 통제력을 잃고 있다고 우려했습니다. 그러면서 국영기업 중심으로 경제를 운영하고 시장을 그 아래 두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반면 덩사오핑 지지 관료인 개혁파는 세계 자본주의 속에서 국제 경쟁력을 갖추려면 시장을 더 확대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개혁·개방 정책이 초래한 경제의 부작용이 드러나면서 관료들 사이의 긴장은 더 높아졌습니다. 민간기업이 대폭 증가하면서 당국은 원자재와 산출물의 수요와 공급을 가늠하기가 더 힘들어졌습니다. 한편으로는 과잉이, 다른 한편으로는 부족이 나타났습니다. 어떤 해는 경기 호황이 그 다음 해에는 불황이 번갈아 발생하기도 했습니다. 보수파는 이런 경제적 혼란을 우려했습니다.

그리고 민간부문의 확대가 물자 부족을 해소하는 데는 도움이 됐어도 물가 상승을 일으켰습니다. 물가 상승은 도시 노동자들의 실질임금을 낮추는 효과를 냈습니다. 게다가 배급이 줄어든 상황에서 말입니다. 당국은 생계비 위기로 노동자들의 불만이 폭발하지 않도록 인플레를 억제해야 했지만, 구조적 요인에서 비롯한 것이어서 쉽지 않았습니다.

경기 과열과 불황의 빈번한 교차, 그리고 인플레이션은 도시의 노동자와 청년학생들의 생활수준을 하락시키고 불안정하게 만들었습니다. 국가 관료들은 민간기업을 만들거나 유착하면서 온갖 부정부패로 부를 쌓고 있었는데 말입니다. 시장개혁으로 절대빈곤층 규모가 줄어들긴 했지만 빈부격차는 오히려 더 벌어졌습니다.

이처럼 개혁·개방 과정에서 쌓인 불만은 지배계급 내의 균열을 비집고 1980년대 후반 일련의 저항과 1989년 톈안먼 항쟁으로 폭발했습니다.

아래로부터의 저항

사실 덩샤오핑은 경제 개혁 초기에는 상당한 지지를 받았습니다. 개혁파는 마오쩌둥 시절 고통을 겪었던 사람들이어서 변화에 대한 큰 대중적 기대를 불러일으켰습니다. 덩샤오핑은 도시 지식인들의 지지를 얻고자 문화 영역에서 자유화를 어느 정도 허용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진정한 민주주의도, 자유의 확대도 아니었습니다. 1978~1980년 아래로부터의 저항인 민주의 벽 운동이 일어나고, 덩샤오핑이 허용하는 선을 넘어 민주주의의 확대를 요구하자 덩샤오핑은 탄압의 칼날을 휘둘렀습니다.

보수파와 개혁파는 경제 정책에서는 이견을 보였지만 노동자를 착취하고 청년학생들을 억압하는 데서는 한 편이었습니다. 덩샤오핑은 ‘지하’ 잡지들이 발간되고 자유연애를 칭송하는 소설이 발간되자(‘베이징의 봄’) 이를 “부르주아적 자유화”라고 비난했습니다. 이를 억누르고자 기꺼이 ‘마오쩌둥주의’도 꺼내 들었습니다.

당시 〈인민일보〉의 부편집장 왕뤄수이는 사회주의 사회에서도 소외 문제가 있다며 마르크스주의의 출발점으로 휴머니즘을 강조했습니다. 그러자 덩샤오핑은 휴머니즘과 소외론을 부르주아 자유화의 한 종류라고 비난하며 ‘정신오염 제거’ 운동을 펼쳤습니다.

그러나 저항을 제압하려고 사회적 통제를 강화하는 이전 방식으로 되돌아가는 것은 경제 개혁을 위축시킬 우려가 있었습니다.

이런 모순 때문에 1980년대 중국 지배계급 내에는 경제와 정치 영역 모두에서 급진적 개혁을 지지하는 관료도 있었습니다. 당시 국가 주석인 후야오방(胡耀邦)은 민주화 운동에 우호적이었고, 덩샤오핑과 원로들의 퇴진을 공공연히 주장했습니다.

후야오방은 공산당 외부의 민주 인사들의 지지를 받았고, ‘베이징의 봄’ 운동과 1985~86년의 학생운동을 지지했습니다. 이 때문에 1987년에 정치 일선에서 물러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1989년 4월 15일 그의 사망을 계기로 민주화를 바라던 학생들이 저항에 나서면서 톈안먼 항쟁이 시작됐던 것은 우연이 아니었습니다.

덩샤오핑은 1978년 개혁을 시작해 경제 구조를 바꾸고 마오쩌둥이 전횡하던 정치 관행을 없애려 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강력한 중국을 건설하기 위해서였지 마오쩌둥 시절 착취받고 억압받았던 노동자와 농민 그리고 청년학생들의 해방을 위해서가 결코 아니었습니다.

덩샤오핑은 개혁·개방이 공산당의 통제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그 폭을 제한했습니다. 노동자와 농민에 대한 착취 강화를 지지했고, 이들에게 반란의 기운을 제공하지 못하도록 청년학생들을 단속했습니다.

덩샤오핑은 1989년 톈안먼 항쟁을 진압하고 나서 오히려 더 급속히 경제 구조 개혁을 추진했습니다. 톈안먼 항쟁 진압을 통해 한편으로 양상쿤과 리펑 등 보수파를 제압할 수 있었고, 다른 한편으로 노동자 저항의 예봉을 미리 꺾어 놓았기 때문입니다.

덩샤오핑의 개혁·개방 정책으로 중국이 세계 2위의 경제 대국이 됐다는 평가가 흔합니다. 그러나 그 성장은 불평등 증대와 숱한 탄압과 톈안먼 대량 학살 위에서, 그리고 무엇보다 세계 자본주의 환경이 중국에 우호적이었던 상황에서 가능했던 것임을 직시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