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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투쟁과 경제 투쟁의 동반 상승효과: 로자 룩셈부르크에게서 배운다

이 기사는 12월 7일에 같은 제목으로 열린 노동자연대 온라인 토론회(영상 보기)의 발제를 다듬어 발표하는 것이다.

〈노동자 연대〉 신문의 이번 호(제 443호, 12월 3일치) 1면 헤드라인은 “화물연대 투쟁과 반윤석열 투쟁은 만나야 한다”입니다. 지난 토요일(12월 3일) 윤석열 퇴진 집회는 그럴 가능성을 보여 줬습니다. 그날 집회의 초점은 사실상 화물연대 파업 지지였습니다. 그리고 그날 집회의 하이라이트는 화물연대 부위원장이 연단에 올라 화물연대 투쟁 지지를 호소하고 이에 집회 참가자들이 뜨겁게 호응하는 장면이었습니다.

윤석열 퇴진 운동 측의 화물 파업 지지는 그 운동이 정치적으로 진화하고 있음을 보여 줍니다.

집회 주최 측은 윤석열 정부의 화물연대 파업 탄압이 윤석열이 퇴진해야 하는 또 하나의 이유라고 강조했습니다.

윤석열 퇴진 운동은 현재 정치적으로 가장 앞서 있는 운동입니다. 겨우 몇 개월 전 대선에서 지배계급을 대변해서 후보로 나와 지금 지배계급의 일상적 집행부의 최고 책임자를 맡고 있는 사람을 끌어내리자고 하니 말입니다.

현재 정의당·진보당 등 주류 좌파 정당들은 이 운동보다 뒤처져 있습니다. 정의당·진보당은 1년 4개월 뒤 치를 총선에서 윤석열을 심판할 때까지 기다리자고 말합니다.

윤석열 퇴진 운동 측이 화물연대 파업에 주목하는 것은 옳습니다. 화물연대 파업이 정세와 세력균형의 변화를 가늠할 또 하나의 중요한 시험대가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윤석열 퇴진 운동이 화물 파업 같은 노동자 파업들과 기층에서 연결된다면 큰 효과를 낼 수 있을 것입니다.

정치 투쟁과 경제 투쟁의 개념

그 이유를 말하기에 앞서 오늘 토론회 제목에 있는 정치 투쟁과 경제 투쟁의 개념을 설명하겠습니다.

경제 투쟁은 보통 개별 기업이나 개별 산업부문의 (임금이나 일자리 등) 노동조건을 둘러싼 투쟁을 말합니다.

정치 투쟁은 실제로 노동계급 일반이 참가하는 투쟁이거나, 아니면 노동계급 일반에 관련된 정부 정책 문제를 둘러싸고 일어나는 투쟁을 말합니다.

1987년 7~8월 노동자 투쟁은 여러 동시다발적 경제 투쟁들의 연쇄였습니다.

다른 한편, 1996년 연말과 1997년 연초의 민주노총 파업은 노동법 개악안 통과를 철회시키려 했던 정치 투쟁이었습니다.

경제 투쟁은 부문적인 (또는 부분적인) 투쟁입니다. 반면, 정치 투쟁은 마르크스의 말을 빌리면 “계급 대 계급의 투쟁,” 전면적인 투쟁입니다.

예를 들어, 화물연대 파업은 생계비 위기에 맞선 노동계급 일부의 투쟁이지만, 다른 다양한 노동자 부문들이 동시에 동조 파업을 벌인다면 정치 투쟁이 됩니다.

철도 파업과 지하철 파업이 취소되지 않았다면 조만간 이런 일이 일어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이 점에서 철도 파업이 취소된 것은 안타까운 일입니다.(반면 일부 건설 노동자들이 동조 파업에 들어간 것은 매우 반가운 일입니다.)

이처럼, 정치 투쟁과 경제 투쟁 사이에 만리장성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화물연대 파업은 경제 투쟁임과 동시에, 정부가 앞장서서 개입하면서 매우 정치적인 성격을 띠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투쟁을 정치적인 경제 투쟁이라고 부릅니다.

윤석열 정부는 투쟁의 선봉에 선 화물연대를 탄압하고, 서울지하철과 철도노조는 협상과 교섭으로 무마해 노동자 투쟁의 정치화를 막고 있습니다.

정부는 그런 사태 발전을 가장 두려워합니다.

정치 투쟁과 경제 투쟁의 동반 상승효과: 로자 룩셈부르크의 통찰

정치 투쟁과 경제 투쟁이 함께 또는 잇달아 일어나면 어떤 효과가 날까요? 이 점에 관해 20세기 초에 폴란드계 독일 혁명가 로자 룩셈부르크가 제공한 통찰에서 배울 수 있습니다.

룩셈부르크는 1906년에 《대중 파업, 정당, 노동조합》이라는 소책자를 썼습니다. 이 소책자에서 룩셈부르크는 1896~1905년에 이르는 10년 동안 러시아에서 고양됐던 파업 투쟁의 물결을 개괄적으로 묘사하고, 1905년 러시아 혁명을 자세히 분석했습니다.

룩셈부르크는 이 사건들에서 영감을 얻어 다음 세 가지 결론을 도출했습니다.

첫째, 경제 투쟁과 정치 투쟁, “둘 사이에는 상호작용이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경제 투쟁이 정치 투쟁으로 발전하고, 정치 투쟁은 다시 경제 투쟁에 비옥한 토양을 제공해 동반 상승효과를 낸다는 것입니다.

이는 경제 투쟁과 정치 투쟁 사이에 만리장성을 세우는 개혁주의 지도자들과는 정반대되는 주장이었습니다.

실제로 1905년 러시아에서 두 투쟁의 연쇄적 상호작용이 일어났습니다.

1905년 1월 초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의 푸틸로프 금속 대공장에서 노동자 네 명이 해고된 것에 항의해 파업이 시작됐습니다.

차르 정부의 경찰이 이 파업을 공격하자 이에 항의하는 정치 파업이 도시 전체로 확산됐습니다.

이런 정치 파업은 “계급 감정”을 자극해 노동자들이 경제적 조건을 개선하기 위한 투쟁에 나서도록 했습니다.

어떤 노동자들은 8시간 노동을 위해 싸우고, 다른 노동자들은 임금 인상을 위해 싸웠습니다. 노동자들을 못 살게 굴던 중간 관리자를 쫓아내기도 했습니다.

이런 경제 파업이 이번에는 정치 파업에 동력을 제공했습니다. 1월 22일(그레고리력으로는 1월 9일) 약 20만 명의 파업 노동자들이 8시간 노동, 언론·출판·집회의 자유 같은 민주적 권리, 러·일 전쟁 중단 등을 요구하며 차르의 집무실로 행진했습니다.

차르의 경호실 부대가 이들에게 발포했습니다. 1000명이 살해당했고 2만 명이 부상당했습니다. ‘피의 일요일’로 불리는 그 학살이 1905년 러시아 혁명의 기폭제가 됐습니다.

러시아 노동자들은 그해 11월경에는 노동자 소비에트, 즉 노동자 평의회를 통해 차르 퇴진을 요구했습니다.

룩셈부르크가 내린 둘째 결론은 정치 투쟁과 경제 투쟁의 동반 상승효과를 통해 기존의 보수적 관념들이 허물어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일상적 시기에는 서로 다른 산업부문들 사이의 전통적인 경계가 뚜렷합니다. 이를 두고 부문주의라고 부릅니다. 부문주의 때문에 노동자들은 단결해서 정부나 시스템이나 심지어 공통의 사용자에 도전하지 못하는 일이 흔합니다.

그러나 정치 투쟁과 경제 투쟁이 동시적으로 일어나거나 아니면 갈마들면 상승효과가 일어나 이 경계가 무너집니다.

그러면, 노동자들을 분열시키고 때로 서로 싸우게 만드는 일, 가령 비정규직 차별 같은 문제에 노동자들이 도전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노동자들의 사기와 자신감이 더욱 충만해집니다.

이것은 룩셈부르크의 세 번째 통찰로 이어집니다. 대중 파업을 통해 노동자들은 스스로 변하고, 변화 염원을 더욱 키우고, 사회를 재편하기에 적합한 계급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바로 100여 년 전 러시아 노동자들이 그랬습니다. 그들은 1905년의 경험을 더욱 발전시켜 1917년에는 노동자 소비에트와 병사 소비에트를 통해 임시정부를 전복하고 노동계급 자신의 정부를 세웠습니다.

정치 투쟁과 경제 투쟁의 분리

룩셈부르크는 혁명적 또는 혁명에 육박하는 준혁명적 상황에서 일어나는 대중 파업에 대해 얘기했습니다.

그러나 혁명에 못 미치지만 거대한 반란의 상황에서도 정치 투쟁과 경제 투쟁의 결합이 일어납니다. 1987년과 1989년 한국에서 그런 일이 일어났습니다.

1987년 6월항쟁은 언론이나 학술 논문들의 주장과 달리 청년·학생들과 사무직 남성 노동자들(“넥타이 부대”)만의 투쟁이 아니었습니다. 다양한 노동자들도 개인으로서 또는 소집단을 이뤄 항쟁에 참가했습니다.

마침내 6월 말 군부 독재가 굴복했습니다.

그러자 싸울 자신이 생기고 사기가 오른 노동자들은 그 직후부터 자신들의 조건 개선을 위해 우후죽순으로 수많은 경제 투쟁들을 벌이며 노동조합을 설립했습니다. 이런 경제 투쟁들은 당시에 주로 파업의 형태를 띠었습니다.

이 투쟁들은 1989년에는 반정부 투쟁들과 연계되면서 둘 다 성장했습니다.

그러나 정치 투쟁과 경제 투쟁이 결합되지 않는 경우를 더 자주 볼 수 있습니다. 정치 투쟁과 경제 투쟁의 분리는 노동자들이 정치적 힘을 발휘하기 위해 경제적 힘을 동원하는 것을 차단합니다.

가령 2016년 말 박근혜 퇴진 운동 중에 정치 투쟁과 경제 투쟁의 시너지 효과는 불발했습니다. 9월 하순 시작된 철도 노동자 투쟁이 10월 하순 박근혜 퇴진 투쟁으로 이어진 건 장차 연결 가능성을 예고하는 듯했습니다. 그러나 박근혜 퇴진 집회가 12월 초순 전국적으로 2백30만 명이 참가해 정점을 찍고도 수많은 경제 투쟁들의 광범한 분출은 없었습니다.

그래서 박근혜를 직접 타깃으로 삼은 위대한 반부패 민주주의 투쟁은 한층 더 높은 수준으로 성장·전화하지 못했고, 덕분에 문재인의 노골적인 자본주의 개혁 정부가 들어섰습니다.

그 뒷이야기는 시간 제약상 생략하겠습니다.

경제 투쟁과 정치 투쟁이 분리되는 것은 노동조합의 개혁주의적 지도층과 개혁주의 정당의 정치인들이 합심해 둘을 분리시키려 애쓰기 때문입니다.

다시 박근혜 퇴진 운동 사례로 돌아가 봅시다. 그 운동이 한창 벌어지고 있던 2016년 12월 9일, 심상정 정의당 대표와 철도노조·공공운수노조 지도부는 민주당의 자유주의 정치인들과 야합해 철도 파업을 중단시켰습니다. 그날 국회에서 박근혜가 탄핵됩니다.

개혁주의자들은 철도 파업을 끝내기를 강력히 요구하는 민주당과 심지어 일부 새누리당 의원들까지 끌어들여 탄핵소추를 성사시키려 했던 것인데, 이런 합헌적 절차를 밟아야 아래로부터의 거대한 반란을 무마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개혁주의자들은 자본주의적 민주주의가 강요하기도 하고 고무하기도 하는, 정치 투쟁과 경제 투쟁의 분리를 기꺼이 받아들입니다.

정치 투쟁과 경제 투쟁의 분리는 노동조합의 경제주의와 부문주의를 강화합니다. 이런 파편성이 저항이 전진하지 못하도록 내리누르는 무거운 납덩이가 돼 왔습니다.

이런 분리를 기층의 활동가들이 받아들인다면, 노동조합은 노동조건·생활조건 문제를 갖고 싸우고 정치는 민주당이나 정의당 같은 개혁주의 정당들에 맡기겠다는 생각입니다.

그리고 이런 정/경 분업은 의회를 통해 진정한 변화를 이룰 수 있다는 잘못된 희망으로 노동자들을 이끌 수 있습니다.

지난주 토요일 화물연대 파업을 지지하는 집회에서 양경수 민주노총 위원장은 “윤석열 심판”을 주장했습니다. 1년 4개월 뒤 총선에서 윤석열을 패퇴시키자는 것입니다. 이런 선거 심판론은 다가온 기회를 놓치고 노동자들을 유권자로 국한해 수동적으로 만들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막상 지배자들은 실제로는 정치와 경제를 분리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정치 권력과 경제 권력을 모두 사용해 저항을 분쇄하려고 합니다.

윤석열은 화물연대 파업이 ‘불법’이고 ‘정치 파업’이라고 비난하며 업무개시명령을 발동했습니다. 사용자 단체인 경총은 정부의 파업 탄압을 환영하고 업무개시명령을 확대하라고 촉구합니다. 친사용자 언론은 화물연대가 “사회적 약자”를 볼모 삼아 파업한다며 윤석열의 파업 탄압을 정당화합니다.

혁명적 좌파의 구실이 중요하다

지금까지 봤듯이, 정치 투쟁과 경제 투쟁의 연결은 결코 자동적이지 않습니다.

노동계급의 의식이 불균등하고, 구체적인 정치 상황과 계급세력 균형에 따라 노동자들의 자신감과 사기가 오르내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노동조합과 개혁주의 정당의 개혁주의적 지도자들은 이런 불균등성을 극복하려 하기보다는 오히려 편승해, 흔히 자기제한적으로 투쟁에 일정한 상한선을 설정합니다.

1996년 12월~1997년 1월에 벌어진 민주노총 파업에서도 그런 사례를 볼 수 있었습니다. 당시 민주노총은 노동법·안기부법 개악에 반대해 파업했습니다. 기층 조합원들이 가하는 압력 때문에 민주노총 지도부는 파업을 명령해 최대 38만 명가량이 파업에 참가했습니다.

그러나 민주노총 지도부는 처음부터 그 과정을 엄격히 통제하다 파업이 확대일로를 걷던 와중에 돌연 “수요일 파업”으로 전환했습니다.

한보철강 부도 등 경제 위기가 엄습해 오고, 정치 파업의 영향으로 경제 파업들이 일어날 조짐이 보이자 파업을 종료한 것입니다.

지금 화물연대 파업에 대해서도 민주노총 지도자들은 뒤늦은 총파업을 명령했지만 그 효과는 그다지 크지 않을 것 같습니다.

룩셈부르크는 대중 파업에 나선 노동자들이 사회민주당과 노동조합의 개혁주의적 지도자들을 거슬러 전진할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노동조합 관료층과 개혁주의 정당의 영향력을 과소평가해선 안 됩니다.

대중 파업이 자동으로 경제 투쟁과 정치 투쟁의 연결 및 기존 국가 권력에 대한 도전으로 나아가는 것은 아닙니다. 혁명적 조직의 구실이 결정적으로 중요합니다.(‘혁명적 당에 관한 다섯 가지 물음’을 보시오.)

한국에서도 지난 4반세기 동안 노동조합 관료층의 영향력 하에서 룩셈부르크가 묘사한 것과는 공통점이 별로 없는 파업들이 벌어져 왔습니다. 경제 투쟁과 정치 투쟁의 분리, 부문주의가 점차 자리잡았습니다.

이제 경제 위기가 심각해지면서 지정학적 위기와 정치적 불안정 등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노동자 투쟁에 대한 윤석열 정부의 강경 대응은 이런 상황을 반영하는 것입니다.

이에 맞서 노동자들의 조건을 지키려면, 경제 투쟁과 정치 투쟁을 연결시켜야 합니다.

앞서 강조했듯이 이런 과정은 결코 자동적이지 않습니다. 〈노동자 연대〉 신문 지지자들이 경제 투쟁 참가자들을 정치 투쟁에도 참가케 하고 그 반대 방향도 성사시키도록 애써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