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7일 ‘10·29 이태원 참사 시민대책회의’(이하 시민대책회의)가 발족했다. 참여연대 등 엔지오들과 전국민중행동 등이 참가하고 있다. 그러나 시민대책회의는 유가족을 중심으로 활동하고 있다.

박석운 전국민중행동 대표는 이렇게 말했다. “유가족을 주체로 세워야 한다. … 대책회의는 유가족들이 내세우는 것을 그대로 받아안는다.”(12월 17일 민교협2.0 등이 주최한 토론회 ‘이태원 참사의 성격과 한국 정치’에서 한 말.)

12월 7일 ‘10·29 이태원 참사 시민대책회의’ 발족식 ⓒ출처 전국민중행동

유가족들이 체념하지 않고 스스로 조직하고 행동에 나서는 것은 절대로 옳은 일이다.

지금 유가족들은 정부의 뻔뻔한 책임 회피와 우파 정치인들의 막말에 피가 거꾸로 솟는 듯한 분노를 느끼고 있다.

물론, 그렇다고 대통령 윤석열을 참사의 정치적 책임자로 지목해 퇴진을 요구하지 않는다.(이태원 참사의 직접적 책임이 윤석열에게 있다는 논증은 다음 기사를 참고하라. 본지 440호, ‘이태원 참사, 왜 윤석열 책임인가?’)

유가족들이 정치적으로 동질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이정민 이태원 참사 유가족협의회 부대표는 이렇게 말했다. “유가족들 중에는 국민의힘을 지지하는 분들도 많이 있다.”

일부 유가족이 윤석열 퇴진 집회에서 발언하기도 했지만 실제로 많은 분들은 윤석열 퇴진 촛불을 부담스러워 한 것으로 알려졌다.

〈노동자 연대〉는 11월 16일에 이렇게 썼다.

“이태원 참사 희생자 유가족이 (집단으로든 개별로든) 윤석열 반대 운동에 참가하는 것은 소중한 보탬이 될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운동이 꼭 유가족을 중심에 놓고 — 즉, 그들이 이끌어 — 건설돼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

“윤석열에 확고하게 반대하는 대중 운동이 필요하다.”(441호, ‘참사 희생자 명단 공개 논란: 윤석열 정부가 명단 공개 막은 것이 진정한 문제다’)

시민대책회의는 유가족을 중심에 놓으면서 스스로 윤석열에 대한 정면 공격을 피해야 하는 처지가 됐다. 시민대책회의의 “5가지 활동 기조”에도 윤석열 책임 부분이 전혀 담겨 있지 않다. 유가족들이 제시한 6대 요구 사항과 대동소이하다.

“겹쳐지지 않도록” 애쓰기

박석운 대표는 시민대책회의가 윤석열 퇴진 운동과 “겹쳐지는 부담감”을 피하려고 이태원 참사를 중심으로 활동하기로 했다고 말했다.

12월 7일 시민대책회의가 발족하기 훨씬 전인 11월 내내 윤석열 퇴진 운동은 “퇴진이 추모”라는 슬로건을 내걸며 대규모 항의를 하고 있었다.

물론 윤석열 퇴진 운동은 이태원 참사 항의에 국한된 부분적 운동은 아니다. 윤석열 정부에 대한 전면적 반대를 표방하는 운동이다.

그러나 윤석열 퇴진 운동이 주목할 만한 탄력을 받게 된 계기는 두 가지였다. 그것은 화물연대 파업과 이태원 참사였다. 그런 만큼 이태원 참사 항의는 윤석열 퇴진 운동의 중요한 요소이다. 이후 퇴진 운동은 매주 수천에서 수만 명 규모로 크게 성장했다.

이태원 참사 직후 열린 11월 5일 윤석열 퇴진 집회 ⓒ조승진

만약 시민대책회의가 유가족협의회와 독립적으로 조직해 서로 연대하며 활동하기로 한다면 굳이 윤석열 퇴진 운동과 스스로를 예리하게 분리시키지 않아도 될 것이다.

그러나 이미 11월 12일에도 민주노총과 전국민중행동은 윤석열 퇴진 집회와 같은 시각에 경쟁적으로 (윤석열 퇴진을 요구하지 않는) 시민 추모 촛불을 개최해, 조합원들의 윤석열 퇴진 집회 참가를 차단한 적이 있다.

대중 운동의 잠재력을 두려워하기

이런 사례들은 개혁주의자들이 윤석열 퇴진 요구를 억누르려 애쓴다는 점을 보여 준다. 개혁주의자들은 선거와 의회 등 헌정 질서 내에서 질서 정연한 변화를 추구한다.

러시아의 혁명가 트로츠키는 이렇게 말했다. “개혁주의자들은 대중 운동의 혁명적 잠재력을 두려워한다. 개혁주의자들이 좋아하는 무대는 의회 연단, 노조 사무실, 중재 기구, 장관 면담실이다.”

현재 한국이 혁명적 상황은 아니지만, (세계 자본주의 체제의 유기적 일부로서) 한국 자본주의는 심각한 위기 — 경제·지정학적 위기와 그로 인한 정치 위기 — 를 겪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는 개혁주의자들은 자신들이 통제할 수 없는 대규모 투쟁이 벌어질까 봐 전전긍긍한다.

박석운 전국민중행동 대표가 윤석열 퇴진 촛불 운동을 “애로 사항 중 하나”로 언급하면서도 윤석열 퇴진 운동을 “배제”하지 말고 “소통”·“협조”해야 한다고 말한 것은 퇴진 운동이 통제에서 벗어날까 봐 우려해서일 것이다.

오늘날 많은 나라들에서 개혁주의자들이 운동을 일정 수위 이하로 억제해 자본주의 체제의 안정화에 기여하려 하는 경우를 볼 수 있다.

대중 투쟁보다 선거를 활동의 중심에 두는 한국의 많은 좌파들이 주목하는 칠레의 경험도 그중 하나다.

2019년 10월 칠레 대중은 지하철 요금 인상 반대에서 시작해 순식간에 신자유주의 전반에 도전하는 급진적이고 전투적인 운동으로 나아갔다.

그러자 11월에 정부가 기만적인 “평화협정”을 제안했다. 핵심 내용은 개헌 국민투표를 실시하되 시위대 탄압을 주도했던 당시 대통령과 책임자들을 처벌하지 않기로 한 것이었다.

개혁주의자 가브리엘 보리치는 정부 안을 수용했다. 대중 투쟁의 절정 속에서 칠레 좌파의 압도적 관심은 무려 2년 뒤에 있을 대통령 선거로 빠르게 이동했다.

2021년 12월 보리치가 대통령에 당선됐다. 그러나 보리치는 개혁 약속을 배신해 대중의 환멸을 샀고, 결국 지난 9월 개헌 국민투표에서 우파에 패배했다.

선거 중심 한국 좌파들은 보리치가 “평화협정”에 타협함으로써 집권으로 가는 길을 닦을 수 있었다고 평가한다. 즉, 운동이 체제에 근본적으로 도전하지 못하도록 일정 수위 이하로 억제하고 사회 평화와 체제 안정 속에서 점진적 개혁을 이룰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