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 말 지독한 유대인 혐오가 낳은 부정의가 프랑스 사회를 둘로 갈랐다. 그리고 125년 전 1월, 소설가 에밀 졸라가 공개적으로 이 부정의에 반대하는 목소리를 냈다. 영국의 혁명적 좌파 신문 〈소셜리스트 워커〉 편집자 찰리 킴버가 드레퓌스 사건의 정치학을 살펴본다.

곤경에 처한 지배계급은 희생양을 찾는다. 1894년 간첩죄로 기소된 알프레드 드레퓌스 육군 대위는 당시 위기에 시달리던 프랑스 최상층 엘리트들에게 안성맞춤인 희생자였다.

드레퓌스는 유대인이었고 프랑스의 모든 숭고한 것을 더럽히는 “이방인”의 전형으로 악마화됐다.

그로부터 몇 해 전, 프랑스 지배층은 파나마 운하 건설과 연관된 거대한 부패 사건으로 신뢰가 실추됐다.

뇌물 공여에 연루된 많은 인물 중 두 명이 유대인이었다. 유대인 혐오적인 말과 글을 쏟아 내던 많은 언론과 정치인은 이러한 사실에 더 광분했다. 유죄가 자명해 보인 드레퓌스의 혐의는 이러한 유대인 혐오에 기름을 부었다.

알프레드 드레퓌스 육군 대위

비공개로 열린 군사 재판에서 재판부는 드레퓌스가 군사 기밀을 독일에 팔아넘겼다는 판결을 내렸다. 재판부는 그에게 종신형을 선고했다.

유죄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드레퓌스는 남아메리카의 악명 높은 유형지 ‘악마의 섬’으로 유배됐다.

당국은 해안선 길이가 3킬로미터가 채 안 되고 평균 폭이 400미터에 불과한 불모의 섬에 드레퓌스와 그를 감시할 경비병들만 빼고는 아무도 남겨 놓지 않았다. 드레퓌스는 돌 오두막에서 끊임없는 감시를 받으며 살았다.

국가의 심장부에 그런 반역 분자들이 있으니 지난 전쟁[보불 전쟁]에서 프랑스가 독일에 진 게 당연하다는 얘기가 나왔다.

드레퓌스 사건은 외부의 적을 내세워 국민을 단결시키고 1871년 파리 코뮌 노동자 반란의 기억을 더한층 약화시키는 데 이용될 수 있었다.

그 유죄 판결을 의심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러나 드레퓌스에게 불리한 증거들은 모두 위조된 것이었다. 처음에는 드레퓌스의 가족이, 나중에는 더 넓은 층의 지지자들이 당국의 공식 설명을 무너뜨리기 시작했다. 여러 좌파와 몇몇 자유주의자가 드레퓌스를 옹호하고 나섰다.

비방

사회의 모든 부패한 부류가 일제히 드레퓌스의 유죄를 주장하며 드레퓌스 지지자를 매국노 쓰레기라고 헐뜯었다.

우파는 드레퓌스 석방 요구의 배후에 유대인, 사회주의자, 외국인들로 이뤄진 지하 “신디케이트”가 있다는 거짓말을 퍼뜨렸다.

우파는 이 신디케이트가 판사들과 증인들을 매수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래서 군에 대한 국민의 신뢰를 무너뜨리고, 군사 기밀을 유출하고, 그렇게 해서 프랑스가 무방비해진 틈을 타 독일이 쳐들어올 기회를 제공하려 한다고 우파는 주장했다.

“만평가들은 반지를 끼고 시곗줄을 찬 채 사악한 표정으로 우쭐대는 뚱뚱한 유대인의 모습으로 이 신디케이트를 의인화했다”고 역사가 바바라 터크먼은 전한다.

드레퓌스 사건은 1897년 여름부터 1899년 여름까지 2년간 프랑스 정치 생활을 지배했다. 훗날 총리가 되는 사회주의자 레옹 블룸은 이 쟁점을 두고 “진정한 내전”이자 “프랑스 대혁명 못지 않은 격렬한 인도적 위기”가 벌어졌다고 썼다.

세계적으로 가장 많이 번역되는 작가의 한 명인 소설가 에밀 졸라는 1898년 1월 13일 자유주의 신문 〈로로르〉를 통해 “나는 고발한다”는 제목의 4000단어짜리 글을 발표했다. 그 신문은 [평소의 10배인] 30만 부가 팔렸다. 일부는 군부 지지자들이 거리에서 불태우려고 산 것이지만 말이다.

졸라가 많은 유력 인사를 실명을 들먹이며 공격하는 대담한 방식으로 기사를 썼기에, 여기에 거론된 인사들은 졸라를 상대로 명예훼손 소송을 걸 수밖에 없었다. 이 때문에 드레퓌스 사건이 대중적으로 다시 관심받게 됐다.

(좌)소설가 에밀 졸라, (우)“나는 고발한다”가 실린 1898년 1월 13일자 〈로로르〉

에밀 졸라는 이렇게 썼다. “나는 비오 장군을 고발한다. 그는 드레퓌스의 결백을 입증할 확실한 증거를 손에 넣고도 정치적 동기와 총참모부의 체면을 지키려는 의도로 이를 은폐했다.

“나는 부아데프르 장군과 공스 장군을 공범으로 고발한다. 부아데프르는 의심할 바 없이 종교적 편견의 발로로, 공스는 아마도 육군성을 불가침의 성역으로 만들려는 조직 보위 정신의 발로로 그 범죄를 저질렀을 것이다.”

에밀 졸라는 누가 진정한 간첩범인지를 지목하고 “우리 시대의 사회악, 즉 ‘추잡한 유대인’이라는 강박 관념”을 강력히 규탄했다.

졸라의 기사는 드레퓌스 사건을 국제적 사건으로 만들었고, 졸라는 그가 바랐던 대로 수많은 소송장을 받게 됐다. 역풍이 어찌나 격렬했던지 졸라는 금세 명예훼손으로 형사 기소됐고, 구속을 피하기 위해 영국으로 망명해야 했다.

그러나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군부가 드레퓌스에게 누명을 씌웠다는 사실을 알 수 있게 됐다.

사회 운동

‘인권 동맹’이라는 거대한 사회 운동이 프랑스 전역에서 대중 집회를 열었다.

인권 동맹은 드레퓌스 석방을 위한 대중적 청원 운동을 벌였고 모든 사람이 여기에 이름을 올릴지 말지 결정해야 하는 선택에 직면했다. 온 마을 사람이 청원서에 서명하는가 하면 어떤 마을은 전원이 서명을 거부했다.

거리에서 성장하는 운동의 압력으로 1899년 말 재심 군사 재판이 열려 드레퓌스는 ‘악마의 섬’ 감옥에서 나오게 됐다.

그러나 재심 법정은 논란을 무릅쓰고 기존 유죄 평결을 되풀이했다. 드레퓌스의 무죄를 인정했다가는 군부가 뒤흔들릴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사태가 격화되는 것을 막기 위해 대통령이 드레퓌스를 사면했다. 드레퓌스의 결백이 완전히 인정되기까지는 여러 해가 더 걸렸다.

1895년 1월 5일 드레퓌스의 해임식 현장을 그린 그림. 프랑스 지배계급은 사회적 위기에서 벗어나기 위해 증거를 조작해 드레퓌스를 간첩으로 몰았다 ⓒ출처 Henri Meyer

드레퓌스 사건은 사회주의자들을 분열시켰다. 이것은 유대인 혐오에 대한 태도 문제가 아니라 사건에 연루된 계급 세력들에 관한 것이었다.

쥘 게드는 “사회주의, 오직 사회주의 건설”이라는 슬로건을 제시했다. 게드는 드레퓌스 사건이 지배 집단들 사이의 다툼일 뿐 사회주의자들에게는 아무런 중요성이 없다고 주장했다.

지배자들 사이의 차이가 무엇이든 간에 결국 사건의 모든 중심 인물은 파리 코뮌을 분쇄한 군부의 일부라고 게드는 주장했다.

주요 노조 활동가들과 몇몇 아나코-신디컬리스트는 이 모든 사태가 부르주아지의 속임수이자, 중요한 문제에서 주의를 돌리려는 수작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또 다른 저명한 사회주의자 장 조레스는 노동자들이 모든 민주주의 문제와 씨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조레스는 이렇게 말했다. “오늘날 장군들의 전횡으로, 군대에서 자행되는 미화된 폭력으로 가장 위협받는 사람들은 누구인가? 누구냐고? 바로 노동계급이다.

“따라서 노동계급은 군사 법정의 불법 행위와 폭력이 모두가 인정하는 관례가 되기 전에 이를 처벌하고 막는 데 최우선의 이해관계가 있다.”

조레스는 지배계급을 약화시키는 데 사회 상층부의 분열을 이용할 수도 있다고 지적했다.

장 조레스는 폴란드계 독일 혁명가 로자 룩셈부르크의 지지를 받았다. 룩셈부르크는 초기 저작에서 이런 점을 주장했다. 어떤 면에서 룩셈부르크의 주장은 몇 년 후 러시아 혁명가 블라디미르 레닌이 제시한 바를 예시한다.

룩셈부르크는 이렇게 썼다. “계급투쟁의 원리는 부르주아지 내부에서 일어나는 조금이라도 중요한 모든 정치적, 사회적 갈등에 노동계급이 적극 개입할 것을 명령한다.”

룩셈부르크는 드레퓌스 사건이 “군국주의, 배외주의-민족주의, 유대인 혐오, 교회의 힘”과 연루된 문제라고 봤다. 룩셈부르크는 “이런 적들과의 투쟁에 나서지 않는 것은 완전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될 것이라고 역설했다.

그리고 “노동계급의 적인 군국주의가 완전히 모습을 드러내고 있고 모든 창끝이 이를 향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그러나 또한 룩셈부르크는 사회주의자가 드레퓌스 사건에 관해 선동할 때 “사회주의자를 운동의 다른 분파들과는 구별시켜 주는 뚜렷한 성격의 계급투쟁으로” 문제에 접근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혁명가는 단지 노동조합 활동가가 아니라 피억압자들의 호민관이 돼야 한다는 조레스와 룩셈부르크의 지적은 옳았다. 억압은 사람들의 삶을 망가뜨릴 뿐 아니라 노동계급의 단결을 해치는 무기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드레퓌스 사건을 둘러싼 사회주의자들의 논쟁은 이것이 전부가 아니었다.

입각

“나는 고발한다”가 발표된 지 1년도 지나지 않은 시점에서 보수 정당 소속의 총리가, 조레스를 지지하는 사회주의자인 알렉상드르 밀랑에게 각료직을 제안했다.

총리는 이것이 드레퓌스 사건을 끝내고 새 정부에 대한 지지를 넓힐 최선의 방안이라고 여겼다. 밀랑의 입각은 파리 코뮌의 학살자 갈리페 장군을 전쟁 장관으로 임명한 것에 대한 “균형 잡기”가 될 터였다.

이것은 사회주의자가 공공연하게 자본가를 대변하는 정부에 입각한 최초 사례였고, 이는 다시 좌파를 날카롭게 분열시켰다. 조레스는 밀랑의 입각이 드레퓌스 사건의 논리적 귀결이자, 자본가와 노동자가 공동으로 사회를 지배하는 과도적 단계를 나타낸다며 이를 옹호했다.

그러나 룩셈부르크는 유럽 사회주의 운동의 몇몇 최고 이론가와 논쟁을 벌이며 조레스의 주장을 반박했다. 룩셈부르크는 정부의 계급적 역할은 인사 교체로 바뀌지 않는다고 했다.

“사회주의자의 부르주아 정부 입각은 흔한 생각과 달리, 사회주의자가 부르주아 국가를 부분적으로 정복하는 게 아니다. 부르주아 국가가 사회주의 정당을 부분적으로 정복하는 것이다.”

이는 훗날 사회민주주의 정당들이 휩싸이게 되는 ‘개혁이냐 혁명이냐’를 둘러싼 논쟁을 예고했다.

거의 모든 사회민주주의 정당은 부르주아 국가에 적응했고, 1914년 제1차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자국 지배계급을 편들며 다른 나라 노동자에 대한 학살을 지지했다.

밀랑에 대한 룩셈부르크의 경고는 전적으로 옳았다. 밀랑이 참여한 정부는 드레퓌스를 감옥에 가게 한 자들의 기소를 거부했다. 밀랑은 그런 정부를 급진적으로 보이게 포장하는 구실을 했다.

밀랑은 정의에 대한 요구를 내던짐으로써 정부에 남는 대가를 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