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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론타이와 러시아혁명

3월 8일은 국제 여성의 날이다. 이 날은 1917년에 러시아혁명의 도화선이 됐다. 러시아혁명은 여성의 완전한 평등을 과제로 삼은 최초의 사건이었다. 알렉산드라 콜론타이는 여성해방과 사회주의를 위해 투쟁한 러시아혁명의 지도자 가운데 한 명이었다.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에 러시아 여성 노동자들은 빠르게 늘어나기 시작했다. 페테르부르크 여성 노동자의 수는 1890년에 고작 7만여 명이었다. 20여 년 만에 여성 노동자 수는 1백30만 명으로 늘어 전체 노동자의 3분의 1을 차지하게 됐다.

여성 노동자들의 상태는 실로 열악했다. 대개 미숙련 노동자인 여성 노동자들은 하루에 12∼14시간을 환기시설도 없는 공장에서 일하다가, 밤이면 통기창과 화장실도 없는 비좁은 막사에서 잠들었다. 여성 노동자의 평균임금은 남성 노동자의 절반 수준이었고, 남성 관리자들은 성희롱을 일삼았다. 여성들은 출산 직전까지 일했고, 출산 바로 다음 날 출근하지 않으면 벌금을 물어야 했다.

콜론타이는 직물공장을 방문해 이런 여성노동자들의 상태를 목격한 뒤 사회주의자가 됐다. 그 공장의 막사에는 한 아이가 죽어 있었지만 누구도 관심을 기울일 여력이 없었다. 훗날 콜론타이는 그 날의 광경과 악취가 자신의 운명을 결정했다고 말했다.

콜론타이는 1872년 유복한 귀족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녀는 여성을 남편의 장식물로 여기는 세계에서 자랐지만, 그렇게 살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어릴 적부터 러시아에 만연한 사회적 불의를 목격했고, 귀족 출신 여성 나로드니키(민중주의자들)가 황제 암살 계획에 연루돼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얘기도 듣곤 했다.

1896년 러시아에서 대규모 파업이 일어나고 여기에 많은 여성 노동자들이 참가하자 콜론타이는 파업 지지 활동에 적극 뛰어들었다. 여성 노동자들의 참가는 1905년 혁명에서 더욱 두드러졌다. 여성 노동자들은 정치 투쟁의 전면에 나섰고, 산전산후 유급휴가, 보육시설, 수유시간 보장 등도 요구했다.

콜론타이는 이렇게 썼다. “여성노동자 운동은 노동자 운동 전체의 분리될 수 없는 일부이다. 그들은 모든 반란에서 남성 노동자들과 함께 일어났다. … 소심하며 짓밟힌 채 무권리 상태에 처해 있던 여성들은 파업과 격동의 시기에 빠르게 성장해 홀로 우뚝 설 수 있었다.”

1905년 혁명 패배 이후 몇 해 동안 콜론타이는 여성 노동자들을 사회주의 운동에 참여시키기 위해 애썼다. 콜론타이는 여성 노동자 모임을 수백 차례 조직했는데, 이 모임은 경찰 탄압 때문에 ‘바느질 봉사단’으로 위장하기도 했다.

콜론타이는 모든 여성이 공통의 이해관계를 갖는다는 상층계급 페미니스트들의 주장에 반대했다. 콜론타이는 이렇게 주장했다. “여성의 세계는 남성의 세계와 마찬가지로 두 진영으로 나뉘어 있다.” 여성 노동자들에게 평등권은 “오직 [남성 노동자와] 불평등을 똑같이 나누는 것”일 뿐이다. 상층계급 여성들이 일단 정치권력에 접근하면, “이 ‘여성 권리’의 옹호자들은 자기 계급 특권의 열광적 옹호자가 된다. 어린 자매들을 무권리 상태에 내버려두는 데 만족하면서 말이다.”

러시아에서는 1913년에 처음으로 5개 도시에서 ‘국제 여성의 날’ 행사가 거행됐다. 경찰 탄압 속에서도 이 행사는 대성공이었다. 제1차세계대전이 일어나면서 여성 노동자들은 다시 한번 최선두에 섰다. 수많은 여성들이 파업에 참가했다.

1917년 혁명에 불을 댕긴 사람들도 바로 페트로그라드의 여성 노동자들이었다. 이들은 세계 여성의 날에 파업에 돌입했다. 누군가 그 날의 행진을 이렇게 묘사했다. “기아와 전쟁으로 맹렬해진 여성 노동자들은 솟구치는 힘으로 행진로에 있는 모든 것을 파괴해버리는 허리케인처럼 돌진했다.”

망명중이었던 콜론타이는 러시아혁명이 일어났다는 얘기를 듣고 곧바로 귀국했다. 볼셰비키는 여성 노동자들을 정치 활동에 적극 참여시키기 위한 활동 가운데 하나로 〈라보트니차〉(여성 노동자)를 복간했다. 콜론타이는 크룹스카야 등과 함께 이 신문의 편집진이었다.

볼셰비키는 노동자 사이의 격차를 줄임으로써 단결을 도모하려 애썼다. 1917년 2월부터 5월에 이르는 파업의 결과로 숙련 노동자의 임금은 59 퍼센트, 미숙련 노동자의 임금은 1백25 퍼센트 인상됐다. 볼셰비키는 남성 노동자들에게 모성보호나 동일임금 같은 여성 노동자들의 요구를 채택하라고 호소했다.

제1회 전러시아 노동조합 대회에서 콜론타이는 남성 노동자들에게 이렇게 연설했다. “계급의식적 노동자들은 남성 노동의 가치가 여성 노동의 가치에 달려 있다는 점을 이해해야 한다. 자본가들은 남성 노동자들을 저임의 여성 노동자들로 교체하겠다고 협박함으로써 남성의 임금을 압박할 수 있다. 이 점을 이해하지 못했을 때만 이[동일임금] 문제를 순전한 ‘여성 쟁점’으로 여길 것이다.”

러시아 혁명 승리 후 처음 몇 해 동안 발표된 여성 관련 법령들은 여성의 권리를 크게 신장시켰다. 여성 선거권 완전 보장, 이혼 간소화, 서자 차별 금지, 동일임금, 출산 휴가 4개월 보장, 낙태 합법화와 무료 시술, 동성애 처벌 폐지 …. 오늘의 눈으로 봤을 때도 엄청난 진보가 1백년 전에 유럽 최후진국에서 이뤄졌다.

하지만 이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법률만으로는 여성의 진정한 평등을 쟁취하기에 충분하지 않았다. 혁명 전부터 콜론타이는 자본주의 하의 가족의 구실에 여성 억압의 기초가 있다고 주장해 왔다. 육아의 주된 책임을 가족 안의 여성이 떠안는다. 자본주의 발전은 여성을 가정에서 직장으로 끌어내지만 이것은 여성에게 해방의 잠재력을 주는 대신 아내로서, 어머니로서, 노동자로서 “삼중의 짐”을 지운다. 콜론타이는 오직 사회주의만이 여성들의 짐을 덜어줄 공공시설을 제공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노동자 국가는 바로 이 일에 착수했다. 전통적인 ‘여성의 일’을 사회가 떠맡기 위해 공동식당, 보육시설, 세탁소 등 공공시설들이 세워졌다. 1920년에 콜론타이는 볼셰비키 당의 여성국, 즉 제노텔의 국장이 됐다. 제노텔의 임무는 새로운 법률들을 종이 위에서 현실로 옮겨놓는 것이었다. 콜론타이는 낙후한 농촌을 포함해 러시아 전역을 돌아다니며, 여성들이 교육과 사회적‍·‍정치적 생활의 모든 분야에 적극 참여해야 한다고 설득했다.

콜론타이는 러시아 혁명 이후 꽃핀 섹슈얼리티와 성적 관계에 대한 토론에서도 최선두에 있었다. 콜론타이는 섹슈얼리티가 더 넓은 사회적 관계들에 매여 있다고 주장했다. 자본주의 아래서 “부르주아 도덕은 전적으로 사유재산에 기초한 내향적이고 개인주의적인 가족을 통해 파트너가 상대방을 완전히 소유해야 한다는 생각을 용의주도하게 발전시켜 왔다.” 그리고 “여성의 인격은 오로지 그녀의 성 생활과 관련해 판단된다.”

사람들은 개인적 관계들을 통해 가난과 착취의 압력을 피하려 한다. 하지만 자본주의는 삶의 개인적 측면조차 왜곡한다. “우리는 날카로운 계급 모순과 사유재산 관계의 세계인 자본주의의 개인주의적 도덕 세계에서 살고 있다. … 우리는 이 ‘외로움’을 사람들과 떠들썩한 소음으로 가득찬 도심이나 친한 친구들과 직장 동료들의 모임에서조차 느낀다. 외로움 때문에 사람들은 이성 가운데서 ‘영혼의 짝’을 발견하고자 하는 환상에 약탈적이고 건전하지 못한 방식으로 집착하기 쉽다.”

콜론타이는 여성이 사회 운영에서 동등하고 활동적인 구실을 담당할 때 남녀 모두가 그들의 관계를 재평가할 기초가 창출된다고 주장했다. 사회주의 아래서 “개인들은 전에는 경험하지 못한 지적‍·‍감정적 발전의 기회를 갖게 될 것이다. 이런 집단 속에서 새로운 형태의 관계가 성숙하고 사랑의 개념이 확장되고 확대될 것이다.”

비극이게도, 러시아 혁명은 너무 짧게 생존해 여성해방을 위한 변화의 시작 이상을 보여 주지 못했다. 14개국의 침략, 내전, 경제 붕괴, 그리고 독일 혁명의 실패가 노동자 국가의 숨통을 졸랐다. 경제 붕괴 상황에서 여성해방을 위한 조처들은 타격을 입지 않을 수 없었다. 콜론타이는 희망을 잃었고 러시아를 떠나 노르웨이 외교관이 됐다.

1928년 스탈린의 반혁명이 일어나자 민주주의와 노동자 통제의 흔적조차 분쇄됐고, 여성이 쟁취한 것이 모두 뒤집혔다. 심지어 스탈린은 아이를 많이 낳은 여성들에게 “모성애” 메달을 수여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러시아 혁명은 몇 년 동안이나마 여성해방의 가능성을 보여 주었다. 여성 억압, 가족과 성의 관계에 대한 콜론타이의 저작들은 그녀가 그것을 썼을 때만큼이나 오늘날에도 중요하다. 콜론타이는 특히 말년에 여러 실수를 저질렀지만, 여성을 자본주의 속박에서 해방시키기 위해 그녀가 기울인 이론적‍·‍실천적 노력은 우리의 미래를 위한 이정표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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