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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전쟁 범죄 문제 제기가 “배타적 민족주의”인가?

윤석열이 3월 21일 국무회의에서 23분에 이르는 ‘역대 최장’ 모두 발언으로 또다시 한일 강제동원 합의와 한일 정상회담 결과를 정당화했다.

윤석열은 이 모두 발언에서 새로운 정당화 논리 하나를 꺼내들었다. 미국·일본 제국주의를 지원하려고 일제 전쟁 범죄를 덮어버리는 것에 반대하는 것을 배타적 민족주의라고 매도한 것이다.

“작금의 엄중한 국제정세를 뒤로 하고, 저마저 적대적 민족주의와 반일 감정을 자극해 국내 정치에 활용하려 한다면, 대통령으로서 책무를 저버리는 것이다.”

“우리 사회에는 배타적 민족주의와 반일을 외치면서 정치적 이득을 취하려는 세력이 엄연히 존재한다.”

우선, 윤석열이 배타적·적대적 민족주의 운운하는 것은 역겨운 위선이다. 윤석열이야말로 배타적 민족주의를 적극 조장하며 정치적으로 활용해 왔다. 대선 후보 시절 그는 이민자들이 부도덕하게 건강보험을 이용하는 것처럼 왜곡하며 인종차별과 민족적 적대를 부추겼다.

특히, 한 중국인이 피부양자 자격으로 약 33억 원의 건강보험 급여를 받았으나 10퍼센트만 본인이 부담한 사례를 부각시켰다.(그 중국인은 혈우병을 앓는 환자인 것으로 추정된다.)

집권해서는 이주민의 건강보험 적용을 축소하는 개악안을 발표했다. 이 개악안은 단지 이주민뿐 아니라 전반적으로 건보 보장성을 축소하고 보험료를 인상하는 내용이다. 노동자·서민에게 고통을 전가하는 정책을 정당화하는 한 수단으로 배타적 민족주의를 이용한 것이다.

대통령비서실 홍보수석 김은혜는 지난해 지방선거에 경기도지사 선거에 출마해 중국인 투표권을 문제 삼았었다.

윤석열은 또한 지난해 12월에는 외국인의 지방선거 투표권에 상호주의를 적용해 투표권 부여 대상 축소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고 밝혔다. 당시 우파 언론들은 투표권이 있는 외국인 약 12만 명 중 80퍼센트 정도가 중국인이라는 점을 부각했다.

일본에 대한 배타적 민족주의가 불순하다는 윤석열은 중국에 대한 배타적 민족주의는 은근히 조장했던 것이다.

정치적 이용? 우파도 마찬가지

윤석열이 이번 국무회의 발언에서 반일 감정 극복을 대통령의 책무라고 한 것은 아마도 문재인 정부가 정치적 위기 탈출을 위해 한일 갈등 국면을 이용한 것을 겨냥한 말일 것이다.

물론 역대 민주당 정부는 일본 제국주의에 일관되게 반대하지 않으면서도 일본에 대한 많은 대중의 부정적 감정을 위선적으로 이용해 왔다. 문재인 정부도 ‘위안부’·강제동원 배상 판결을 외면하면서도, 대법원의 강제동원 배상 판결 이후 빚어진 한일 갈등 국면에서 항일 투사 행세를 했다.

집권하자마자 공약을 뒤집고 사드를 배치해 버리는 등 한미 군사 공조 문제는 말할 나위도 없었다.

아쉽게도 당시 대다수 좌파는 일본 제품 대체를 위한 쟁의 자제 결의를 하는 등, 문재인 정부로부터 정치적으로 독립적인 태도를 취하지 않았다. 특히, 문재인 정부가 일본의 경제 보복을 핑계로 추진한 기업 규제 완화와 노동시간 연장에 제대로 반대하지 못했다.

그러나 반일 감정을 정치적 위기 탈출용으로 사용한 것은 민주당만이 아니다. 김영삼은 집권 초 위안부 문제를 한일 간 현안으로 삼지 않겠다고 했다가 1994년 급속히 지지율이 떨어지자, (일본 총리가 “한일합병은 정당하다”고 한 망언을 이용해) “일본의 버르장머리를 고쳐놓겠다”며 한일 관계를 악화시키고 국내에선 “역사 바로세우기”를 추진했다.

임기 초부터 노골적인 친미·친일 노선을 폈던 이명박은 한일군사정보보호협정을 밀실 추진하다가 반발에 부딪히는 등으로 지지율이 추락하자 2012년 갑자기 독도를 방문해 한일 관계를 경색시켰다.

윤석열의 한미일 군사 공조 강화는 한일 양측 평범한 사람들의 미래를 위협한다 ⓒ대통령실

국제주의

윤석열은 재일동포들이 한일 관계 경색으로 어려움과 고통을 겪어 왔다고도 말했다. 그러나 재일동포들이 일본에서 받는 차별은 일본의 과거 한국 강점 사실과 뗄 수 없는 관계다.

일제의 식민 지배가 정당화된다면 가령 간토 대학살 같은 비극도 지워질 것이고 식민지 출신 재일동포를 비난하는 일본 우파의 사기도 더 오를 것이다.

윤석열은 중일 수교 당시 일본에 전쟁 배상 요구를 포기한 중국 전 총리 저우언라이의 말도 인용했다. “전쟁 책임은 일부 군국주의 세력에게 있으므로 … 일반 일본 국민에게 부담을 지워서는 안 된다.”

당시 전쟁 배상을 포기한 대가로 중국 관료는 일본과 대만의 단교와, 3조 6천억 엔에 이르는 정부개발원조(ODA)를 얻어 냈다.

중소 갈등이 심화되던 당시 상황에서 중국 지배 관료는 미국·일본과 관계를 개선해 외교적 고립을 피하고 소련과의 분쟁 상황에 대처하고자 했다.

이런 지정학적 이해관계를 위해 중국에서도 강제동원, 위안부 피해 등 전쟁 범죄 해결은 자국 지배자들에 의해서 무시된 것이다.

그리고 전쟁에 실제 책임이 있는 일본 국가에 면죄부를 주면서 일본의 평범한 사람들을 위하는 척하는 것은 순전한 위선이었다.

윤석열이 “일본 국민의 부담”을 운운하지만 한미일 군사 공조를 강화하는 것이야말로 일본의 노동자 등 서민 대중에게 부담을 지우는 일이다.

윤석열의 한일 강제동원 합의한일 정상회담은 미국 주도의 대중국 전선 구축에 참여하는 것이 한국 지배계급에 이익이라고 보고 잰걸음을 옮기는 것이다. 이는 동아시아에서 군사적 긴장, 더 나아가 전쟁 가능성을 높이는 위험한 일이다.

한국과 일본 모두의 지배계급은 이에 발맞춰 군비를 증강하고 있다. 이는 긴축을 강요하고 노동조건을 공격하는 것으로 이어지게 마련이다. 정부는 올해 예산에서 복지는 긴축을 하면서도 국방비는 늘렸다.

또한 제국주의 갈등의 한 전장이 되고 있는 반도체 공급망 문제에 대응하려고 반도체 기업들에 엄청난 감세 혜택을 주려고도 한다. 민주당도 여기에 동조했다.

이런 일은 일본에서도 벌어질 공산이 크다. 게다가 만약 동아시아에서 실제 커다란 군사적 충돌이 벌어지면 한국, 일본, 중국, 대만, 심지어 미국의 평범한 청년들이 총알받이로 희생될 것이다.

일제가 조선인을 강제동원한 것도 주로 1930년대 만주 침략 전쟁 확대로 일본 내 노동력이 부족해지고 생산성이 떨어졌기 때문이다.

지정학적 갈등의 고조 국면에서도 미국, 중국, 일본, 한국 등 국가 간 대결이 아니라 계급 분단선이 더 근본적인 것이다. 노동계급에게는 각자 자국 정부의 전쟁 관여나 전쟁 노력에 반대해 국제주의적 연대를 도모해야 할 공통의 이해관계가 있다.

한국에 있는 우리가 이를 실행하는 가장 주된 방법은 바로 한국 정부, 즉 윤석열의 서방(미국과 일본) 제국주의 지원에 반대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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