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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급망 재편 비용 전가하는 미국 지배자들, 난처해진 한국 지배자들

첨단기술 분야인 반도체·배터리 산업을 둘러싼 미·중 갈등이 심해지면서 윤석열 정부와 한국 기업주들은 난처한 상황에 내몰리고 있다.

바이든 정부는 중국 견제를 위해 동맹국들과의 군사적·경제적 협력을 강화해 왔다. 중국이 첨단기술을 육성하지 못하게 방해하는 한편, 한국·대만·일본 등과 협력해 반도체·배터리 산업의 공급망을 미국 중심으로 재편하려 해 왔다.

윤석열 정부는 미국의 공급망 재편 계획에 호응하며 한국 기업들의 지위를 더 높이려 해 왔다. 이를 위해 미국이 중국 견제를 위해 추진한 인도·태평양경제프레임워크(IPEF)와 ‘칩4 동맹’ 등에도 참가했다.

물론 한국 지배자들이 미국과의 협력을 강화하기로 한 것이 곧 중국 시장의 포기를 뜻하는 것은 아니다. 미국이 대중국 기술 제재를 하는 사이에 한국 기업들이 경쟁력을 높이면, 중국 시장에서의 높은 점유율도 유지할 수 있다고 기대했을 것이다.

미국 정부가 까다로운 보조금 지급 규정을 내세워 한국 기업들의 부담을 늘리려 하자, 한국 지배자들은 난처한 상황에 처하게 됐다 ⓒ출처 백악관

그러나 최근 미국 정부가 반도체 지원법의 세부 내용을 공개하자 한국 지배자들은 뒤통수를 맞았다며 크게 반발했다.

미국 정부가 미국 내 투자에 보조금을 지급하는 대가로 반도체 기업들에 영업 기밀 공개와 초과 이익 공유 등을 요구했기 때문이다. 반도체 생산에 더 많은 비용이 들어가는 미국에 공장을 지을 것을 종용하고는, 기업들이 받아들일 수 없는 조건을 내놓아 사실상 보조금을 받지 못하게 막아 버린 것이다.

게다가 미국 정부는 보조금 받는 기업들이 중국에 반도체 관련 투자를 확대하지 못하게 막으려 했다가 부분적으로 허용한 바 있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중국에 이미 반도체 공장을 건설해 놓은 상황이라 중국에 추가 투자를 하지 못할 경우 막대한 손해를 감수해야 하는데 말이다.

이미 미국의 인플레이션 감축법(IRA)으로 한국산 전기차가 미국 시장에서 보조금을 받을 수 없게 돼 큰 타격을 입었던 한국 기업들은 미국의 반도체법 때문에 또다시 추가 비용을 지불해야 하는 처지에 몰리게 된 것이다.

이처럼, 미국 정부가 공급망 재편 비용을 한국 같은 동맹국의 기업들에 떠넘기자, 전경련이 지배하는 〈한국경제〉 신문조차 사설에서 “반도체 문제에 관한 조 바이든 정부 행태는 한국의 ‘반도체 주권’을 인정하지 않겠다는 것과 다를 바 없다”며 격앙된 반응을 보였다.

뒤통수

사실 윤석열 정부가 대중의 엄청난 반발을 살 것이 뻔한 일제 강제동원 ‘해법’을 내놓으며 급하게 일본과의 관계 개선에 나선 것은 반도체·배터리 분야에서 미국 정부로부터 양보를 받아 내려는 목적도 있었을 것이다.

미국이 원하는 한미일 동맹 강화를 위해 장애물을 치워 주는 대신 한국 기업에 대한 투자 규제 완화 조처를 얻어 낼 수 있다고 본 것이다.

실제로 한일정상회담을 전후해 미국 정부는 한국 반도체 기업들의 대중국 투자 규제를 일부 풀어 줬다.

그 후, 삼성의 이재용과 SK의 최태원은 모두 중국으로 달려가 중국 지배자들과 만났다. 그들과 같은 한국 대기업 총수들은 4월에 열리는 한미정상회담에 맞춰 미국을 방문하기 전에 중국 당국과 만나 미국의 투자 규제 사안 등에 대해 논의하는 게 시급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중국은 여전히 한국 기업들이 포기하기 힘든 큰 시장인 것이다.

그러나 미국 정부는 반도체·배터리 분야의 보조금 지급 조건은 완화하려 하지 않고 있다. 바이든 정부는 반도체 기업들에 더 세세한 정보 공개 요구를 해 한국 기업들을 난처하게 만들고 있기도 하다.

윤석열 정부와 한국 기업들은 4월 한미정상회담 전에 반도체·배터리 분야의 규제가 완화되길 기대했을 텐데 말이다.

최근 윤석열 정부의 외교·안보 담당자들 사이에서 갈등이 벌어지고 김성한 국가안보실장이 경질됐는데, 미국 측으로부터 양보를 받아 내려는 협상이 제대로 진척되지 않은 것이 이러한 갈등이 격화되는 요인이 됐을 듯하다.

결국 윤석열은 3월 30일 캐서린 타이 미국 무역대표부(USTR) 대표를 만나, “미국에 진출한 한국 기업들이 어려움을 겪지 않도록 우호적인 방향으로 배려해 달라”고 요청해야 했다.

경제 위기가 심화되면서 한국과 미국 반도체 기업 간 경쟁도 치열해지고 있다. 최근 반도체 산업 업황이 크게 나빠져 기업들은 이윤이 대폭 줄어들거나 대규모 손실을 볼 공산이 크다. 이런 상황에서 더 많은 미국 내 투자를 요구하는 미국 정부의 요구는 기업들을 더욱 어렵게 만들고 있다.

이 때문에 윤석열 정부와 여당뿐 아니라 민주당까지 나서 반도체 기업들을 비롯한 첨단 기업들에 대규모 감세 혜택을 주는 ‘K칩스법’을 급히 통과시켰다. 이 법으로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올해에만 3조 원 가까운 감세 혜택을 볼 것이라고 한다.

생계난으로 고통받는 노동자 등 서민층을 위한 지원은 미적거리며 제대로 추진하지도 않는 자들이 대기업 지원에는 신속하게 합의한 것이다.

그러나 앞서 살펴봤듯이, 미국과의 동맹을 강화하면서 중국 시장도 놓치지 않겠다는 한국 지배자들의 소망이 설 자리는 점점 더 좁아지고 있다. 미국 월스트리트저널(WSJ)은 미국의 반도체법 시행으로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를 비롯한 반도체 기업들이 미국 아니면 중국이라는 선택의 기로에 놓였다고 보도했다.

앞으로도 심화될 미·중 갈등 상황에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를 둘러싸고 한국 지배자들 사이에서 긴장과 갈등이 고조될 공산이 크다.

특히, 윤석열 정부가 한국 기업들의 이익을 제대로 방어하지 못한다는 기업주들의 불만이 더 커지면 윤석열 정부의 위기는 더욱 심화될 것이다.

이런 지배자들 간 내분은 더 많은 사람들이 투쟁에 나설 자신감을 키울 것이다. 이를 이용해 윤석열 반대 투쟁을 키우도록 노력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