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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열의 우크라이나 군사 지원 발언은 CIA 도청 내용을 자인한 셈이다

4월 19일 대통령 윤석열은 로이터 통신 인터뷰에서 우크라이나 군사 지원을 고려할 수 있다고 말했다.

비록 ‘대규모 민간인 공격이나 학살’ 같은 전제 조건을 달았지만, 군사 지원 결정을 위한 명분을 쌓기 시작한 듯하다.

얼마 전에 폭로된 미국 중앙정보국(CIA)의 도청 내용을 보면, 3월 1일 당시 국가안보실장 김성한과 외교비서관 이문희가 우크라이나 포탄 지원 문제를 논의했다. 이들은 바이든이 윤석열에게 무기 지원을 요청하는 전화를 걸 수 있다고 염려하고 있었다.

이문희는 살상 무기 지원 금지 방침을 공식적으로 바꾸자고 주장했다. 미국 측에 적극적 지원 약속을 하자는 취지로 보인다. 게다가 그는 국방비서관 임기훈이 3월 2일까지 최종 입장을 결정하겠다고 미국에 이미 알렸다며, 임기훈의 생각을 들어 보라고 김성한에게 촉구했다.

그러나 김성한은 이문희의 의견에 전적으로 동의하지는 않았다. 폭로된 CIA 문서를 보면, “그는 이 문제가 국내에서 어떻게 받아들여질지를 우려했다.” 그래서 김성한은 폴란드를 통한 포탄 우회 지원 방식을 제안했던 것이다.

이후에 드러난 정황들은 위의 내용(과 문건에 실린 다른 정보들)이 사실일 개연성이 크다는 점을 보여 준다.

미국의 다른 문건을 보면, 포탄이 경남 진해항에서 독일로 이송되는 구체적 계획이 담겨 있었다. 그리고 4월 17일 MBC는 그 문건대로 한국에서 독일 노르덴함항으로 군수 물자가 이송됐다고 보도했다.

이 밖에도 국내 포탄 제조업체가 앞으로 155밀리미터 포탄 40만 발 이상은 물론, 기관총탄 430만 발과 전차포탄 5만여 발을 폴란드에 수출한다는 사실이 확인됐다. SBS는 이 무기들이 폴란드에서 모두 쓰이는 게 아닐 수 있다고 보도했다. 김성한의 의견대로 우회 지원이 이뤄져 온 정황이 있는 것이다.

155밀리미터 포탄을 발사하는 우크라이나 군인들 ⓒ출처 우크라이나 국군 참모부

그런데 이번에는 윤석열 자신이 우크라이나에 대한 군사 지원 가능성을 언급했다. 이는 앞서 문서에서 확인했듯이, 이문희와 임기훈이 적극적으로 주장한 바에 부합한다.

일각에서는 윤석열 정부의 무기 우회 지원은 미국의 요구를 우선한 결정이고, 그로 인해 ‘국익’이 훼손됐다고 비판한다.

분명 우크라이나 전쟁 지원을 놓고 미국이 한국 등 동맹국들에 압박을 가하고 있다. 그렇지만 윤석열은 그 압박을 단지 일방적으로 따르는 게 아니라, 한국 자본가 계급의 이익을 위한 선택을 한 것이다.

윤석열이 말하는 ‘국익’에 평범한 사람들이 치르게 될 수도 있는 위험은 아예 포함되지 않거나 기껏해야 극도로 부차적인 요소일 뿐이다. 윤석열의 국내 정책이 그렇듯이 말이다.

〈조선일보〉는 윤석열의 우크라이나 군사 지원 발언에 대해 한 외교 소식통의 말을 인용했다. “윤 대통령이 한미 정상회담을 앞두고 미국에 성의를 보인 것이고, 추후 우크라이나 재건 사업 참여나 방산 수출 같은 실익도 고려했을 것[이다.]

윤석열 정부는 우크라이나 전쟁을 통해 한국 자본주의의 위상을 높이려 하고 있다. 그래서 그동안에도 간접적인 무기 수출에 나서 온 것이었다.

그러나 윤석열의 이런 행보는 한국을 제국주의간 충돌에 더 깊이 연루시키며 큰 위험을 키우고 있다.


분열돼 가는 세계 속에서 제국주의적 영향력 유지에 필사적인 미국

유출된 미국 정부의 기밀문서 내용에는 중국의 고고도 스파이 드론 개발, 러시아의 미국 스타링크 위성 차단 시도 등 경쟁자들에 대한 첩보도 포함돼 있다. 점증하는 국가간 갈등 속에 미국 정부가 경쟁자들의 능력을 파악하려고 애썼음을 보여 준다.

미국이 유엔 사무총장 안토니우 구테흐스를 지속적으로 도청한 정황도 드러났다.

영국 공영방송 BBC는 유출된 여러 문서들에 구테흐스 사무총장과 유엔 고위 관리들 사이의 대화 내용이 있었다고 보도했다.

10년 전, 당시 미국 대통령 오바마는 유엔 본부를 상대로 전자 감시를 하고 있지 않다고 공언한 바 있다. 그러나 이번에 유출된 문서를 보면, 역시나 거짓말이었다.

바이든 정부는 구테흐스 사무총장이 흑해 곡물 협상 등에서 러시아에 너무 유화적으로 처신했다고 본 듯하다. 한 문서에는 “[구테흐스는]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에서 저지른 행동에 대한 책임을 묻는 광범한 노력을 약화시켰다”고 쓰여 있다.

촉수

2013년 미국 국가안보국(NSA)이 독일 총리 메르켈 등 주요국 정상들의 통화까지 도청했음이 폭로된 적이 있다. 그러자 미국은 한동안 난처한 상황에 처했다. 독일은 당시 미국 중앙정보국(CIA) 독일 지부장을 추방했다.

이번에도 한국을 비롯해 우크라이나, 영국, 이집트, 이스라엘, 일본 등 동맹국을 상대로 도청 등 첩보 활동을 벌인 게 분명한 정황들이 폭로됐다. 바이든 정부는 문서 유출의 의미를 축소하며, 이번 사태가 크게 번지지 않게 하려고 애쓰고 있다.

이를 지원하고자 〈워싱턴 포스트〉는 동맹국들의 반응이 10년 전과는 사뭇 다르다고 보도했다. 대체로 크게 문제 삼지 않으려 한다는 것이다(윤석열 정부처럼).

한 유럽 국가의 관리는 〈워싱턴 포스트〉에 이렇게 말했다. “미국과의 정보 협력은 매우 중요해서 포기할 수 없다.” 그래서 이번 같은 정보 유출은 그에게 미국과의 협력을 위해 치르는 “비용”이다.

다른 관리도 “미국은 우리의 안보에 중요한 주요 정보 파트너이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고 말했다.

ⓒ출처 NSA

미국과 그 동맹국들은 지정학적 이해관계가 엇갈리거나 경제적으로 서로 경쟁하는 관계이기도 하다. 그래서 동맹국 도청 같은 일도 벌어진다.

그렇지만 많은 동맹국들이 안보 현안에서 여전히 미국에 많이 의존하고 있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전쟁으로 그런 협력의 필요성은 더 커졌을 것이다. 그리고 미중 갈등이 나날이 첨예화되고 있는 상황도 미국 뒤에 서서 후원해야 한다는 압박감을 느끼게 할 것이다.

도청 문제로 미국을 대놓고 비난하지 않는 듯한 것은 이런 배경 속에서 봐야 한다.

윤석열 정부도 대통령실 도청 의혹에도 불구하고 다음 주 한미 정상회담에서 정보 공유 수준을 높이는 합의를 하려고 한다.

윤석열과 그의 대통령실 참모들도 도청 보도에 잠시 모멸감을 삼켰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다름 아닌 한국 지배계급의 경제적·군사적 이익을 위해 그런 모멸감쯤은 대수로 여기지 않고 그들이 속한 계급 이익에만 충실하기로 한 것이다.


해외정보감시법

도청 행위가 폭로됐지만, 바이든 정부는 정보기관들의 활동을 제약할 생각이 물론 없다.

오히려 바이든 정부는 해외정보감시법(FISA) 702조를 의회가 연장해 줘야 한다고 주장한다. FISA 702조는 미국 정부가 영토 밖에서 영장 없이 외국인의 통신 정보를 수집하는 근거가 되는 법률 조항이다. 연말까지 미국 의회가 재승인하지 않으면 이 조항은 시효 만료된다.

바이든 정부는 이 법이 “국가 안보의 주춧돌”이라며 의회에 재승인을 요구하고 있다. 심지어 일각에서는 이번 문서 유출이 역설적으로 FISA 702조의 필요성을 확인해 준다고 주장한다. FISA 702조에 근거한 감시 활동으로 얻은 정보들이 얼마나 광범하고 미국에 유용한지가 드러났다는 것이다.

이처럼, 분열돼 가는 세계 속에서 미국 국가는 제국주의적 패권 유지를 위해 동맹국 도청 같은 오만한 행동을 계속 벌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