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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세 사기 피해자 기고:
피해자 구제 나 몰라라 하는 정부에 분통 터진다

지금도 전세 사기가 자신의 잘못이라 자책하며 괴로워할 수많은 피해자들을 생각하며 실명을 밝힙니다.

2020년 나는 현재 거주 중인 다세대주택을 전세 계약했다. 계약 당시 임대인은 개인이었다. 그런데 입주하고 한 달 후쯤 우연히 떼어 본 등기부등본에 임대인이 바뀌어 있었다. 내가 계약한 직후 집이 팔렸고, 매매가는 전세가와 똑같았다. 무자본 갭투자였던 것이다.

새 임대인은 빌라 수백 채를 가지고 임대사업을 하는 주식회사였다.

나는 주택보증공사의 보증 보험에 가입하려 했지만, 이 임대사업자가 블랙리스트에 올라온 악성 임대인이라 보증보험 가입도 안 됐다. 얼마 후 또 우연히 등기부등본을 떼어 보니 이 집에 근저당이 잡혀 있었다. 근저당이 내가 사는 집을 포함해 주택 다섯 채에 걸려 있다는 것은 근저당 채권자가 임의경매를 신청하면서 알게 됐다.

이 집에 살고 있는 건 나인데, 이 집에 걸린 어마무시한 사건들을 알게 된 건 우연적이거나, 사건이 터지고 나서였다. 이후 불안한 마음에 강박적으로 등기부등본을 여러 번 떼어 봤다. 볼 때마다 피가 마르는 느낌이었다. 나는 어떻게든 해결해 보려고 했다. 근저당에 묶인 다른 세입자들을 찾아다녔고, 인터넷이나 법률 상담 등을 통해 이런저런 대응 방법을 알아봤다. 그러나 해결은 멀어져만 갔다.

전세 사기는 주택을 투기판으로 만든 정부의 시장주의적 주택 정책이 낳은 결과이다 ⓒ출처 참여연대

전문가들은 피해자가 되지 않기 위한 예방책만 늘어놓았다. 하나같이 ‘머리에 총 맞은 사람 아니면 그런 집에 들어가지 않는다’는 말로 피해자인 나를 질책했다.

어느 누구도 내가 당한 일을 ‘전세 사기’라고 말하는 사람이 없었다. 합법적인 투기였고 그런 투기를 눈치채지 못한 세입자가 문제라는 식이었다. 이 집의 매매 사실도, 임대인의 체납 세금도, 근저당 채권도 전혀 알 수 없는, 정보 접근 권한이 전혀 없는 세입자가 어떻게 하면 눈치챌 수 있었을까? ‘관심법’이라도 배워야 하나 싶을 정도였다.

전 재산에 대출까지 끼고 들어온 집인데, 모든 것을 잃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 자책감이 상당했다. 이 집에 거주하는 것 자체가 지옥에 사는 느낌이었다. 그렇게 2년 계약 기간이 끝났다.

빌라 수백 채를 가지고 있다는 임대인은 연락이 두절됐고, 그를 대리한다는 컨설팅 부동산은 재주 좋게도 이 집의 감정가를 올리고 명의를 돌려 다음 세입자를 구할 수 있다는 허황된 말로 자신의 잘못을 비켜 가려 했다.

그러나 근저당뿐 아니라, 세금 압류까지 들어온 이 집에 들어올 사람은 없었다. 전세 계약 만기가 도래하자 은행에서는 이런 불안정한 집의 전세 대출을 연장하기 어렵다고 했다. 나는 다른 가계 대출로 갈아타야 했고, 금리가 고공 행진하던 시기라 대출 이자는 늘어났다.

전세 보증금 반환 청구 소송을 했다. 결과가 너무나 뻔한 재판이지만 6개월이 넘게 걸렸다. 지금은 또 강제경매를 신청해 놓은 상태이다. 이것도 1년 가까이 걸릴 것이다. 재판 비용만 해도 이미 수백만 원이다. 이 집에 산다는 죄로 나는 은행, 법조계, 부동산 중개업계 모두의 먹잇감이 돼 있었다.

먹잇감

특히 내가 가장 분노하는 대목은 이런 악성 임대인이 빌라 수백 채를 자신의 돈벌이 수단으로 삼기까지 정부가 뒷받침했다는 사실이다. 문재인 정부는 임대사업자로 등록하기만 하면, 종부세나 양도소득세는 걱정하지 않고, 매매 차익을 거둘 수 있도록 임대사업자들에게 막대한 세금 혜택을 퍼부었다. 집값이 폭등하면서 임대사업자는 주택담보대출 규제도 피할 수 있어 갭투자가 횡행했다.

2016년에 20만 명에 불과하던 임대사업자가 2020년에는 51만 명까지 늘어났다. 뒤늦게 주택보유세나 양도소득세를 강화하긴 했지만, 집값 상승세가 워낙 커서 투기는 끊이지 않았다. 오히려 정부가 키워 놓은 악성 임대인들은 그런 강화된 세금 폭탄을 세입자들에게 돌렸다.

그런 과정에서 빵! 터진 것이 바로 지금의 전세 사기이다. 물론 전세 사기라는 말도 몇몇 악성 임대인이 집 수백 채를 나 몰라라 하면서, 또는 세입자들을 죽음으로 내모는 사건이 터지고 나서야 사회적으로 쓰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전세 사기는 주택을 시장의 수요 공급에 내맡기면서 투기를 부르는 자본주의 체제의 특성상 벌어질 수밖에 없는 일이고, 실제로 오래 전부터 있어 왔다. 그리고 현재 주택 경기가 악화되면서 대대적으로 늘어나는 깡통전세도 정부의 주택 정책 실패로 인해 벌어지는 일이다.

그런데 윤석열 정부는 이런 전세 사기 피해자들을 두 번 죽이고 있다. 경·공매까지 가서야, 임차인이 대항력도 갖추어야, 보증금이 3억 원 이하여야(지역 여건에 따라 4억 5000만 원까지), 수사가 개시되고 전세 사기 의심 대상이 되며, 다수의 피해자가 생겼을 때에야 전세 사기 피해자로 인정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전세 사기 피해자가 인공호흡이 필요할 정도로 숨이 깔딱깔딱 넘어갈 때가 되면, 아니 이미 숨이 넘어가면 그때 전세 사기 피해 지원 특별법을 적용하겠다는 것이다.

피해자가 가해자의 사기 의도를 입증해야만 한다니, 말이 되는가? 정부는 지금도 미추홀처럼 전세 사기 피해가 한꺼번에 일어난 일부 지역만 수사하고 있다.

하지만 동일 임대인으로부터 피해를 본 여러 세입자들이 흩어져 있는 경우가 많다. 나만 보더라도 임대인이 근저당을 잡은 집 다섯 채는 다 흩어져 있고, 주거 형태나 가격도 다양했다. 그런데 세입자들더러 무슨 수로 모아 내라는 것인가? 더구나 한 임대인에게 사기를 당한 세입자가 1~2명만 있다면 그건 사기의 의도가 없는 것이고, 세입자는 피해자가 아닌가?

대항력이 없거나 보증금이 많은 임차인이야말로 가장 큰 피해를 볼 텐데, 임차권 등기까지 포함해 대항력을 갖추어야 하고, 보증금의 제한을 둔다니, 정부도 이해관계를 따져 가며 피해자를 지원할 생각인가?

이런저런 조건을 들이대어 지원 범위를 축소하는 것은 전세 사기 피해자들이 개별 대응하게끔 해 정부에 대한 불만을 꺼트리려는 것이다.

그나마 이토록 까다롭게 선별해 지원하겠다는 정책조차도 전세 보증금을 보상해 주는 지원이 아니다. ‘주거 안정’이란 말로 포장해 LH가 주택을 매입해 살게만 해 주겠다고 한다. 그러면서 “국민의 혈세로 개인 사기의 피해자들을 구제할 수는 없다”고 한다. 전세 사기 피해자들과 대중을 갈라치기 하려는 수작이다.

미분양 아파트로 인한 건설사들의 이윤 손실에는 혈세를 척척 쓰면서, 정부의 주택 정책 실패로 인해 피해를 보는 전세 사기, 깡통전세 피해자들에게는 한 푼이 아깝다니... 서민들을 대하는 이 정부의 민낯과 그들의 우선순위를 적나라하게 보여 준다.

분명히 말하지만 전세 사기, 깡통전세는 정부의 잘못된 정책이 낳은 ‘사회적 재난’이다. 이 재난 앞에서 윤석열 정부가 피해자 구제를 나 몰라라 하는 것은 정부의 시장주의적인 주택 정책 실패의 책임을 세입자에게 떠넘기는 파렴치한 행위이다.

정부를 비판하며 대안을 내놓은 야당 법안들은 정부의 안보다는 나으나, 제대로 된 대책이 되기 어려워 보인다. 해당 법안들은 선순위인 경우 ‘보증금 채권 매입’을 통해 보증금을 구제해 준다는 내용이다. 하지만 전세 가격보다 집 가격이 하락하는 역전세가 커지는 상황에서 주택의 시세가만큼만 구제받을 수 있다면, 피해자들의 상당수는 선순위일지라도 수천만 원 이상의 피해를 보고 빚만 남게 될 것이다. 선순위가 아닌 경우 보증금의 50퍼센트만 보상해 주는 방안도 피해자들이 너무나 큰 손해를 감당해야 한다.

따라서 전세 사기, 깡통전세 피해자들은 야당 의원들의 법안에만 기대어서는 안 된다. 날아간 전세 보증금을 정부가 온전히 보상하라고 분명히 요구하며 운동을 더 크게 건설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