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 8월 6일 오전 미국은 일본 히로시마에 핵폭탄을 투하했다.

일순간 도시의 3분의 2가 지구 표면에서 쓸려 나갔다. 35만 명이 거주하던 이 도시에서 사망자가 14만 명에 이르렀다. 조선인 5만여 명도 피폭됐고, 그중 2만여 명이 목숨을 잃었다.

미국은 사흘 뒤 나가사키에도 또 한 발의 핵폭탄을 투하했고, 도시 인구 절반이 목숨을 잃었다.

이것은 미국 국가가 자행한 야만적 대학살이었다.

미국은 당시 핵폭탄 투하가 태평양 전쟁에서 일본을 굴복시키기 위해, 그리고 일본의 결사항전으로 인한 더 큰 인명피해를 막기 위해 내린 ‘불가피한 선택’이었다고 정당화한다.

그러나 당시 일본은 전쟁을 지속할 만한 처지가 전혀 아니었다. 일본의 항복이 임박했다는 것은 당시 미국·영국 등 연합국 지배자들에게도 분명하게 인지된 사실이었다.

당시 영국 수상 윈스턴 처칠은 이렇게 썼다. “일본의 운명이 핵폭탄으로 결판날 것이라고 생각하는 건 실수일 것이다. 일본의 패배는 첫 폭탄 투하 전에 확실했다.”

미국 대통령 트루먼은 7월 18일 자 자신의 일기장에 소련이 8월 15일 일본에 선전포고할 것이고, 소련이 참전하면 “일본은 끝장일 것”이라고 적었다.

그러나 핵폭탄은 미국이 소련 군대의 도움 없이도 일본을 항복시킬 수 있음을 의미했다.

“만약 원폭 투하가 일본 패전의 결정적 요인이라면 미국은 사악한 전쟁을 끝낸 구원자이자 유일한 핵보유국으로서의 국제적 영향력을 제고할 수 있게 된다. 반면 소련의 개입이 결정적이었다는 것을 인정하면, 미국이 4년 동안 끝내지 못한 태평양 전쟁을 소련은 며칠 만에 끝냈고, 이에 따라 전후 소련의 위신과 영향력을 키워줄 수 있게 된다.”(《핵과 인간》, 정욱식)

즉, 히로시마·나가사키 핵폭탄 투하는 미국의 힘과 권위를 전 세계에, 특히 소련을 상대로 과시해 전후 질서 형성에서 미국이 우위를 점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그런 목적을 위해서라면 핵폭탄으로 도시 전체가 파괴돼 아비규환이 되더라도 그만한 가치가 있는 일이었다.

그래서 미국 정부는 소련, 영국과 전후 세력권 분할을 두고 협상을 벌일 포츠담 회담(1945년 7월 17일) 전에 핵폭탄 개발을 완성해야 한다고 개발자들을 압박했다.

이런 행동은 미국 지배자들이 ‘자유’와 ‘민주주의’의 담지자인 양 구는 것이 얼마나 지독한 위선인지를 보여 준다.

일본 핵폭탄 투하에는 트루먼의 아시아인에 대한 인종차별도 작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트루먼은 일본인을 “짐승”으로 비유할 정도로 아시아인을 멸시했었다.

1945년 미국의 핵폭탄 투하로 파괴된 일본 히로시마 ⓒ출처 U.S. National Archives

일본 제국주의자들이 ‘세계 유일의 피폭국’임을 부각하며 피해자 행세를 하는 것도 마찬가지로 역겨운 일이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재앙은 주요 강대국들이 벌인 제국주의적 전쟁이 낳은 비극이었고, 일본 국가는 바로 그 전쟁의 주요 행위자였다.

그 전쟁 내내 일본의 평범한 사람들은 혹독하게 착취당하고 총알받이로 내몰렸다. 동아시아 민중은 일본 군대에게 식민 지배, 약탈과 학살, 강제동원 만행의 피해를 당했다.

히로시마 폭격 소식을 듣고서도 일본 지배자들은 일본 국민에게 사실을 제대로 알리지 않았음은 물론이고, 즉각 항복하지도 않았다.

당시 일본 지배자들의 관심은 소련의 중재를 통해 더 유리한 조건으로 전쟁을 종식시킬 기회를 얻는 데 있었다. 1941년 일본과 불가침조약을 맺은 소련이 그런 역할을 해주길 기대했던 것이다.

종전 조건에서 특히 중요한 것은 천황제의 유지, 즉 지배체제의 유지를 보장받는 것이었다. 히로시마 피폭 이후에도 일본 지배자들은 이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그런데 8월 9일 소련이 대일 전쟁에 참전하자 이런 기대는 물거품이 됐고, 일본이 소련과 미국을 상대로 동시에 전쟁을 치를 능력은 없었으므로 항복 이외에 다른 선택지가 없게 된 것이다.

‘공포의 균형’?

불행하게도, 미국과 일본 지배자들은 (이번에는 한편이 돼) 동아시아 지역을 또다시 긴장과 전쟁의 소용돌이로 몰아넣을 군국주의로 나아가고 있다. 윤석열이 여기에 동참해 힘을 보태고 있다.

그러나 한·미·일 군사 협력과 군국주의 강화는 더 큰 재앙을 예비할 뿐이다.

히로시마 이후 70년은, 핵무기가 결코 평화를 보장하는 수단이 아님을 보여 준다.

미국의 핵무기 개발은 뒤이어 소련의 핵무기 개발로 이어졌고, 이것은 다시 미국의 수소폭탄 개발 등 더 위험천만한 무기 개발을 추동했다. 냉전하에서 미-소 간 핵 경쟁은 쿠바 사태를 비롯해 몇 차례 핵전쟁 위기로 이어졌다.

오늘날 주요 강대국들이 가진 핵무기는 냉전이 최고조에 이르렀을 때보다도 양과 질 모두에서 더 커졌다.

앞으로 미국이 한국에 기항시킨다는 전략핵잠수함의 최대 핵무장력은 미국이 히로시마에 떨어뜨렸던 핵폭탄의 5000배가 넘는다고 알려졌다.

또한 중국, 영국, 프랑스, 인도, 이스라엘, 파키스탄, 북한 등 핵무기를 가진 국가도 더 많아졌다.

이것은 어느 한 편에서 벌어지는 국지적 충돌이 인류 전체의 생존을 위협하는 대대적인 파괴로 이어질 수 있음을 의미한다.

끔찍하게도 우크라이나에서 이런 우려가 현실이 될 수도 있다. 미·중 간 갈등의 주요 무대인 동아시아와 한반도도 예외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