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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국힘 대 민주당이 아니다
김남국 의원 비판은 윤석열을 이롭게 할 뿐인가?

김남국 의원 코인 투기 사건의 후폭풍이 계속되고 있다. 김 의원이 민주당을 탈당했지만, 여진이 계속되고 있다.

민주당의 지지율, 특히 40대 지지율은 2~3주간 급락했다.

윤석열 퇴진 촛불 집회에서도 김남국 의원 문제는 논쟁 쟁점이다. 5월 20일 전국 집중 집회에서 본지의 김남국 코인 투기 비판 기사는 집회 참가자들 사이에서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극소수 민주당원들은 본지 판매와 호외 반포를 훼방놓았다.

김 의원 변호론의 요점은 이렇다: 불법 투기가 아니라 합법 투자였으며, 검찰이 야권을 약화·분열시키려고 벌인 공작 수사에 놀아나면 결국 윤석열만 이롭게 한다.

그러나 우선, 투자와 투기 사이에 만리장성이 있는 게 아니다. 투자와 투기의 차이는 리스크 크기의 차이일 뿐인데, 코인 투자는 리스크가 크므로 오히려 명백한 금융 투기다.

그리고 김 의원의 행위를 ‘코인 투자’라고 부른다고 해서 문제의 성격이 달라지지 않는다. 김 의원에 대한 노동계급적 비판은 위법이 있었는지, 수익을 거뒀는지와는 구분된다.

윤리

김 의원의 투기에 대해 서민층이 분노와 환멸, 배신감을 토로하는 것은, 서민을 대표한다는 민주당 진보파 정치인이 수십억 원에 달하는 돈으로 코인 투기를 한 것 자체에 있다.(코인의 투기적 성격에 대해서는 ‘코인 시장은 거대한 도박판 — 규제 강화는커녕 적극 동참한 김남국 의원’ 기사를 보시오.)

지금까지 밝혀진 코인 사기 피해액만 5조 원이 넘는다는 추산이 있다. 사기 피해가 그 정도면, 코인을 샀다가 돈을 잃은 사람의 수나 그 손실 액수는 어마어마할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단순히 개인들의 투자 실패 문제가 아니다. 코인 시장 자체가 폰지 사기(다단계 판매)에 가깝다. 큰손들이 붐을 일으켜 일반인들을 시장으로 유인한 뒤에 그들에게 리스크를 넘기는 방식이다.

희망이 잘 보이지 않는 삶에 절망하거나 좌절한 서민들이 정규 소득으로는 부족한 소득을 보충하려고 백만 원, 천만 원 부은 돈이었을 것이다.

차익을 얻는 것 자체가 문제적인 이런 시장에서 김남국 의원은 일하는 시간, 일 안 하는 시간 안 가리고 투자를 했다. KBS 뉴스에 나온 한 코인 전문가는 이 정도 투자 범위와 규모이면, 국회의원 할 시간이 없었을 거라고 개탄했다.

이런 일은 진보파 국회의원이라는 정체성에 어울리지 않는 일이고 거래 액수도 과하다.

김 의원은 윤석열 퇴진 요구를 지지하는 대여 강경파로 인지도를 높이고 지지를 얻은 정치인이다. 더구나 거래 종목과 액수 등도 감안할 때 김 의원의 코인 투기는 지지자들을 배신한 위선이다.

게임업체와의 유착 의혹을 별개로 해도, 코인 투기는 그가 지지층에게 지지를 호소하며 내세운 정치의 목적, 명분, 가치와 상반되는 행동이다.

그가 정치색 없는 민간 변호사로서 수십억 원을 코인 투기에서 벌었다면 정치적 문제가 되진 않았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일은 사법 쟁점이라기보다는 계급 문제이자 계급 윤리의 문제이다.

이중잣대?

그래서 김 의원 코인 투기가 드러난 것이 검찰의 음모였든 아니든 중요치가 않은 것이다. 그 행위 자체가 문제적이기 때문이다.

진보 염원 서민들을 속인 이런 행동이 비판받지 않는다면 정치와 운동에서 원칙, 대의명분, 도덕 등의 문제가 점점 더 중요하지 않게 다뤄질 것이다.

그 효과는 ‘민주당·좌파에게만 엄격한 이중잣대 들이대기’(이 자체가 거짓 프레임이다)를 극복하는 것이 아니라, 개혁·좌파 정치 전반이 보수세력 닮아 가기일 것이다. 이는 개혁 염원 대중에게 환멸만 부추길 일이다.

그렇다면, 김 의원에 대한 비판이 반윤석열 세력을 분열시키고 윤석열을 이롭게 만드는 일일 뿐일까?

김 의원의 코인 투기에 대한 비판적 견해와 정서는 본지 보도 이전부터 반윤석열 진영에서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었다.

사실, 김 의원의 코인 투기를 비윤리적 행위라고 보아 조사를 시작한 것도 민주당 자신이다. 민주당 내 김남국 징계·제명론이 당내 보수파에게서만 나온 것도 아니다.

언론으로 치면, 성실한 취재로 검찰의 이재명 수사의 허점을 잘 폭로한 〈뉴스타파〉도 김 의원의 “거짓 재산 신고”를 찾아내 비판했다.

개혁 염원 청년들이 김남국 의원의 특권의식과 위선에 실망하고 배신감을 느끼고 있으므로, 윤석열 퇴진 운동이 정부와 국힘의 위선을 비판할 뿐 아니라 김 의원의 코인 투기에 대해서도 비판적인 태도를 취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만약 침묵한다면 오히려 운동의 확장이 방해받고, 분열이 조장된다. 본지 판매를 방해한 일부 민주당원들은 사실상 좌파 단속을 한 셈이다.

그러나 개혁 염원 대중이 윤석열에 반대하는 이유는 노동자 등 서민을 위한 더 진보적이고 개혁적인 정치를 바라는 것일 터이다. 김 의원의 특권의식과 위선을 감싸는 것이야말로 본말이 전도되는 것이다.


검찰과 조중동의 음모?

혹자는 검찰과 우파 언론들의 공격에서 반윤석열 진영을 방어하려면 그저 그들의 말을 믿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물론 검찰과 조중동을 곧이곧대로 믿을 수는 없다. 건설노조 고 양회동 열사의 분신에 대해 “유서 대필” 운운하고, 그 분신 항거 이후에도 수사와 구속을 멈추지 않는 자들을 어떻게 고스란히 믿을 수 있을 텐가.

그럼에도 어떤 사건의 성격을 규정할 때 그 사건 자체를 분석하면서 그 맥락을 따져봐야지, 문제를 모조리 검찰과 우파의 음모가 작용한 것으로만 봐선 안 된다.

윤석열 정부가 검찰 독재라는 주장을 둘러싸고 진짜 쟁점은 검찰을 좋게 보느냐 마느냐 하는 문제가 아니다. 검찰‘만’ 문제인 듯이 보는 주장은 윤석열의 정부의 국내외 안보 기조 강화와 친기업 기조를 총체적으로 반대하기 어렵게 만든다. 애초에 한국 자본주의가 그 정부의 등장을 필요로 했다.

지난해 진보 세력 일각은 검찰 수사권 회복에 대한 경찰 내 반발에 기대를 걸었다. 지금 경찰의 형태를 보면 그것은 얼마나 어이없는 환상인가. 노조 탄압, 공안 수사의 주역은 (검찰과 함께) 바로 경찰과 국가정보원이다.

검찰 수사 건들도 구체적으로 따져봐야 한다. 조국 전 법무부 장관 문제는 위법 여부를 떠나 계급 특권 행사라는 계급 윤리 문제였다. 게다가 그 자신이 청문회에서 ‘사회주의자’를 자처했으므로 더욱 그에 걸맞은 윤리가 요구됐다.

반면, 이재명 민주당 대표의 대장동 건은 본질적으로 정책 수행에 대한 판단 문제였는데도, 체포동의안이 현실 쟁점이 됐으므로 위법 여부에 대한 확증의 존재가 관건이었다. 검찰과 우파가 확증이 없으면서도 야당 대표(와 대선후보)를 파렴치한 범죄혐의자로 취급하는 것을 반대하고, 체포동의안에도 반대하는 것이 옳았다.

김 의원 건도 지금까지 밝혀진 바로는 개인의 치부 행위였으므로, 검찰·우파의 의도나 위법 여부가 아니라 윤리의 문제다.


음모론

계급사회는 소수가 다수를 지배하는 것이므로, 지배계급은 늘 사람들을 속이고 겁먹게 만들어 분열시켜야 한다. 따라서 지배계급은 늘 음모를 꾸미고 술책을 부린다.

지배계급의 음모에 대한 의심은 그들의 감언이설에 속지 않고 그 동기를 의심한다는 점에서 장점이 있다. 그러나 지배계급에 대한 불신과 음모론은 다르다. 음모론은 기계처럼 작동하는 세계가 누군가의 계획에 의해 정확히 움직이게 마련이라는 세계관이다.

하지만 이 넓은 세계, 이 많은 사람들이 그 긴 세월 동안 소수의 음모대로 움직인다는 세계관은 그 약점이 훨씬 더 크다.

박근혜 퇴진 때도 조선일보사가 박근혜·최순실 폭로에 앞장선 것 때문에 조선일보 음모론이 나돌았지만, 그 운동의 결과는 그들이 원한 것(우파 세력의 강화)이 아니었다. JTBC의 폭로 보도를 중시한 쪽은 삼성 음모론을 내놨는데, 박근혜 탄핵 후폭풍은 삼성 이재용의 구속으로 이어졌다.

음모가 지배하는 세상에서 음모를 간파한 사람들은 어떻게 생겨날 수 있는 것일까? 결국 음모론자들은 지배계급의 음모와 프로파간다에 세뇌된 대중과는 다른 ‘예외적 존재’들이 된다. 이런 엘리트주의는 특히 좌절감이 클 때 더 활성화된다.

반우파 진영의 연성 음모론적 경향이 “2찍들”(기호 2번이었던 윤석열과 국민의힘에게 투표한 보통 사람들을 가리키는 비속어) 비난으로 금세 이어지는 게 우연이 아닌 것이다.

그러나 “조선일보의 세뇌,” “검찰의 공작,” “친일파의 음모”가 세계를 지배한다면 민주화는 왜 어떻게 가능했고, 민주당은 어떻게 집권할 수 있었을까? 집권한 민주당 정부들이 능동적으로 개혁을 배신한 것과 우파 세력의 음모는 어떤 관계일까?

누구의 계획이든 실제로는 객관적 현실의 세력관계와 서로 다른 행위주체의 상호 영향 속에서 구현되는 것이다.

심지어 지배계급도 서로 간의 경쟁으로 분열해 있으므로, 그들의 음모도 단수가 아니라 복수로 존재한다. 음모들끼리도 충돌하는 것이다.

소수의 의지가 처음부터 끝까지 의도대로 관철돼, 사실상 미래가 예정된 세계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런 세계관은 실은 정치적 소외에서 비롯한다. 의지와 현실의 차이에서 오는 무력감이 근본 배경이다. 운명이 예정된 세계에서 자신들은 예외적 존재라는 생각이 위안을 주는 건지도 모르겠다.

저항이 전진하고 노동자 투쟁이 보편화되고 지속성을 발휘할 때 운동 안에서 이런 약점들이 극복될 가능성이 커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