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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호무역을 지지해야 하는가

우리는 미국의 제국주의적 압력에 반대한다. 그러나 그 압력을 물리치는 방법이 보호무역이 아니라 아래로부터의 계급투쟁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스크린쿼터가 부족하지만 다양성 증진에 일정 정도 기여한다”는 권호창 동지의 주장은 과장이다.

스크린쿼터 제도가 아니었다면 CJ, 시네마서비스, 쇼박스 등 멀티플렉스 극장을 보유하고 있는 대규모 투자·배급사들이 자신이 투자한 한국 영화들을 수백 개 영화관에서 동시 개봉하는 것이 가능하지 않았을 것이다.

따라서, 설사 대규모 투자 배급사들이 쿼터 일수를 채우기 위해서 가끔 “흥행성이 부족한 영화”를 걸어 주더라도 그것이 “다양성 증진에 기여”하는 부분은 거의 없다.

또, 스크린쿼터가 불안정하고 영세한 한국 영화 제작 산업을 보호하는 데도 커다란 한계가 있다.

스크린쿼터 제도 하에서 ‘영세’ 제작 자본이 모두가 계속 영세하기보다는 ‘양극화’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강제규 필름과 명필름이 합병하고 싸이더스와 좋은 영화가 합병하는 등 일부 제작사들은 몸집을 키워 나가고 있다.

이러한 와중에서 다른 제작 자본들은 CJ, 쇼박스, 시네마서비스 등 투자·배급사와 대규모 제작사 사이에 끼어 있다. 이것은 모든 자본주의 산업 분야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경쟁이 벌어지면서 대자본에 의해 영세 자본이 도태당하는 것이다. 따라서 일부 제작 자본들의 “불안정성과 영세”함은 단지 할리우드 영화만이 가하는 위협은 아니다.

또, “동일한 문제를 다루는 영화라 하더라도 국민국가의 경계가 만들어내는 정서적(미학적/문화적) 차이가 존재”하기 때문에 스크린쿼터를 지지한다는 주장에는 더더욱 동의할 수 없다.

물론 우리는 불균등하게 발전하는 세계에 살고 있다. 그러나 이것이 한 국민국가 안에 사는 사람들이 동일한 정서·미학·문화를 공유한다는 말과 같은 것이 아니다. 사실, 한 나라 안에도 불균등이 존재한다. 그 중 가장 근본적인 것은 계급적 차이다.

오늘날 세계화된 자본주의 체제에서 각 나라의 자본가들은 자국 노동자들보다 자기들끼리 훨씬 많은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예를 들어 ‘노동의 유연화’ 문제를 보자. 주한미상공회의소의 미국 자본가들은 한국 자본가들과 이 문제에 대해서 다른 입장을 가지고 있지 않다.

노동자들의 삶을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문제들에서 계급에 따라 서로 입장이 이렇게 갈리는데, “국민국가의 경계가 부과하는 문화적 특수성”라는 관념이 과연 얼마나 의미가 있는가?

그러나 이것은 권호창 동지 주장의 모순에 비하면 사소한 문제점들이다.

권호창 동지는 결론 부분에서 “이 운동에는 계급적 주장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하지만 막상 외국 영화 자본에 대해 한국 “영세” 영화 자본가와 영화 노동자들은 공통된 이해관계를 가지고 있다고도 말한다.

둘의 이해관계가 그토록 일치하면 “이 운동을 좀더 ‘왼쪽‘으로 옮기기 위해서 노력”할 이유가 있을까?

근본적으로, 독점 자본이든 영세 자본이든 자본가들의 요구를 추종하는 와중에 노동자들의 독자적 요구는 부각되기 힘들다.

전국영화산업노동조합은 스크린쿼터 지지를 표명했지만, ‘제작자본’들이 평균연봉 640만원, 1회 최장 근로시간 40.5 시간, 4대보험 가입률 1.3퍼센트인 영화 노동자들의 현실을 바꾸기 위한 요구들을 지지하고 있는가?

더구나 권호창 동지는 김어진 동지 글의 진정한 핵심을 간과하고 있다. 김어진 동지는 스크린쿼터 운동이 일부분을 이루는 한미FTA 반대 운동의 전략 논쟁이라는 맥락에서 스크린쿼터 문제를 제기한 것이었다.

먼저 스크린쿼터는 더는 한미FTA의 일부분이 아니며, 과거와 같은 전술적 가치를 가지지 않는다.

더 중요한 것은 한미FTA 반대 운동이 스크린쿼터를 방어하려 한다면 그것은 신자유주의 반대 운동을 자국 지배자 일부 방어 운동으로 만들려는 시도에 제대로 대응할 수 없게 된다는 것이다.

물론 김어진 동지는 ‘영화인’을 운동에서 몰아내자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영화인들이 계급에 따라 분열돼 있지만 그것이 운동으로 드러나고 있지 않은 상태에서 영화 노동자들이 자신을 착취하는 자본가들을 지지하지 않으면서도 얼마든지 미국의 신자유주의와 제국주의적 압력에 반대하고 노동조건 개선 투쟁을 벌일 수 있다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