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는 정전협정 70주년이다. 1950년 6월에 시작된 한국전쟁에서 양 진영 누구도 상대방을 굴복시키지 못한 채,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이 체결됐다. 이후 오랫동안 한반도는 냉전 제국주의 경쟁의 최전선이었고, 남·북한 사이에 군사적 충돌과 긴장이 지속됐다.

한국전쟁은 지금도 한국 사회에서 뜨거운 쟁점이다. 지난달 문재인이 《1950 미중전쟁》(책과함께, 2021)이란 책을 소개하며 “한국전쟁은 국제전”이라고 말하자, 여당은 북한과 김일성의 전쟁 책임을 모호하게 하는 메시지라며 비난했다.

여당은 한국전쟁을 ‘공산주의의 침략에 맞서 자유와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한 전쟁’이라고 본다. 이는 전통주의(주류적) 입장이다. 북한이 먼저 남침을 해서 한국전쟁이 시작됐고, 당시 남한과 미국은 전쟁 발발의 책임이 없으며 오로지 침략에 맞서 정당한 전쟁을 수행했다는 것이다.

얼마 전 윤석열이 ‘종전선언’을 추진한 쪽은 “반국가세력”이라고 말했는데, 여기서도 우파가 한국전쟁을 어떻게 보는지 드러난다.

그러나 한국전쟁은 미국과 소련(그리고 중국)이 벌인 냉전 경쟁의 산물이다. 냉전은 ‘자본주의 대 사회주의’라는 서로 다른 두 시스템의 경쟁이 아니라, 양대 초강대국의 제국주의적 경쟁이었다.

1950년 6월 이전에 미국과 소련 양측의 갈등은 이미 고조되고 있었고, 1948~1949년 베를린 위기 등 세계 곳곳에서 충돌이 생기기 시작했다. 이 무렵 미국의 대소련 정책은 더 공세적이고 군사적인 성격으로 바뀌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1950년 소련의 스탈린과 중국의 마오쩌둥이 김일성의 전쟁 개시에 동의했다. 중국 역사학자 션즈화의 한국전쟁 연구에 따르면, 스탈린은 한반도의 무장 충돌로 동북아에서 “부동항과 태평양으로 통하는 항구를 확보”할 수 있기를 기대했다.(《조선전쟁의 재탐구》, 선인, 2014)

스탈린은 한반도에서 미국을 상대로 대리전을 벌이려 했던 것이다. 물론 김일성도 그 나름의 지정학적 이해관계 때문에 전쟁에 적극적이었다.

그런데 미국도 한반도 전체가 소련 영향권에 들어가는 꼴을 좌시할 수 없었다. 남한이 미국의 동아시아 전략에서 일본을 방어하는 전초기지였기 때문이다.

와다 하루키 도쿄대 명예교수가 《한국전쟁》(창작과비평사, 1999)에서 인용한 미 육군 참모총장 헐 장군의 말은 이를 잘 보여 준다. “만일 공산주의자가 남한을 점령하면 일본의 목구멍 안쪽을 들여다보는 것이 된다. 한반도는 일본에 들이민 단검과 같다.”

션즈화는 전쟁이 “조선인 사이의 내전”으로 보였을 수 있지만, 스탈린과 모택동의 동의가 없이는 “내전” 자체가 발발할 수 없었다고 지적했다. 또한 미국도 전쟁 첫날부터 무력 개입을 결정했다. 그가 한국전쟁을 “국제성 전쟁”이라고 규정하는 까닭이다.

따라서 한국전쟁은 냉전이 열전으로 바뀌어 제국주의 강대국들이 한반도에서 힘을 겨룬 제국주의 전쟁이었다.

냉전이 열전으로

1945년 제2차세계대전에서 일본이 패하자 미군과 소련군이 한반도를 분할 점령했다. 미·소에 의한 38선 분할은 1948년 남북 분단 정권들의 수립으로 귀결됐다. 두 분단 국가의 탄생은 냉전의 산물이었고, 결국 한국전쟁의 재앙을 불렀다. 김일성뿐 아니라 남한의 이승만도 전쟁을 하고 싶어 안달이었다.

김일성이 스탈린과 마오쩌둥의 동의를 받아 1950년 6월 25일에 먼저 공격을 시작했다. 그는 남한 정부가 쉽게 무너져 금세 승리할 것이라고 기대했다.

그러나 김일성과 스탈린의 예상과 달리, 미국이 매우 신속하게 전쟁에 개입했다. 앞서 언급했듯이 남한은 미국의 전초기지였던 데다가, 남한 국가는 미국이 세운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이런 남한을 미국이 구하지 않는다면 미국 제국주의의 위신과 신뢰가 손상될 수 있었다.

미국 트루먼 정부는 즉시 미군을 남한으로 보냈고, 전쟁 발발 3일 만에 제7함대를 대만해협으로 보내 중국도 견제했다.

그래서 처음에는 북한군이 일방적으로 우세했지만, 이내 낙동강 방면에서 북한의 공세가 멈췄고 전선이 교착됐다.

9월 15일 미군의 인천상륙작전으로 전세가 역전됐고, 북한군은 패주하기 시작했다. 미국은 전세가 유리해지자 한반도 전체를 장악하기로 하고 38선을 넘어 압록강까지 북상했다. 그러자 10월 25일 중국군이 참전하게 됐다.

마오쩌둥은 미국의 북한 점령이 중국 본토를 심각하게 위협할 것이라고 여겼다. 자칫 대만과 한반도는 물론 당시 프랑스군이 있던 베트남까지 포함한 세 방면에서 중국공산당 정권이 위협받을 수 있었다. 따라서 마오쩌둥은 미국이 북한 전역을 차지하기 전에 전쟁에 뛰어들어 미군의 진격을 저지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중국이 전쟁에 개입하면서, 한반도는 미국·중국 등의 제국주의 군대가 직접 맞붙는 전장이 됐다. 중국군이 한때 서울까지 점령했다가, 1951년 5월쯤에는 전선이 38선 인근에서 고착됐다.

전선이 38선 근처로 고착되면서 미군과 중국군 모두 난처한 상황이 됐다. 미군의 화력과 제공권 때문에 중국군의 후방 보급선이 큰 위험과 곤란에 직면했다. 중국군의 겨울 공세에 밀렸던 미군도 북쪽으로 다시 진격하기 어려웠다. 정전협상이 시작된 이유다.

1951년 7월 10일 정전협상이 시작됐다. 그러나 1953년 7월 협정이 체결되기까지 협상은 2년이나 걸렸다. 협상 동안에 대규모 재래식 군대가 한반도 중부에서 살육전을 벌였다.

미국 공군은 북한의 식량 생산에 필수적인 거대한 댐을 공격했다. 또, 대량의 네이팜탄을 투하해 사망자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었다. 미국은 핵무기 사용을 진지하게 검토하고 모의 공격 훈련까지 했는데, 만약 전쟁이 1953년에 끝나지 않았다면 핵폭탄이 한반도에서 실제로 사용될 수 있었다.

한국전쟁은 베트남 전쟁보다 대량 학살이 더 많이 벌어지는 등 제2차세계대전 이후 미국이 개입한 전쟁 가운데 가장 파괴적이고 끔찍했다. 북한의 민간인 사상자는 200만 명 정도였는데 이는 전쟁 이전 인구의 20퍼센트에 해당했다. 제2차세계대전에서 가장 많은 사상자가 발생한 소련과 폴란드보다 훨씬 높은 비율이다.

한국전쟁은 1951년 봄에 끝날 수 있었다. 하지만 미국과 중국 모두 조금이라도 더 유리한 결과를 얻으려고 무려 159회나 회담을 열었다. 스탈린도 미국이 한국전쟁에 발목 잡혀 있기를 기대하며 전쟁이 좀 더 지속되기를 원했다.

회담장에서 양측이 이익을 챙기기 위한 설전을 벌이는 동안, 남·북한군과 미군, 그리고 중국군은 38선 주변의 고지 위에서 수없이 다치고 죽었다. 영화 ‘고지전’(장훈 감독, 2011)은 협상 기간 내내 단 한 뼘의 영토라도 더 차지하려고 벌인 참호전의 참상을 보여 준다.

분단의 고착화

정전협상의 주요 의제는 군사분계선 설정, 포로 문제, 감독기구 구성 등이었다. 화력에 자신 있던 미국은 당시 구축된 전선을 새로운 군사분계선으로 정하자고 주장한 반면, 중국은 38도선을 군사분계선으로 정하자고 제안했다.

최종적으로 정전협정이 조인되는 순간에 양쪽이 대치하고 있는 선을 중심으로 해 새롭게 군사분계선을 그리기로 합의했다. 그리고 군사분계선을 두고 쌍방이 2킬로미터씩의 비무장지대를 설정했다. 결국 전쟁이 시작된 그 경계선에서 전쟁이 끝난 꼴이었다.

가장 첨예한 쟁점은 전쟁포로 문제였다. 미국은 포로 자신의 자유선택에 의한 송환과 1:1 교환을 주장했다. 반면, 북한과 중국은 1949년에 조인된 제네바 협정에 따라 모든 포로는 본래의 소속국에 무조건 돌려보내야 한다며 전원 송환을 주장했다. 그러나 북한군 전쟁포로의 약 3분의 1이, 중국군 전쟁포로는 훨씬 더 높은 비율이 본국으로 돌아가기를 원하지 않았다. 우여곡절 끝에 이 문제는 전쟁포로의 자유 의지 방식으로 타결됐다.

물론 2년여에 걸친 협상이 완료된 근본적 이유는 정세 변화였다. 1951년 5월까지 미군 피해자만 6만 명에 이르렀다. 미국 국내에서 항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었다. 이런 분위기는 1952년 말 공화당의 아이젠하워가 종전을 공약으로 내세워 대통령에 당선된 배경이 됐다.

또한, 1953년 3월 전쟁포로 협상을 강하게 반대해 온 스탈린이 사망했다. 그러자 정전협상은 급물살을 탔다. 결국 1953년 7월 27일 판문점에서 국제연합군 총사령관 클라크와 북한군 최고사령관 김일성, 중공인민지원군 사령관 펑더화이가 정전협정에 서명했다. 남북 분단이 고착화되는 순간이었다.

정전협정에는 군사분계선과 비무장지대, 전쟁포로에 관한 조치 등 모두 5개조 63개항, 부록과 임시적 보충협정이 포함됐다.

제4조는 “정전협정이 조인·발효된 후 3개월 이내에 각각 임명된 대표로서 더 고위 수준의 쌍방 정치회담을 개최하고, 한반도에서의 모든 외국군대의 철수 문제, 한반도 문제의 평화적 해결 등의 제문제를 교섭에 의해 해결할 것”을 권고했다. 그래서 정치협상이 1954년 4월 26일 제네바에서 열렸지만 아무것도 해결되지 못한 채 막을 내렸다.

정전협정은 전쟁 재발을 막기 위한 다양한 조처를 담고 있긴 하지만, 제 기능을 상실한 지 오래다. 군비 증강을 막기 위해 남북 주요 항구에 설치됐던 중립국 감시소조들은 남·북한 정권들에 의해 모두 쫓겨났다.

정전협정에서 양측은 적대 행위를 중지해야 한다고 규정했지만, 비무장지대에는 남과 북의 무장 초소 200여 곳이 있었고 군사적 충돌이 계속돼 왔다.

정전협정은 해상 군사분계선에 대한 합의를 포함하지 못했다. 국제법상 영해는 영해기선 기준 12해리까지로 규정돼 있어, 남과 북의 영해가 서로 겹칠 수밖에 없었다. 이로 인해 정전 후 동해와 서해에서 수많은 무력 충돌과 총격전이 있었다. 서해 북방한계선(NLL)을 두고 수차례 벌어진 서해교전은 그 최근 사례다.

미국은 1958년 제4미사일 사령부를 창설해 전술 핵무기를 한반도에 배치했다. 이에 맞서 북한도 1961년 7월 소련 및 중국과 우호협력 및 상호원조조약을 통해 전시에 군사 및 기타 원조를 공급받기로 합의했다.

윌리엄 스톡 조지아대 명예교수는 “1958년 한국에 배치된 미국의 전술 핵무기는 서해를 건너 중국 일부까지 다다를 수 있었다”며 이는 중국의 북한 또는 동남아시아 지원을 억제할 목적이었다고 말했다(《1950 미중전쟁》). 이런 군비 경쟁 속에 결국 중국도 핵무기 개발에 박차를 가해 1964년 10월 첫 핵실험에 성공했다.

미·중 갈등과 한미동맹 강화

1953년 전쟁은 끝났지만, 같은 해에 체결된 한미상호방위조약을 근거로 미군은 남한에 계속 주둔했다. 그래서 올해는 정전협정 70주년이기도 하지만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로 한미동맹을 유지해 온 지 70년이 되는 해이기도 하다.

한국전쟁은 냉전 질서를 강화시켰고 미국은 이를 통해 서방을 결속시킬 수 있었다. 1954년 미국 전 국무장관 딘 애치슨은 “한국이 나타나 우리를 구했다”고 말했다. 그가 보기에 한국전쟁은 “거액의 국방 지출을 가능하게 만든 필요한 위기였다.”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미국 국방비는 180억 달러에서 490억 달러로 늘어나게 됐는데, 이는 1950년 6월의 4배 수준이었다.

일본은 한국전쟁의 특수를 챙겼고 자위대를 출범시키며 재무장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또 한국전쟁 기간에 이루어진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을 통해 제2차세계대전에 대한 면죄부도 챙겼다.

중국은 미국과 같은 회담 테이블에 앉아 정전협정을 체결하면서 세계인들에게 신중국의 위상을 보여 주며 국제적 지위를 높였다. 1954년 중국은 제네바회의에서 “국제 무대의 중심 위치”를 차지하였으며, 곧이어 개최된 반둥회의에서 주연을 맡았다.

냉전 시기 내내 남한은 미국의 대소련 전초기지였고, 한미동맹도 그 목적에 부응했다. 남한 지배자들은 미국 제국주의에 협력하며 미국이 주도하는 국제 질서 속에서 한국 자본주의의 성장을 도모했다. 그리고 이런 경험은 냉전이 해체되고 세계 제국주의 질서가 변한 오늘날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오늘날 중국은 미국과 겨룰 정도로 급부상했다. 미·중 갈등은 대만과 남중국해, 한반도 등지에서 군사적 긴장을 고조시키고 있다.

그런 가운데 미국 지배자들은 한국이 대중국 봉쇄에 협력할 것을 요구해 왔다. 한미동맹의 목적과 범위 등을 새로운 제국주의 갈등 상황에 맞춰 바꾸자는 것이다.

윤석열 정부는 이 요구에 부응하려는 도박을 시도하고 있다. 지난 4월 한미정상회담에서 ‘압도적 힘에 의한 평화’를 강조하며 한미동맹 70주년 공동성명을 채택한 이유다. 이 회담에서는 북한의 핵·미사일에 맞서 한미핵협의그룹(NCG)도 창설하기로 했다. 그래서 정전협정 70주년을 앞두고 한미핵협의그룹 회의가 열렸고, 미국 전략핵잠수함(SSBN) 켄터키함이 부산에 기항했다.

오늘날 한미동맹은 북한을 압박하고 중국을 견제하며 인도-태평양에서 지정학적 긴장을 고조시키는 한 축이다.

한국전쟁은 70여 년 전 이 땅에서 제국주의 강대국들이 직접 충돌한 전쟁이었고, 그 최대 희생자는 평범한 한국민들이었다. 그리고 오늘날 한반도는 여전히 제국주의적 경쟁이 자아내는 불안정에 깊이 휘말려 있다.

반제국주의적 대안이 절실한 오늘날, 한국전쟁의 역사적 비극을 돌아보는 것은 큰 가치가 있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