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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신탕을 먹는 게 인종 차별이라구?

최근 제프 블래터 국제축구연맹(FIFA) 회장은 “FIFA는 한국인이 개고기를 먹는 데 항의하는 수천 통의 편지를 접수했다”며, “이 문제는 내년 월드컵 공동 개최를 앞두고 한국의 국제적 이미지를 손상시킬 것”이라고 말했다. 서울이 올림픽을 치렀던 1988년에도 서구의 동물 권리론자들이 한국인의 개고기 식용을 비난한 바 있다. 개고기 식용을 앞장 서서 비난하는 인물은 유명 여배우 출신인 브리짓 바르도다. 그녀는 프랑스 나찌인 장 마리 르펜의 지지자일 뿐 아니라 자신의 책 《플루토의 광장》에서 “이슬람 교도의 숫자가 늘어나면서 조국 프랑스가 인구 과잉에 시달리고 있다”고 주장했던 극우 인종주의자다.

역겹게도, 그녀는 “한국인들이 개를 애완용과 식용으로 나누는 것은 백인과 흑인을 가르듯 인종 차별과 다름 없다”고 주장했다. 지난해 그녀는 “인종 차별과 증오, 인종 간 폭력”을 조장한 혐의로 벌금 2만 프랑을 선고받았다. 또, 1996년에는 외국인을 비하하는 발언을 해 기소되기도 했다.

물론 많은 프랑스인들은 브리짓 바르도처럼 생각하지 않는다. 개고기 식용에 대한 의견을 밝힌 많은 프랑스인들은 자신이 개고기를 먹어 본 적은 없지만 개고기를 먹는 것은 전혀 문제 될 것이 없다는 입장이다. 일부 프랑스인들이 달팽이 요리, 푸아그라(거위의 부은 간을 요리한 것)를 먹듯이 일부 한국인들은 개고기를 먹는다. 이것은 음식 문화의 다양성을 보여 줄 뿐이다. 1988년과는 달리 이번 개고기 논란에서는 문화적 다양성을 옹호하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독일의 유력 일간지 〈프랑크푸르터 알게마이네 차이퉁〉은 “제프 블래터 국제축구연맹(FIFA) 회장을 비롯한 국제 스포츠계가 개고기를 먹는 한국의 음식 관습에 대해 시비를 거는 것은 부당하다”고 지적했다. 이 신문은 “1998년 프랑스 월드컵 당시 FIFA가 프랑스인들에게 말고기, 달팽이, 개구리 뒷다리 요리를 먹지 못하도록 강요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동물의 권리?

개고기 식용을 비난하는 것은 문화적 다양성을 부정한다는 점에서 서구 중심적 편견에 가깝다. 그런데 개고기 논란의 이면에는 개를 포함해 동물에게도 권리가 있다는 동물 권리론자들의 주장이 깔려 있다. 우리는 동물을 가혹하게 학대하는 것을 반대한다. 그러나 동물에게도 권리가 있다는 주장은 설득력이 없다. 동물 권리론자들은 동물도 인간과 마찬가지로 감각이 있을 뿐 아니라 뇌를 가진 창조물이기 때문에 권리가 있다고 주장한다. 흑인, 여성, 동성애자, 장애인 등이 권리를 주장하는 것과 꼭 마찬가지로 동물에게도 권리가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동물을 실험 대상으로 삼는 일은 즉각 중단돼야 한다는 것이다. 이들은 왜 동물에게만 임상 실험을 하고 인간에게는 하지 않는가 하고 묻는다. 동물만을 실험 대상으로 삼는 것은 “동물 차별”이라고까지 말한다. 동물 권리 옹호론자들의 이런 주장에는 몇 가지 문제가 있다. 첫째, 인간과 여타 동물 사이의 차이를 부정한다는 점이다. 물론 인간의 신체에서 나타나는 생물학적·생리학적 과정이 동물의 신체에도 그대로 나타난다. 하지만 인간과 동물 사이의 주된 차이는 인간은 용량이 크고 발달한 뇌를 갖고 있을 뿐 아니라, 노동을 한다는 점이다. 노동 덕분에 인간은 말할 수 있는 능력과 도구를 만들고 조작할 수 있는 능력을 갖게 됐으며, 그 결과 사회 조직을 건설할 수 있게 됐다. 인간에게는 변동하는 역사가 있지만 동물에게는 단순한 반복일 뿐인 과거만이 있을 따름이다. 브리짓 바르도는 “개는 오리나 거위보다 사람과 더 가깝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실제로는 인간과 여타 동물들 사이의 차이가 훨씬 더 근본적이며 개는 인간보다는 오히려 오리나 거위에 더 가깝다.

둘째, 동물에게 권리가 있기 때문에 개고기 식용에 반대한다면 이런 주장은 어디까지 나아갈까? 브리짓 바르도는 “소는 식용이기 때문에 먹어도 된다”고 말한다. 하지만 동물 권리 옹호론자들의 논리에 따른다면 소도 감각을 갖고 있고 뇌를 가진 창조물이기 때문에 그 권리를 인정해 줘야 한다. 그러면 서양 요리에 자주 등장하는 참새우는 어떤가? 인간과 친하다는 이유로 고양이의 권리를 보호해야 한다면 쥐의 권리는 어떻게 되는가? 도대체 어느 동물까지 그 권리를 보호해 줘야 하는가? 이 점에서 사실상 특정 동물의 권리를 말하는 동물 권리 옹호론자들의 주장은 위선에 가깝다.

더욱이 자연 세계는 약육강식의 법칙이 지배한다. 고양이가 쥐를 잡거나 사자가 물소를 공격하는 일은 어쩌면 가장 ‘자연스런’ 모습이다. 그런데 동물 권리 옹호론자들은 오로지 인간만이 동물의 권리를 무시하는 사악한 존재인 듯이 말한다.

약육강식

셋째, 동물 권리 옹호론자들이 “권리”라는 말을 쓸 때 드러나는 문제점이다. 역사에서 피억압자들(흑인, 여성, 동성애자, 장애인 등)은 스스로 자신의 권리를 쟁취하기 위해 억압에 반대해 싸웠다. 억압받는 사람들이 다른 누군가(백인, 남성, 이성애자, 비장애인 등)에 의해 권리를 보호받지는 않았다. 역사적으로 권리라는 단어는 정치적·사회적 투쟁의 맥락에서 쓰여졌다. 따라서 동물 권리 옹호론자들이 “고양이, 개, 원숭이는 권리를 갖고 있어”라고 말할 때, 그 권리는 동물의 권리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의무를 가리키는 말이다. 마지막으로, 가치 판단의 문제가 존재한다.

인류가 이룩한 과학 발전과 의학의 진보에도 불구하고 많은 치료약을 개발하기 위해서는 동물을 실험할 수밖에 없다. 앞으로도 이런 상황은 크게 바뀌지 않을 것이다. 예컨대 에이즈 치료약을 개발하기 위해서는 침팬지를 실험 대상으로 삼을 수밖에 없다.

인류의 삶을 질병으로부터 해방하기 위해서는 동물의 ‘권리’를 침해할 수밖에 없다. 그러니 동물 권리 옹호론자들은 인류가 질병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길을 포기하라고 주장하는 꼴이다. 그러면 인간이 자신들에게 주어진 권리를 포기하고 동물의 권리를 옹호해야 할 만큼 동물이 인류에 비해 특별한 존재인가? 동물 권리 옹호론자들 내에는 정치적으로 좌파와 우파가 혼재돼 있다. 그렇지만 많은 극우 집단들이 동물 권리 옹호론자들 속에 스며들어 있다는 것도 공공연한 비밀이다. 동물 권리 운동의 역사는 매우 역겨운 일들로 점철돼 있다. 동물 권리 운동은 동물 도살 방식을 두고 유대인이나 무슬림들을 공격한 역사도 갖고 있다. 그리고 1930년대 나찌 독일에서만 동물에 대한 실험을 금지했다. 대신 나찌 독일은 인간 생체 실험을 했다.

우리에게는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사회가 필요하듯 과학을 발전시키는 것 또한 중요하다. 이 과정에서 인류는 도덕적·정치적·사회적 선택을 할 수밖에 없다. 동물 권리 옹호론자들이나 극단적인 환경론자들은 인간보다 개나 침팬지 또는 고래의 생명을 더 소중하게 여긴다. 하지만 우리는 인간의 목숨을 구할 수 있다면 동물 실험을 계속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