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전후사의 재인식》 2권에서 한국전쟁 관련 글을 쓴 김영호는 노무현이 “여론의 눈치를 보면서 [이라크] 파병 부대의 성격과 규모에 대한 결정을 유보해 왔다”며 이라크 파병을 적극 촉구한 인물이다.

이 책에서 김영호는 한국전쟁의 원인을 “스탈린의 롤백(roll back) 전략”에서만 찾고 있다. “스탈린이 냉전 개시 이후 처음으로 북한군을 이용해 미국의 봉쇄선을 넘어서 남한을 북한에 흡수시키고 한반도 전역을 소련의 영향권 아래로 편입”시키려 했다는 것이다.

이는 우익들이 한국전쟁의 원인을 ‘스탈린의 지령을 받은 김일성의 침략’으로 묘사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은 입장이다.

김영호 식의 추론이 아예 불가능한 것은 아니지만 매우 일면적이다. 그리고 이것은 의도된 일면성이다. 그래서 이 논문에는 크게 세 가지 문제가 있다.

첫째, 김영호는 스탈린의 군사적 공세를 강조함으로써 상대적으로 미국 제국주의의 봉쇄 정책이 수동적이며 방어적이라는 듯한 인상을 준다.

그러나 미국의 봉쇄 정책은 대소련 정책과 해당 국가의 계급투쟁에 대한 대책 모두에서 매우 호전적이었다. 마셜 플랜의 주요 입안자 중 한 명인 로스토우는 마셜 플랜이 “스탈린이 아직 장악하지 못한 지역을 강화하기 위한 공세의 일환”이라고 실토한 적이 있다.

예를 들어, 1948년 독일에서 미국과 영국과 프랑스는 각각의 점령지구를 통합해 소련 점령 지구를 사실상 고립시켰다. 소련은 이에 반발해 서베를린을 봉쇄했다.

한편, 미국은 1947년 그리스에서 내전이 진행중일 때 우익을 지원해 좌파와 노동계급 운동을 궤멸시켰다. 가브리엘 콜코가 정확히 지적했듯이, “유럽에서 좌익이란 공산주의자들을 능가하고 빈번히 그들을 반대하기까지 한 부상하는 노동계급이었”다. 미국의 봉쇄 정책은 서방세계에서 노동계급의 전투성을 압살하는 것을 포함했다. 또, 촘스키가 말하고 있듯이 “미국은 제2차세계대전 후 제3세계의 혁명적 변화에 강력히 반대”했다.

스탈린이 롤백을 추구했을 때 미국 역시 비슷한 ‘롤백’을 추진하고 있었다. 당시 동북아시아에서 미국과 소련 사이에서는 정치·군사적 긴장이 장군 멍군 식으로 급상승하고 있었다.

마오쩌둥이 중국을 석권하자 미국은 일본에 대한 소련의 영향력을 배제하려고 일방적인 강화조약에 나섰다. 미국은 이른바 ‘역코스 전략’을 채택해 일본을 재무장시키려 했다. 이런 과정은 다시 소련·중국·북한 블록을 긴장하게 만들었다.

게다가 이후 미국의 봉쇄 전략은 좀더 군사적인 성격을 강조했다. 예를 들어, 1950년 봄에 제출된 NSC 68 문서는 “소련이 팽창하는 것을 막아야 할 뿐만 아니라 소련의 영향력을 감소시키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주장”했다(박태균, 《한국전쟁》, 책과함께).

둘째, 김영호는 스탈린의 ‘롤백’을 입증하기 위한 근거를 대체로 소련 붕괴 후 공개된 소련측 문서에 의지하고 있다.

부차적 논점이기는 하지만 이 문서들이 곧바로 한국전쟁의 기원을 설명해 주는 것은 아니다. 이 문서들은 김일성-스탈린-마오쩌둥 사이의 전쟁 결정 과정을 보여 줄 뿐이다. 또한, 이 문서들 자체는 스탈린보다는 김일성이 전쟁 개시에 적극적이었다는 것을 보여 준다.(물론 러시아가 자신들에게 유리한 문서들만 선별해서 공개했을 가능성은 있다.)

이 점에서, 우익들이 공개된 소련측 문서들을 이용해 수정주의가 완전히 파산했다고 주장하는 것은 비약이다. 이들은 수정주의의 입장을 북침론, 남침 유도설 등으로 협소화시키면서 개전의 주체, 즉 누가 먼저 총을 쏘았는가 하는 문제로만 접근한다. 이를 통해 한국전쟁의 책임을 한쪽에 전가함으로써 사후적 정당성을 부여받으려 한다.

김영호는 “스탈린이 … 미국의 개입 가능성을 예상하고 … 대비책들을 마련해 두고 있었다”고 말한다. “스탈린은 만약 맥아더가 만주로 확전한다면, 중소군사방위조약을 발동해 … 미국을 거대한 황무지인 만주로 끌어들여 일대 타격을 가하고자 계획했”다는 것이다.

이런 주장을 극단으로 밀어붙이면 우익판 ‘전쟁 유도설’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는 사실상 한국전쟁의 전개 과정과 결과만을 보고 사후적으로 스탈린의 의도를 역으로 도출한 가설이다.

김영호 식의 추론이 타당하다면 수정주의자들이 주장하는 ‘미국에 의한 남침 유도설’ 역시 성립 불가능할 이유가 없다. 이 점에서 전쟁 직전 이승만-맥아더 블록 등 ‘아시아 롤백론자’들의 유착은 좀더 밝혀져야 한다.

셋째, 김영호는 한국전쟁의 원인을 분단에서 찾는 내전론을 비판한다. ‘모든 분단 국가가 전쟁을 하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미국과 소련에 의한 강제 분단을 전쟁의 원인과 떼어 설명할 수는 없다. 그가 분단을 전쟁의 원인과 분리하는 것은 결과적으로, 1945년 38선 분할 점령을 제안한 책임에서 미국을 면제시키는 것이다.

게다가 남한과 북한 사이의 군사적 적대를 과소평가할 수는 없다. 1950년 6월 북한군의 전면적인 남하는 어느 누구에게도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이미 1949년부터 38선 상에서는 크고 작은 무력 충돌이 빈번했다.

물론 38선 상의 국경 분쟁이 곧바로 한국전쟁으로 비화했다고 보는 데는 무리가 따른다. 그러나 전쟁 직전 38선 상의 무력 분쟁들은 당시 남북 간의 군사적 적대와 긴장의 정도를 보여 주기에는 충분하다.

김일성과 이승만 모두 각각의 통일 전쟁을 꿈꾸고 있었고, 진심으로 상대방을 타도하려 했다. 김일성은 1948년부터 ‘민주기지론’에서 벗어나 본격적으로 ‘국토완정론’을 주장하면서, ‘혁명의 확산’을 선동했다.

이승만도 이에 지지 않았다. 그의 북진통일론은 단순한 허풍이 아니었다. 1949년 초반까지만 해도 남한군은 병력과 무기 면에서 북한군보다 우월했다. 비록 남한의 북침은 미국의 승인이 없어 실현되지는 않았지만, “지금까지 공개된 수많은 미·소의 자료들은 [1949년] 7월 남한의 공격 가능성을 거론하고 있”었다(정병준, 〈1949∼1950년 38선 충돌과 북한의 한국전쟁 계획〉).
이승만은 1949년 9월 30일에 로버트 T 올리버에게 보낸 편지에서 (시간을) “끌면 끌수록 일은 어렵”다며, “북벌을 갈망”하고 있다.

어떤 면에서 남과 북 모두 상대방의 침공을 내심 원했다. 그래야 그것을 빌미로 ‘합법적’ 통일전쟁을 수행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커밍스가 적절히 지적하듯이, “1950년에 양측의 논리는 누가 멍청하게 먼저 움직일지 지켜보는 것이었다”(커밍스, 《한국현대사》, 창비).

이런 점들을 종합해 보면, 한국전쟁은 내전으로 시작됐지만, 곧바로 제국주의 대리전으로 성격이 변할 수밖에 없었다고 보는 것이 가장 정확할 것이다.

김영호는 자신의 이론을 강연하면서 “과거사 청산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민족을 참혹한 고통 속에 빠뜨린 김일성에게 먼저 책임을 물어야 한다”고 결론 내린 바 있다. 그러나 한국전쟁의 책임은 스탈린과 김일성에게 뿐 아니라 미국과 이승만에게도 똑같이 물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