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사들이 수업과 생활지도 등에 큰 어려움을 겪는 현실이 알려지자 일각에서는 “문제 학생”들을 배제시킬 권한을 늘리는 것만이 해법이라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수업 받을 의사가 없는 학생들의 폭력과 방해에서 수업 받길 바라는 학생들을 보호해야 한다며 말이다.

아이들은 체제의 피해자이지, 가해자가 아니다 ⓒ출처 amenclinicsphotos ac (플리커)

아니나 다를까, 윤석열 정부의 정책은 이 방향을 향하고 있다. 그들의 출발은 행동에 난점을 보이는 아이(이하 ‘어려운 행동을 하는 아이’)를 성적 경쟁에서 학교의 발목을 잡는 존재로 여기고, 맨 먼저 치워야 할 대상으로 취급하는 것이다.

교사들이 겪는 고통이 너무 크다 보니, 최근 일부 교사들이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겉보기로 그럴싸해 보이는 해결책에 매달리는 것, 심지어 피해 당사자인 아동을 빌런으로 여기는 해결책에 매달리는 것도 사실 놀라운 일은 아니다.

그러나 아이러니이게도, 학생 배제 권한을 강화해 달라는 요구는 교사들이 겪는 문제를 더 악화시키기만 할 것이다.

어려운 행동을 하는 아동을 배제하자는 주장은 미안하리만큼 딱하다. 그런 아이들 중 압도적으로 많은 경우가 차별받는 사람들 가운데서도 가장 가혹한 처지에 있기 때문이다.

물론 예외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신체적·성적 학대를 경험한 아이, 극빈층의 아이 등이 더 높은 확률로 어려운 행동을 하는 아동이 된다는 사실 앞에서 누구나 멈칫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런 아이들을 배제하라는 주장이 참담하고 불행한 이유는 그 아이들이 스스로 바뀔 가능성을 일축하고, 그 아이들을 배제하는 것이 공동선이라는 관점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학교 교육이 되도록 모든 아이들을 포함해야 한다는 것은 당연하고도 기본적인 원칙이다. 전문가들은 어려운 행동을 하는 아이들을 일반 학급에 포함시키는 것이 가능할 뿐 아니라, 오히려 그런 통합만이 유일하게 현실적인 방안이라고 지적한다.

어려운 행동을 하는 아이를 이전에는 “부적응아”라고 불렀었다. 용어를 바꾸게 된 것은 단지 정치적 올바름 때문만은 아니다. “부적응”이라는 용어에는 결함을 순전히 아동 개인에게서 찾는 생각이 깔려 있다. 마치 고장난 기계를 다루듯, “부적응아”도 적당히 조이고 닦으면 된다는 식이다.

그러나 아동의 행동은 외부 세계와의 상호작용의 영향을 크게 받는다. 예컨대 정부의 교육 예산 삭감과 교사에 대한 압박도 문제의 일부일 수 있다. 해당 학교의 방침과 관리자들에게서 문제점을 찾아야 할 때도 자주 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아이들에 대한 정신병리학적 조사(“저 아이에게 대체 무슨 문제가 있는 걸까?”)보다는 행동 분석(“그 아이는 무얼 하고 있지?,” “저런 행동을 하기 전에 무슨 일이 있었지?”)이 필요하다. 정신병리학적 추론보다 행동 관찰을 더 중시하는 것은 문제를 더 객관적으로 다루기 위한 접근법이기도 하다.

교사·학부모·학생은 뒤틀린 교육 현실에 맞서 함께 싸울 수 있다. 2008년 12월 일제고사 반대 집회 ⓒ임수현

때로는 학생을 일시적으로 교실에서 떼어놓아야 하더라도 그 아이의 행동을 바꾸는 데에 가장 중요한 것은, 결국 그 아이가 긍정적인 또래집단 롤모델들에서 차단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상담 등으로 전문적 지원을 해 주는 교사는 그런 아이들이 ‘품행’ 관리 방안을 놓고 담임교사와 합의하도록 중재하고, 아이의 자기인식을 개선하도록 돕고, 분노 반응이 일었을 때 그걸 조절하는 방법을 상담하고, 적절하게 자신의 주장을 펼 방법을 가르칠 수 있다.

이와 전혀 다른 대처법으로는, 그런 아이들을 별도의 공간으로 보내버리는 것이다. 그러면, 그 반의 공식 명칭이 뭐가 됐든, 관련 교사들이 어떤 노력을 기울이든 결국 그 반은 “문제아 반”으로 불리게 될 것이다.

그런데 해외 사례를 보면, 아이들을 되도록 일반 학급에서 수업을 받도록 하는 경우와 그렇지 않은 경우는 행동상에 확연한 차이가 나타났다. 일반 학급에 속한 채 일시적으로만 분리되는 아이들이 교사를 공격하는 경우는 드물었지만, 일반 학급에서 사회화될 기회가 영구적으로 차단된 아이들 사이에서는 공격적 행위가 자주 벌어졌다.

어려운 행동을 하는 아이들을 일반 학급 밖으로 쫓아버리자는 주장은 실제로 적용할 때에도 난관에 부딪힌다. 그런 아이들의 첫째 무리를 학급에서 쫓아내면 잠시 동안은 교실이 잠잠할지 모른다. 그러나 몇 주만 지나면, 이전까지는 절반 정도 순응했던 학생들이 서열을 타고 올라가 앞서 쫓겨난 아이들을 대신하게 된다. 현재의 학교에서는 그런 아이들이 사실상 무제한적으로 양산될 수 있다. 학생을 일반 학급 밖으로 쫓아버리자는 주장은 교실 안에서, 그리고 교실 밖 사회에서 벌어지는 상호작용을 간과하고 있다.

어려운 행동을 하는 아이들을 일반 학급에서 함께 수업하기 위한 도움과 지원이 확충돼야 한다. 그러나 근래에 정부는 학생 수 감소를 이유로 교사 수를 계속 감축해 왔다. 게다가 경제 위기와 청년 실업, 고용 불안, 대학 구조조정 등으로 입시와 성적에 대한 불안감은 커져 왔다.

그 결과, 오늘날 교사들은 도저히 수업이 불가능한 교실에서 수업하라는 부당한 요구에 직면해 있다. 어려운 행동을 하는 아이들을 제대로 품을 수 있을 만큼 학급의 크기를 줄이라고 요구하며 교사들의 집단적 힘으로 그런 지원을 쟁취하려고 해야 한다.

또한 교육이 노동시장을 지향하지 않고 아이들의 진정한 발달을 위하는 것이 되도록 사회를 근본적으로 바꿔야 한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아이들이 아니라 정부와 정부가 관철시키려는 체제의 우선순위가 진정한 빌런이다. 아이들은 이런 체제의 피해자이지, 결코 가해자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