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츠 파농은 알제리해방전선 지도자 중 한 명이고 1961년 《대지의 저주받은 사람들》(국역: 그린비, 2010)이라는 영감 가득한 책을 냈다. 프랑스의 마르크스주의 철학자이자 저명한 저술가인 장폴 사르트르(1905~1980)는 파농의 그 책에 짧지 않은 추천사를 썼다. 그 글에서 사르트르는 프랑스 좌파에게 알제리인들의 무장 투쟁을 지지하고 자신의 투쟁처럼 여겨야 한다고 촉구했다. 이하의 글은 사르트르 글의 발췌이다.

[ ] 안의 내용은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노동자 연대〉 신문 편집팀이 넣은 것이다.


폭력은 식민지배로 파괴된 인간성을 회복하는 과정이다. 암살당한 팔레스타인 지도자의 2022년 장례식 ⓒ출처 Ahmad Al-Bazz / Activestills

이 책[《대지의 저주받은 사람들》]을 읽으려면 용기가 필요하다. 이 책을 읽으면 첫째, 당신은 창피함을 느낄 테지만, 창피함은 (마르크스도 말했듯이) 혁명적 감정에 속한다. 유럽인으로서 나는 적진[프랑스에 대항하는 알제리인들]의 책을 훔쳐서 유럽을 위한 치료제를 만들었다. 이를 최대한 활용하길 바란다.

이 책을 읽어야 할 또 다른 이유가 있다. [조르주] 소렐의 파시즘 냄새가 나는 주장을 논외로 한다면, 파농이야말로 엥겔스 이후로 처음으로 역사적 과정을 밝히 들춰 낸 인물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무엇보다 파농이 폭력에 관해 흔치 않은 입장을 취하는 것이 불우한 어린 시절이나 난폭한 성격 때문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파농은 다만 현 상황을 해석할 뿐이다.

식민주의자들이 자행하는 폭력은 단지 식민지 민중과 거리를 두려고 자행되는 것이 아니다. 진정한 목적은 식민지 민중을 비인간화시키는 것이다. … 농민에게 총구를 들이밀고 외지인들이 들이닥쳐 땅을 빼앗고, 그들을 위해 농사를 지으라고 폭력적으로 강요하는 상황. 그런 상황에서 저항하는 농민은 병사들의 총에 맞아 시체가 될 것이다. 만약 굴복한다면, 그는 전보다 더 낮은 존재로 격하되고 인간이 아닌 것이 된다. 수치심과 두려움이 그의 인격을 분열시키고 마음속 깊숙한 곳에 있는 자아를 파괴한다.

그러나 이 모든 노력에도 불구하고 식민주의자들은 목적을 한참 달성하지 못했다. 콩고에서는 흑인들의 손목을 자르고, 앙골라에서는 불만 분자의 입을 막으려고 입술에 구멍을 뚫어 쇠자물쇠를 달았는데도 말이다. 나는 인간을 결코 짐승으로 만들 수 없다고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다만, 인간을 심각하게 약화시키지 않고서는 그럴 수 없다는 것이다.

알제리와 앙골라에서 유럽인들은 눈에 띄는 즉시 도륙당하고 있다. … “자유주의자”들은 충격에 빠졌다. 그들은 우리가 토착민들을 충분히 친절하게 대하지 않았다거나, 가능한 선 안에서 일부 권리들을 인정하는 편이 더 현명하고 공평했겠다고 토로한다. 그들이 촉구하는 것은 토착민들에게 도움도 주지 않은 채 그들을 우리와 같은 인류라는 아주 사치스러운 클럽에 조금씩 끼워 줘야 한다는 것일 뿐이다. 그런데 이제 토착민들의 이 야만적이고 광적으로 분출하는 폭력은 자유주의자들도 고약한 정착민 못지않게 가차없이 처단하고 있다. 본국의 좌파는 당황하고 있다. 그들은 토착민들이 처한 실제 상황과 토착민들에게 가해지는 무자비한 억압을 안다. 그들은 토착민들의 반란을 규탄하지는 못하는데, 그런 반란을 초래한 모든 책임이 바로 우리[유럽인]에게 있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알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전히 그들은 일정한 한계가 있어야 한다고 속으로 생각한다. 이 게릴라들이 최대한으로 기사도적인 모습을 보여 줄 필요는 있다고 말이다. 그들은 그것이 게릴라들도 인간임을 보일 최상의 방법이라고 주장한다. 때때로 좌파는 게릴라들을 꾸짖는다. “당신들은 너무 막 나가고 있다. 우리는 더는 당신을 지지할 수 없다.” 토착민들은 그런 자들의 지지에 조금치도 신경 쓰지 않는다. 그런 자들이 가져다줄 수 있는 유익은 변기통에 들어가도 아깝지 않은 것들뿐이기 때문이다. 일단 전쟁이 시작되자 그들은 다음과 같은 냉혹한 진실을 마주했다. 우리 중 누구도 책임에서 자유롭지 못하고, 토착민들의 희생 위에 얻은 무언가를 작을지언정 누리고 있다는 진실 말이다. 토착민들은 어떠한 목격자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 토착민들은 누구에게도 편의를 봐 주지 않는다.

우리 중 가장 훌륭한 정신의 소유자들도 인종적 편견을 갖고 있다. 그런 사람들은 파농을 읽어야 한다. 파농은 지금의 억제될 수 없는 폭력이 무익한 울부짖음이나 야만적 본능의 부활, 심지어 원한의 결과도 아닌 인간이 스스로를 재창조하는 과정임을 분명하게 보여 준다. 우리는 한때 다음의 진실을 이해했지만 어느 순간 잊고 말았다. 어떠한 신사적인 태도로도 폭력의 흔적을 지울 수는 없다는 것을 말이다. 오직 폭력 그 자체만이 그것을 없앨 수 있다. 정착민들을 무력으로 몰아내면서 토착민들은 식민 지배가 안겨 준 신경증을 치유한다. 끓어넘치는 분노 속에서 그는 잃었던 순수함을 재발견하고, 그 과정에서 자신이 스스로 자아를 만드는 것임을 스스로 깨닫게 된다. 토착민들의 전쟁에서 멀찍이 떨어져 있는 우리는 그런 과정을 야만의 득세라고 여긴다. 그러나 그런 주체적 행위를 통해 반란자들은 더딜지언정 확실하게 해방을 성취한다. 그런 행위를 통해 식민 지배의 상처를 자신의 내부와 그의 주변에서 한 조각씩 파괴하기 때문이다.

반란자들의 무기 사용은 그들이 인간이라는 증거다. 반란의 첫 시기에 살상은 필수적인 것이다. 유럽인을 죽이는 것은 한 번에 두 가지를 성취한다. 압제자뿐 아니라 그 압제자가 지배하던 인간을 함께 파괴하는 것이다. 한 명은 시체로 남고, 다른 한 명은 해방된 인간으로 남는다. 살아남은 자는 처음으로 자신이 밟고 있는 것이 자기 민족의 땅이라고 느낀다.

이것이 변증법의 귀결이다. 당신은 이 전쟁을 비난하지만 알제리 투사들의 편에 서겠다고는 감히 선언하지 않는다. 걱정 마라, 정착민들과 용병들이 있지 않은가. 그들은 당신이 더는 회피하지 못하도록 해 줄 것이다. 마침내 더는 도망갈 곳이 없는 순간이 닥치면, 낡고 되풀이되던 범죄들이 당신 안에 씨 뿌려 놓은 폭력에 당신도 마침내 고개를 끄덕이게 될지 모른다. 그러나 이에 관해 더 자세히 얘기할 필요는 없다. 그것이 바로 인류의 역사이기 때문이다. 때가 도래하고 있고, 단언컨대 우리는 역사를 만드는 자들의 대열에 함께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