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년 전 러시아에서 좌익반대파가 조직되기 시작했다. 사이먼 바스케터가 국제 혁명과 노동자 민주주의를 위해 싸운 좌익반대파의 중요성에 대해 말한다.


그들은 “한 시대의 화신이었다.” 빅토르 세르주가 그의 소설 《세기의 어둠》에서 좌익반대파에서 활동한 혁명가와 노동계급 투사들을 두고 한 말이었다.

좌익반대파는 “사회주의 사상과 도덕, 제도의 부활”을 위해 스탈린주의의 살인적인 권위주의에 맞서 싸웠다.

1920년대 러시아 좌익반대파 지도자들. 트로츠키(앞줄 가운데)는 좌익반대파를 이끌며 러시아 혁명을 사수하려고 애썼다

이 투쟁은 1923년에 러시아 혁명가 레온 트로츠키가 러시아 공산당 지도부의 동료들에게 비밀 서한을 보내면서 시작됐다. 이 서한은 파업 노동자들을 고무하는 그룹들을 탄압함으로써 혁명이 어떻게 타락하고 있는지 자세히 설명했다. 그리고 트로츠키는 애초에 파업을 초래한 경제 정책을 비판했다.

1923년 10월 15일 공개 서한이 발표됐다. 공산당의 중요한 인물 46명이 나라가 경제 파탄으로 위협받고 있다고 선언했다.

그들은 또한 당 중앙 조직이 당대회 대의원을 지명함에 따라 당대회가 “그 어느 때보다도 이 위계 구조의 집행 기관이 돼 가고 있다”고 항의했다.

그들은 계속해서 “현 정권은 당내 분파의 독재다”라고 말했다.

이 그룹에는 경제학자 예브게니 프레오브라젠스키, 산업 조직자 게오르기 퍄타코프, 기관지 기자 레프 소스놉스키, 적군(赤軍)의 영웅 이반 스미르노프, 그리고 동궁 습격을 이끌었던 블라디미르 안토노프옵세옌코가 있었다.

이밖에도 모스크바 수비대 사령관 니콜라이 무랄로프, 우크라이나 볼셰비키의 창립자 예우헤니야 보시, 그리고 금지된 다른 분파들의 옛 구성원들이 있었다.

트로츠키는 이 공개 서한에 서명하지 않았는데, 부분적으로 당을 분열시킨다는 비난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1917년 혁명으로 옛 지배자들이 제거되고 노동자들과 농민들이 권력을 장악했다. 그렇다면 무엇이 잘못됐던 것인가?

무엇이 잘못됐나?

소비에트(노동자평의회)는 처음에 권력을 장악했었다. 그러나 1918년부터 1921년까지 반혁명과 외세의 침략에 맞서 싸우는 동안 노동계급이 심각한 타격을 입어 소비에트는 속 빈 강정이 됐다.

1923년 4월 제12차 당대회에서 당 상근자들이 처음으로 대의원의 과반수인 55퍼센트를 차지했다. 국가 기구는 수많은 구 차르 체제의 관료층으로 채워졌고 거기에 새로운 관료층이 합류했다. 처음에 이 관료 집단은 노동자나 농민처럼 러시아 사회 내의 경쟁하는 이해관계들 사이에서 줄타기를 했다.

러시아는 레닌이 1921년에 “관료적으로 일그러진 노동자와 농민의 국가”라고 묘사한 몇 가지 특징들을 띠게 됐다. 그 관료 기구는 독자적인 이해관계를 발전시키기 시작했다.

내전의 참화 후에 시행된 ‘신경제정책’(NEP)은 농민들을 정권과 화해시키고 경제 발전을 촉진하려는 시도였다. 신경제정책은 사적 상품 생산을 제한적으로 허용했다.

경제 전반이 농민 생산의 필요와 시장 세력의 필요에 의해 굴러가는 가운데 국유 산업은 그런 경제의 한 요소로서만 작동할 수 있었다. 이것은 후퇴였다.

이 정책으로 민주주의가 확대된 것이 아니라 약화됐다. 1921년에는 당이 “노동자반대파 강령”을 25만 부 인쇄했었다. 그리고 노동자반대파 회원 두 명이 중앙위원회에 선출됐다.

그러나 46인의 반대파가 발표한 공개 서한에 대해서는 체계적인 비방으로 대응했다.

일부 성원이 트로츠키를 방어했다는 이유로 “콤소몰”(공산주의청년동맹) 중앙위원회의 다수가 해임됐다.

이런 대응을 정당화하기 위해 지배 분파는 “레닌주의” 숭배를 고안해 냈다. 레닌의 시신을 미라로 만들어 신격화하기까지 했다. 지배 분파는 이론을 자신의 야심을 위한 부속물로 전락시켰다.

내전과 반혁명, 기근으로 공산주의자들과 노동계급 사이의 연계가 가늘어지다 못해 끊어질 지경에 이르렀다. 좌익반대파는 그런 연계를 지켜내기 위해 혁명적 사회주의 전통을 고수했다.

좌익반대파는 혁명이 전진하려면 소비에트 국가가 경제에서 농촌보다 도시, 농업보다 공업의 비중을 높여야만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려면 공업 생산을 계획하고 부농에게 세금을 부과해야 했다. 이와 함께 노동자 민주주의를 확대해야 했다.

이 두 가지 정책은 러시아가 계속 혁명의 등대 역할을 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지만, 사회주의는 혁명이 다른 나라로 확산돼야만 성공할 수 있을 터였다.

우익반대파

그러나 [노동자가 아니라] 농민, 도시 프티부르주아지, 당 관료 집단은 모두 신경제정책으로 수혜를 입었다. 이로 인해 니콜라이 부하린이 이끄는 우익반대파가 생겨날 공간이 생겼다. 우익반대파는 농민의 요구와 시장에 순응했다.

결정적인 단절은 우익반대파가 국제 혁명의 연결고리가 되는 것을 포기하고 한 나라에서 사회주의가 가능하다고 주장한 것이었다.

좌익반대파는 혁명을 위협하는 가장 중요한 세력이 우익반대파라고 잘못 판단했다. 좌익반대파는 관료 집단이 독립적 세력으로서 힘을 키우고 있는 것을 과소평가했다.

이오시프 스탈린이 관료 집단에 기반을 둔 분파를 이끌었다.

이 사실은 제13차 당대회를 앞둔 1924년 5월의 한 회합에서 확인됐는데, 이 회합에서 레닌의 유언장이 중앙위원회와 고참 대의원들 앞에서 낭독됐다.

레닌은 유언장에서 스탈린을 서기장에서 해임할 것을 요구했다. 스탈린은 사의를 표했다. 그러나 지노비예프와 카메네프는 레닌의 충고를 무시하자고 회합에 참가한 사람들을 설득했다.

두 사람은 스탈린의 잘못이 무엇이었든 간에 스탈린은 이미 그것을 만회했다고 말했다. 당대회는 한목소리로 트로츠키를 비난하는 자리로 바뀌었다.

혁명의 국제적 확산이 핵심 문제였다. 미국 혁명가 제임스 캐넌은 스탈린의 부상으로 어떻게 공산당들이 “혁명 조직에서, 소련의 국경 수비대와 소련의 외교 정책에 복무하는 압력 단체”로 변질됐는지 설명했다.

예컨대, 중국에서 스탈린은 공산당이 민족주의자들과 동맹할 것을 고집해 결국 1927년 중국 혁명이 패배하고 수많은 공산당원들이 학살당했다. 스탈린의 그런 책임에도 불구하고 중국 혁명의 패배는 다른 나라에서의 혁명이 불가능하다고 입증하는 것처럼 제시돼 스탈린의 권력 장악력은 더 강화됐다.

경제 위기로 인해 초기에 좌익반대파를 제압했던 서로 다른 세력들 간에 분열이 일어났다. 지노비예프와 카메네프는 스탈린에 맞서는 트로츠키의 그룹에 1926년에 가담했다.

통합반대파

이 통합반대파는 다시금 혁명적 국제주의와 더 신속한 공업 발전, 노동자 권리 방어, 민주적 절차 복원을 위한 일련의 강령을 제시했다.

이제 스탈린주의 관료 집단은 공개 시위들을 잔혹하게 탄압하고 반대파의 비밀 인쇄소를 급습했다. 통합반대파 회원 대부분이 체포돼 국내 유배지로 쫓겨났다.

나데즈다 이오페는 21세에 반대파에 가담했다. 그녀의 아버지 [아돌프 이오페]는 트로츠키의 가까운 협력자로 스탈린주의에 맞서는 과정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의 장례식에 약 1만 명이 모여 시위를 벌였다.

나데즈다 이오페는 이렇게 썼다. “우리는 차르 체제에서 지하 활동을 벌인 혁명가들과 거의 다를 바 없이 활동했다. 우리는 공장과 학교들에서 동조자 그룹들을 조직했고 유인물을 뿌렸다.” 그런 활동은 효과가 있었다.

역사가 미할 라이만은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스탈린은 좌익반대파가 심각한 저항의 잠재적 진지로 여전히 남아있다는 사실을 무시할 수 없었다. 반대파의 리플릿이 광범위하게 유포됐고 반대파 회원들은 기층 노동자들 사이에 스며들어 그들이 사회적 투쟁을 조직하도록 도왔다.”

그러나 항복하라는 압박은 어마어마했다. 곧 지노비예프와 그 추종자 대다수가 자유와 옛 지위를 되찾기 위해 굴복했다. 물러서지 않은 이들은 살인적인 시베리아 수용소로 이송됐다.

좌익반대파를 꺾은 후인 1928년에 관료 집단은 지배계급이 됐다. 관료 집단은 악랄한 착취 체제를 구축해 자본을 축적하고 공업화를 추진했고, 이를 위해 노동자들과 농민들을 희생시켰다.

스탈린주의자들은 계급 사회의 한 종류를 재확립했고 계급 사회의 온갖 야만과 비합리성이 되살아났다.

여론조작용 [모스크바] 재판이 한창일 때 좌익반대파의 일원인 게보르키안은 보르쿠타 강제노동수용소의 한 집회에서 이렇게 말했다. “스탈린주의 협잡꾼들이 반혁명 쿠데타를 완수했습니다. 여명의 그림자가 아니라 칠흑같은 밤의 그림자가 우리의 나라를 뒤덮고 있습니다. 스탈린주의 반역자들과는 어떠한 타협도 있을 수 없습니다.”

132일간의 단식 투쟁은 그렇게 시작됐고 수용소 관리들과 그들의 상급자들은 단식 투쟁에 나선 이들의 요구 몇 가지를 수용해야 했다.

1938년에 보르쿠타 수용소의 트로츠키주의자들 중 성인이거나 13세 이상의 아이들은 행군한다는 명목으로 북극 황무지 주변으로 끌려나왔다. 그리고는 처형당했다. 수용소 안에 있었던 이오시프 베르거는 이렇게 썼다. “끝까지 투쟁하고, 구호를 외치고, 간수들과 싸운 이들도 있었다.”

또 100명 정도가 한꺼번에 끌려 나와 총살당하게 됐을 때, “그들이 ‘인터내셔널가’를 부르자 수용소에 남아있던 수백 명의 수감자들도 함께 불렀다.”

반혁명이 승리했다. 그러나 좌익반대파는 아래로부터 사회주의 사상을 지켜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