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10월 25일에 같은 제목으로 열린 노동자연대 온라인 토론회(영상 보기)의 발제문이다. 이 토론은 기획 시리즈 ‘[독일 혁명 100년 기념] 잊혀진 혁명: 독일 1918~1923년’의 두 번째 시간이었다.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인 1923년 10월, 독일은 1918년 11월에 이어 또다시 혁명적 위기를 맞이합니다. 지난 시간에 1918년 11월 혁명부터 1920년까지 일어난 격변을 살펴봤는데요. 1923년에 혁명의 두 번째 물결이 몰아친 것입니다.

지난 시간에 다룬 내용을 잠시 떠올리면서 오늘 발제를 시작하겠습니다. 제1차세계대전으로 희생과 고통을 강요받던 노동자와 병사들이 1918년 11월 정부를 무너뜨렸습니다.

그 결과 사회민주당 정부가 들어섰지만, 오히려 노동자들의 반란을 억누르고 투쟁을 탄압했습니다.

그러자 지배계급은 자신감을 회복하고 급기야 1920년 우익 정치인과 장성들이 ‘카프 쿠데타’를 일으켰습니다.

그러나 노동자들이 총파업과 봉기로 쿠데타를 물리쳤습니다.

이 내용이 담긴 영상은 노동자연대TV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영상 보기)

코민테른과 독일 공산당

오늘은 1920년 카프 쿠데타 이후 상황부터 살펴보겠습니다. 노동자들이 카프 쿠데타를 저지한 것은 매우 중요한 사건이었습니다. 이 투쟁을 경험하면서 노동자들은 급격히 좌경화했습니다. 사회민주당 정부에 기대어 구체제의 반동을 막을 수 있다는 기대가 사라졌고, 사회민주당에 대한 실망이 커졌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독일 공산주의 운동도 결정적 전환을 맞이했습니다. 극소수였던 공산당이 세력을 확대하긴 했지만 여전히 작았기 때문에, 사민당에 실망하며 좌경화한 노동자들은 대거 독립사회민주당으로 향했습니다. 사민당과 공산당 사이에서 동요하는 정당인 독립사민당은 1919년 초 30만 명에서 1920년 가을에는 80만 명으로 당원이 늘어났습니다.

당원들이 좌경화하자 독립사민당의 코민테른 가입 문제가 제기됐습니다. 코민테른은 1918년 독일혁명이 시작되자 러시아 볼셰비키가 유럽 혁명이 시작됐다고 판단해서 주도해 설립한 국제공산당입니다. ‘공산주의 인터내셔널’, 줄여서 코민테른이라고 부릅니다. 볼셰비키 지도자 레닌은 코민테른을 통해 혁명적 전략과 전술을 각국에 구현하기를 바랐습니다.

독립사민당의 좌파 지도자들은 코민테른 가입 문제를 놓고 망설였습니다. 당의 우파와 갈라서고 싶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독립사민당 우파 지도자들은 혁명적으로 말하면서 개혁주의적으로 실천하는 중간주의자들로서 독일 혁명의 결정적 국면에서 번번이 사회민주당과 손잡았습니다.

코민테른은 독립사민당의 우파 지도자들을 당에서 축출하고 공산당과 합당해 혁명적 당을 만들어야 한다고 독립사민당 좌파를 설득했습니다. 코민테른의 촉구는 독립사민당 좌파 당원들의 큰 지지를 받았습니다. 공산당과 독립사민당 당원들이 카프 쿠데타에 맞선 저항을 함께 이끌면서 가까워진 것이 특히 중요한 구실을 했습니다.

결국 독립사민당 당대회는 공산당과의 합당을 결정했습니다. 그러나 당의 우파는 불복하고 분당합니다. 하지만 당원 절반이 공산당에 합류했습니다. 당원이 5만 명도 채 안 됐던 독일공산당은 그렇게 50만 대중 정당으로 재탄생했습니다. 이때가 1920년 12월입니다.

3월 행동과 공세 이론

공산당의 당세가 커지자 당원들 사이에서는 당장 혁명적 행동에 나서고 싶은 욕구가 강해졌습니다. 기존 공산당원만 그런 것이 아니었습니다. 독립사민당에서 합류한 많은 당원들도 옛 지도자들과 결별하면서 혁명적 행동을 기대했습니다.

그렇지만 상황은 기대만큼 빨리 급진화되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1921년에는 혁명적 물결이 퇴조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공산당 지도부는 상황을 오판했고, 조급함을 드러내고고 정당화하는 이른바 공세 이론을 주창했습니다. 위기가 심각한 상황이므로 공산당이 공세를 취하면 노동자들이 자극을 받아 행동에 나설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코민테른의 지도자인 지노비예프와 부하린 등도 이런 초좌파주의를 부추겼습니다.

마침 1921년 3월 작센 주정부가 공산당의 아성인 구리 광산과 일부 공장에 경찰을 투입했습니다. 즉시 무력 충돌이 벌어졌습니다. 그러자 공산당 지도부는 이 충돌을 국가에 대항하는 무장 투쟁으로 전환하고자 했습니다.

공산당은 총파업을 선언했습니다. 하지만 큰 호응이 없었습니다. 무장 투쟁도 강력하지 않아 정부는 군대를 동원하지 않고도 진압할 수 있었습니다. 50만 당원이 노동자 150만 명을 행동으로 끌어들여 총파업과 봉기를 성사시킬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은 완전한 착각이었음이 드러났습니다.

그러나 공산당 지도부는 총파업 선언에 응하지 않은 다수 노동자들을 “어용”이라고 비난했습니다. ‘사민당 주지사의 공격에 침묵한다면 당신도 똑같은 놈이다’는 식이었습니다. 무리하게 파업을 강제하려고 실업자들을 동원해 공장 입구를 봉쇄하다 노동자들과 물리적 충돌까지 벌였습니다.

공산당 지도부가 무리하게 선언한 총파업과 무장봉기는 결국 처참한 실패로 끝났습니다. 이를 ‘3월 행동’이라고 부릅니다. 그 결과 막 대중 정당이 된 신생 공산당은 심각한 위기를 맞았습니다. 당원 절반을 잃었습니다. 그들의 상당수는 무모한 행동에 동참하지 않고 조용히 당을 떠났습니다. 공산당 입당을 저울질하던 노동자들도 등을 돌렸습니다.

‘3월 행동’의 실패는 큰 후유증을 남겼습니다. 혁명이 시작된 이래로 이미 적지 않은 실수를 저지른 바 있는 당 지도자들의 자신감은 다시 떨어졌습니다. 그런데 이는 나중에 또 다른 재앙을 낳게 됩니다.

공동전선

‘3월 행동’ 이후 레닌과 트로츠키가 부랴부랴 개입했습니다. 당시에 코민테른의 정책 집행은 지노비예프와 부하린과 라데크가 맡고 있었습니다.

레닌과 트로츠키는 3월 행동을 비판하며 1918~1919년과는 정세가 달라졌다고 설명했습니다. 자본주의가 일시적 안정을 찾았고, 자본가들의 공격에 맞서 노동자들이 제한적·방어적 투쟁을 하는 국면으로 바뀌었다는 것입니다. 이런 국면에서는 공산당이 더 광범한 지지를 얻어 노동계급 다수를 이끌 기반을 마련하는 것이 당면 과제라고 제시했습니다.

만약 개혁주의와 중간주의 지도자들에 대한 적대감이 너무 커서 그런 지도자들을 따르는 노동자들을 무시하면 공산당은 고립되고 말 것입니다. 바로 3월 행동은 그런 위험을 보여 줬습니다.

트로츠키는 바뀐 정세에 부합하는 활동 방향을 제시했습니다. 노동자들이 정파를 떠나 광범하게 지지할 만한 요구를 내놓고 사민당과 그 유관 노조 지도자들에게 공동 행동을 제안하라는 것입니다. 임금 삭감 반대, 억압 강화 반대, 파시즘 성장에 공동 대응하기 같은 방어적 요구들이 그에 해당합니다.

트로츠키의 이런 방안은 코민테른 3~4차 대회에서 지지를 받고 ‘공동전선’이라고 불리게 됩니다.

이처럼 공동전선은 혁명가와 개혁주의자들이 구체적이고 제한적인 목표를 위해 공동 행동을 건설하는 것입니다. 이를 통해 최대한 많은 노동자들이 투쟁에 참여해 계급투쟁 수준이 고양될 수 있도록 하고, 그 과정에서 공산당이 최상의 투사임을 노동자들에게 입증해 지지를 얻는 것입니다.

‘3월 행동’ 이후 건설 노동자 출신의 조직가 하인리히 브란들러가 독일공산당을 이끌었습니다. 그는 ‘3월 행동’을 감행한 지도부의 일원이었지만, 실수를 인정하고 그 뒤 2년 동안 공동전선 전술을 능동적으로 추진했습니다. 공산당은 사용자와 파시스트에 대항하는 공동행동을 사민당과 그 유관 노조 지도자들에게 빈번히 촉구했습니다.

그 덕분에 공산당은 노동계급 투사들 사이에서 잃었던 신망을 상당 부분 회복했습니다. 1922년 6월 사민당 유관 노총 대의원대회에서는 각급 대표 8명당 1명 꼴로 공산당원이었습니다.

중첩된 위기의 해, 1923년

1923년이 되면 독일 정세가 다시 한 번 급변하면서 공산당은 새로운 시험대에 오릅니다.

당시 독일에서는 극단적 위기들이 중첩돼 나타났습니다. 1923년 1월 프랑스 군대가 전쟁 배상금 지급을 요구하며 독일의 핵심 산업 지역인 루르를 점령했습니다. 이 일을 계기로 우익 민족주의가 강화됐습니다.

1923년 상반기에는 하이퍼인플레이션이 벌어졌습니다. 물가가 천정부지로 치솟아 돈으로 벽지를 사지 않고 차라리 돈을 벽지로 쓰거나, 감자를 사려고 수레에 돈을 싣고 가야 하는 등 경제가 그야말로 붕괴했습니다.

노동자와 중간계급 사람들은 절박한 처지로 몰렸습니다. 광원 노동자가 1시간 일해 겨우 달걀 1개를 살 수 있는 지경이었습니다. 그러나 사용자 등 자본가들은 인플레이션 억제책을 반대했습니다. 당시에 물가 인상이 그들에게 득이 됐기 때문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노동조합 투쟁만으로는 턱없이 부족했습니다. 임금을 110퍼센트, 245퍼센트 올려도 물가가 그보다 더 빨리 올랐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노동자들은 전국 곳곳에서 물가통제위원회를 세워 가게나 장터를 물리적으로 장악해 물가를 통제하려 했습니다.

그렇게 하려면 당연히 무장력이 필요했습니다. 노동자 약 100명이 한 조를 이루는 시민군이 물가통제위원회를 보필했습니다. 이 ‘프롤레타리아 백인대’는 원래 극우 테러에 맞서려고 공산당이 주도해 만든 조직입니다. 당시 극우는 거리 폭력 조직을 꾸려 노동자들을 위협하고 있었습니다.

이렇듯 1923년 독일에서는 일시 안정됐던 기성 질서가 크게 흔들리고 있었습니다. 그때까지도 사민당을 지지하던 노동자들도 눈에 띄게 좌경화했고, 통찰력 있는 지배자들은 이러다가 공산당이 권력을 잡겠다고 걱정했습니다.

그러나 한동안 공산당은 이런 변화를 감지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다 마침내 공산당 지도자 브란들러는 공세로 전환를 시도했습니다. 7월 말 ‘파시즘 반대의 날’ 집회를 열겠다고 선언한 것입니다. 프롤레타리아 백인대가 거리에서 위용을 과시하며, 파시즘에 맞서 내전까지 감수할 준비를 해야 한다고 선언했습니다.

사민당 지도부는 당원들에게 집회 참가 금지령을 내렸습니다. 그러자 블란들러에 맞서 공산당 지도부 다수가 거리 시위를 반대하고 나섰습니다. ‘3월 행동’의 실수를 반복해서는 안 된다면서 말입니다. 결국 브란들러는 집회를 취소했습니다.

그러나 2년 전 ‘3월 행동’ 때와는 상황이 달랐습니다. 사민당 기층 활동가들과 무소속 노동조합 활동가들이 브란들러의 외침에 호응했습니다. 당시에 노동자들은 국지적·산발적 투쟁만으로는 한계를 느껴 돌파구를 찾는 중이었습니다.

실제로, 집회 취소 불과 몇 주 후인 8월에 노동자들의 산발적 파업이 총파업으로 발전해 쿠노 정부를 퇴진시켰습니다.

‘독일의 10월’

새 정부가 출범하면서 총파업 물결은 일단 수그러들었습니다. 하지만 노동자들의 불만은 여전했습니다. 대량 실업이 만연하면서 노동자들의 처지는 더욱 절박해졌습니다. 정치적 자신감도 있어서, 기회만 있다면 노동자들의 분노는 다시 행동으로 타오를 만한 상황이었습니다.

코민테른 집행위원회는 8월 총파업으로 쿠노 정부가 무너지자 독일의 사태 변화에 초미의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습니다. 트로츠키는 러시아의 ‘1917년 10월’ 상황이 독일에 오고 있다고 판단했습니다. 코민테른은 독일 공산당에 봉기를 준비하라고 촉구했습니다.

독일 공산당은 권력 장악을 위한 준비에 착수했습니다. 봉기 신호가 떨어지면 타격할 주요 거점을 선정하고, 획득할 수 있는 무기의 양을 가늠했습니다. 당 전체가 한 달 이상을 봉기 준비에 몰두했습니다.

한편, 독일의 지배자들도 더는 미루지 않고 공산당 거점을 정조준하기로 했습니다. 독일 정부와 군부는 10월, 중부 독일 작센의 주정부를 향해 프롤레타리아 백인대를 무장 해제시키라고 최후통첩을 날렸습니다.

작센은 독일에서 공산당과 프롤레타리아 백인대가 가장 강력한 지역이었습니다. 또한 공산당이 사민당 좌파와 함께 주정부를 구성한 곳이기도 했습니다.

공산당은 군대 진격 시 작센 방어를 위한 전국 총파업을 호소하기로 하고 이를 무장 봉기의 신호로 삼기로 했습니다.

문제는 사민당 좌파였습니다. 처음에 사민당 좌파는 중앙 정부의 최후통첩을 호기롭게 물리쳤습니다. 그러나 군대가 진짜로 작센 주로 진격하자 뒷걸음질을 쳤습니다. 그들은 전국 총파업을 반대하면서 작센을 방어할 임무는 정부와 주의회에 있다고 했습니다.

공산당은 선택을 해야 했습니다. 사민당 좌파를 제치고 단독으로 총파업을 호소하고 봉기에 나설 것인가? 그랬다가 혹시 사민당 기층 활동가들의 지지를 받지 못하고 ‘3월 행동’처럼 고립되지는 않을까?

사민당 좌파가 총파업을 반대하자 브란들러와 공산당 지도부는 봉기 계획 전체가 틀어졌다고 판단하고 총파업과 봉기 둘 다 취소하기로 했습니다. 독일의 10월은 기대 속에 시작됐지만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은 채 끝나고 말았습니다.

전국에서 100만 명에 달하는 혁명가들이 대기 중이었고 노동자 수백만 명이 주린 배를 움켜쥔 채 근본적 변화를 원하고 있었는데, 공산당은 총 한 방 안 쏘고 정부군에 기회를­­ 내준 것입니다.

이제 독일의 지배자들은 두려울 것이 없었습니다. 중앙 정부에서 사민당을 쫓아내고, 무지막지한 긴축 정책으로 노동자들을 더욱 빈궁에 빠뜨렸습니다. 그제서야 비로소 사민당 좌파는 총파업에 동의했습니다. 그러나 때를 놓쳤습니다. 1923년 10월보다 더 좋은 봉기 타이밍은 찾아오지 않았습니다.

패배의 대가와 교훈

독일 혁명이 패배하자 러시아에서는 사기 저하가 크게 일어났습니다. 1924년 1월 레닌이 사망하고 이제 신흥 관료들은 국제주의를 포기하고 스탈린 주도로 일국사회주의론을 내세웠습니다. 한편, 러시아 혁명은 국제적으로 고립된 채 변질이 가속됐습니다.

러시아 혁명의 퇴보는 코민테른도 변질시키고 다시금 독일에 영향을 미쳤습니다. 6년 후 독일에 다시 크나큰 위기가 찾아왔지만, 독일공산당은 스탈린주의 코민테른의 초좌파적 종파주의 노선에 충성하며 나치에 맞서지 않았습니다. 그 덕에 히틀러가 순조롭게 집권했습니다.

그러나 만일 1923년에 독일 혁명이 성공했다면 스탈린도, 히틀러도 부상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독일 혁명은 1917년 러시아 혁명 이후 선진국으로 사회주의 혁명이 확산될 절호의 기회였습니다. 이는 결코 몽상이 아니었습니다. 독일 혁명이 패배한 것은 객관적 조건 때문이 아니라 혁명적 정당이 결정적 순간에 행동에 나서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천재일우의 기회를 놓친 것입니다.

만약 혁명적 당을 건설할 핵심 인자들이 1918년 이전에 경험을 쌓고 당을 건설하고 있었다면 독일 공산당은 1921년의 무모함이나 1923년의 망설임을 피하고 혁명적 상황의 우여곡절과 각종 어려움을 잘 헤쳐 나아갈 수 있었을 것입니다. 잠재력을 실제 현실로 바꾸려면 미숙하지 않은 혁명적 조직이 필요하다는 것이 바로 독일의 교훈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