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미들섹스대학교에서 프랑스학을 가르친 노(老) 혁명가 이언 버철이 프랑스의 1968년 반란이 무엇을 고무했는지 살펴본다.
이언 버철은 영국 사회주의노동자당(SWP)의 당원이고 《삐딱이들을 위한 레닌 가이드》의 저자이다.

프랑스의 학생들이 거리를 장악하고 학교를 점거하고 있다. 경찰은 곤봉과 최루탄으로 학생들을 공격하고 있다. 그러니 사람들이 이렇게 묻는 것도 놀랄 일이 아니다. ‘1968년이 재연되는 걸까?’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1968년에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분명히 아는 게 중요하다. 심지어 제법 박식하다는 저널리스트들조차 프랑스의 1968년은 “학생 소요”의 해였다고 말한다. 이것은 터무니없는 왜곡이다.

물론 당시 프랑스에서 대규모 학생 시위와 점거가 벌어진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런 일들은 다른 수십 개 나라에서도 벌어졌다. 영국도 마찬가지였다. 프랑스가 달랐던 점은 총파업이 벌어졌다는 것이다.

그 파업은 3주 동안 지속됐고 거의 1천만 명의 노동자들이 참가했다. 그 때까지 사상 최대 규모의 총파업이었다.

모든 곳에서 노동자들은 마르크스주의의 기본 사상, 즉 노동자들의 노동이 사회의 존속에 필요한 재화와 서비스를 생산하며, 그들의 노동이 없다면 사회는 굴러갈 수 없다는 것을 입증했다.

생산은 완전히 마비됐다. 전기가 들어오긴 했지만, 이것은 순전히 전력 노동자들 덕분이었다. 전력 노동자들은 그들의 힘을 상기시키기 위한 방편으로 이따금 전력 공급을 중단했다.

공장은 노조 위원회들이 점거했다. 몇몇 곳에서는 공장장이 사무실에 감금됐고 파업 노동자들의 허락 없이는 화장실에 갈 수도 없었다. 노동자들은 녹음기를 갖다놓고 사용자들에게 인터내셔널가를 가르쳤다.

프랑스 서부의 낭트는 도시 전체가 노조 위원회에 의해 운영됐다. 노조 위원회는 상인들이 폭리를 취하지 못하도록 가격을 통제했고, 지역 농민들과 식료품 가격을 협의했다. 노조는 석유 공급을 통제했고, 도시 주변 도로에 바리케이드를 설치했다.

이런 일들은 노동계급의 힘을 멋지게 보여 주었고, 1945년 이후 성장한 세대에게는 놀라운 경험이었다.

무기력한 지식인들은 자본주의가 자체의 문제를 모두 해결했고 계급투쟁은 완전히 과거지사가 됐다고 앵무새처럼 떠들어댔었다. 심지어 많은 좌파도 이러한 주장을 받아들였었다.

그러나 몇 주 동안 계속된 노동계급의 행동은 이것이 거짓말임을 밝히 보여 주었다. 1968년을 폄하하려는 온갖 시도에도 불구하고 1968년의 기억은 여전히 지배자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곤 한다.

1968년에 벌어진 일이 놀라운 이유 가운데 하나는 그것이 전혀 뜻밖의 사건이었다는 점이다. 그 전까지는 노동자들이 완전고용과 소비주의에 매수돼 혁명적 잠재력을 상실했다는 생각이 널리 퍼져 있었다. 무관심 때문에 어떠한 대중 투쟁도 일어나지 않을 거라는 얘기도 많았다.

대체로 지배계급의 이익을 민감하게 반영하는 〈이코노미스트〉는 1968년 5월에 프랑스 사회에 대한 조사 결과를 발표하면서, 프랑스가 영국의 생활수준을 따라잡았고 프랑스 노조가 “애처로울 만큼 허약하다”고 했다.

1968년 4월에 파리를 방문한 영국의 한 사회주의자는 프랑스 학생 활동가들한테서 영국의 대규모 베트남전 반대 시위가 부럽다는 얘기를 들었다. 그 해 3월 런던의 미국 대사관 앞에서 벌어진 반전 시위에는 겨우 3만 명이 참가했다. 그러나 몇 주 뒤 파리의 거리 시위에는 1백만 명이 참가했다.

학생 운동이 사태의 도화선이었다. 몇 달 동안 프랑스의 대학가에서는 불만이 자라나고 있었다. 미국의 베트남 전쟁에 대한 반감이 커지고 있었다.

학생들은 자신의 불만사항을 국내 문제와 긴밀히 연관시켰다. 프랑스 대통령 샤를 드골 장군이 이끄는 정부는 고등 교육의 급속한 확대를 통해 프랑스를 현대화하려 하면서도 그 비용은 최소화하기를 원했다.

대학, 도서관, 강의실은 엄청나게 과밀해졌다. 학생들은 낡은 규제들을 따라야만 했다. 예컨대, 남녀 학생들은 서로 상대방 기숙사를 방문할 수 없었다. “자유로운 소통”이 시위 구호 중 하나가 됐다. 

정부는 파리 소르본 대학을 폐쇄하는 것으로 대응했다. 그러나 경찰이 곤봉과 최루탄으로 학생들을 거리에서 몰아내려 했을 때, 학생들은 전혀 물러서지 않았다.

한 건설 노동자는 학생들에게 유압 드릴을 이용해 도로 포장에 쓰인 자갈을 캐내는 방법과 바리케이드를 쌓는 방법을 알려줬다. 학생들은 밤새도록 저항했다.

결정적 변화를 가져온 것은 바로 이러한 저항이었다. 학생들의 요구 사항은 그다지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학생들에게 더 많은 섹스를” 같은 요구가 사회 정의의 주요 쟁점이라고 느낀 노동자는 아마 거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노동자들은 정부가 학생들의 용기와 단호함에 밀려 양보하는 것 ― 대학 휴교령 해제 ― 을 똑똑히 지켜봤다. ‘저항하면 승리할 수 있다.’ 학생들이 프랑스 노동자들에게 전한 메시지는 바로 이것이었다.

노동조합 관료들 ― 프랑스에는 세 개의 노조 연맹이 있었다 ― 은 하루 파업을 호소해 상황을 진정시키고 통제력을 회복하려 했다.

그러나 그 다음 주 월요일 파리에서 벌어진 대규모 시위는 노조 관료들의 의도와 정반대의 효과를 낳았다. 수많은 노동자들의 자신감을 고양시킨 것이다.

그 다음 날 낭트의 한 항공기 공장에서 노조 집회가 열렸다.

그 지부에는 세 명의 혁명가들이 있었는데, 이들은 그 전 몇 년 동안 전투적 행동을 촉구해 왔지만 번번이 무시당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노동자들이 그들의 주장에 귀를 기울였다. 무기한 공장 점거가 시작됐다.

비록 언론에는 거의 보도되지 않았지만, 이것은 운동을 고무했다. 

그 뒤 일주일 사이에 프랑스 전역의 공장과 작업장들이 점거됐다.

오늘날 이러한 일들이 다시 일어날 수 있을까? 정치에서 단기적 예측은 어리석은 일이다. 그러나 보편화된 사회적 투쟁이 벌어질 가능성은 여러 모로 오늘날이 1968년 당시보다 훨씬 더 크다.

1968년에 결국 수면 위로 떠오른 심각한 불만들은 대체로 파편화되거나 무마됐다.

그러나 지난해에는 먼저 유럽연합 헌법 부결이 있었고, 가을에 광범한 소요가 일어났고, 지금은 새 고용법 도입에 반대하는 운동이 벌어지고 있다.

1968년에는 사실상 완전고용이 존재했다. 지금은 실업률이 몇 년째 10퍼센트에 이르고 있다.

노동자와 학생들은 사르코지나 빌팽 같은 우파 정치인들의 주된 관심사가 프랑스 사회의 진정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대선 후보가 되는 데 있다는 걸 잘 알고 있다.

이주노동자들은 1968년 반란에서 중요한 구실을 했지만 가혹한 탄압과 강제추방의 위험에 시달려야 했다.

지금은 실업과 경찰 폭력에 직면한 북아프리카계 청년들 사이에 광범한 분노가 존재한다. 또, 그들은 이른바 대다수 좌파가 자신들을 경멸하는 것을 알고 있다. 이런 좌파들은 이주민 지역사회의 종교 관행, 특히 학생들의 히잡 착용 권리를 인정하지 않는다.
1968년에 대다수 프랑스 좌파는 여전히 소련을 사회주의 사회의 모델이라고 봤다. 그나마 이런 생각을 거부한 소수파 가운데 다수는 소련이 아니라 마오쩌둥의 중국이 그런 사회라고 생각했다. 지금은 대다수 청년들이 반자본주의 운동의 이상에 의해 고무돼 있다.

앞으로 몇 주 동안 무슨 일이 일어나건, 분노는 사그라지지 않을 것이다. 저항은 계속될 것이고 새로운 형태로 표출될 것이다.

1968년 운동은 결국 패배했다. 그러나 그것은 지배계급이 너무 강력해서가 아니었다. 5월 말에 드골은 파리에서 도망쳐 독일에 있는 프랑스군 수뇌부와 상의해야 했다. 드골이 국민투표를 실시하려 했을 때 그는 계급 권력의 쓰라린 현실에 직면했다. 프랑스의 어떤 인쇄소도 투표 용지를 인쇄하려 하지 않았다.

낡은 질서를 구출한 것은 말로만 자본주의의 혁명적 타도를 주장한 프랑스 공산당(PCF)이었다. PCF는 선거에서 5백만 표를 얻었고, 가장 큰 노조연맹인 CGT(노동조합총연맹)를 통제하고 있었다. [그리고] 수천 명의 헌신적인 노동계급 활동가들을 거느리고 있었다.

PCF는 소련에 열렬히 충성하기도 했지만, 자신의 의회적 성공 가능성에 몰두하기도 했다.

PCF는 학생 혁명가들이 PCF 지지 노동자들에게 어떤 영향도 끼치지 못하도록 차단하기로 결심했다. 공장 주위에서 비(非)공산당 성향의 좌파 신문을 판매하는 활동가들은 여러 해 동안 PCF의 폭력에 시달려 왔다.

학생 운동이 분출했을 때 PCF는 기관지를 통해 이를 격렬히 반대했다. 그들은 학생 혁명가들을 노동계급 출신 학생들이 시험을 치르지 못하게 방해하는 부자집 자녀들이라고 비난했다. 종종 그들에게 우파의 끄나불이라는 중상모략까지 했다.

공장 점거 물결이 확대되자 CGT는 이를 저지할 수 없었다. 그래서 CGT는 운동의 통제력을 장악하고 운동을 내부로부터 약화시키려 온갖 노력을 다했다.

공장 점거자들은 대부분 노조 활동가들이었다. 다른 노동자들 ― 이들이 투쟁에 동원됐어야 했는데, 왜냐하면 천만 명의 파업 노동자 가운데 7백만 명이 노조에 가입돼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 은 집에 가서 친정부 방송이나 봐야 했다.

드골이 총선을 선언하자 PCF는 그를 지지하며 노동자들에게 작업 복귀를 촉구했다. 총선에서 우파가 승리했다.

의회 정치의 규칙을 지키려는 의지를 보여 줌으로써 PCF는 자신이 사회당의 신뢰할 만한 선거 동맹이라는 것을 분명히 했다.
오늘날 공산당은 학생과 노동자, 교외의 청년들을 분리시킬 의지도 없고 그렇게 할 활동가들도 거느리고 있지 않다.

개량주의는 여전히 살아있고 강력하다. 분명 사회당과 노조의 지도자들은 노동자와 피억압자들의 행동에 기반한 대중 운동이 등장하는 것을 막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할 것이다.

단기적으로는 그들이 성공할 수 있다. [그러나] 장기적으로는 우리가 승리할 수 있다. 역사는 되풀이되지 않지만, 역사에서 얻은 영감은 미래의 승리를 준비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

지금 판돈은 단지 프랑스의 미래만이 아니다. 언론이 가장 끈질기게 되풀이하는 거짓말 중 하나는 1968년 사태가 프랑스만의 독특한 현상이었다는 것이다.

우리는 총파업이 끝난 직후 로베르 에스카르피가 〈르몽드〉에서 한 말을 기억해야 한다.

“해외를 여행하는 프랑스인들은 지독한 열병을 앓은 환자 취급당한다는 느낌을 받곤 한다. 어찌 그렇게 자주 바리케이드 싸움이 벌어진단 말인가? 5월 29일 저녁 5시에는 체온이 얼마나 됐던가?

“그러나 거의 제기되지 않는 질문이 하나 있다 ― 아마도 대답을 듣기가 두렵기 때문일 것이다. 희망을 품고서든 두려움을 품고서든, 누구나 그 열병에 전염성이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질문을 마음 속으로 하고 있을 것이다.”

번역 김용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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