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차세계대전이 끝나고 시온주의자들은 홀로코스트를 겪은 유대인을 위해 이스라엘 국가를 건설해야 한다며 시온주의 국가 건국에 박차를 가했다.

1948년 ‘나크바’ 직전에 발표된 이스라엘 ‘독립 선언문’도 홀로코스트를 이스라엘 건국의 근거로 제시한다.

이번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전쟁에서도 이스라엘 정치인들은 홀로코스트의 기억과 이미지를 이용한다.

지난 10월 24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는 하마스의 10월 7일 공격을 두고 “우리 아이들은 안네 프랑크처럼 숨었다”고 말했다.

10월 30일 길라드 에르단 유엔 주재 이스라엘 대사는 나치가 유대인 식별 표시로 사용한 노란색 ‘다윗의 별’을 왼쪽 가슴에 붙이고 유엔 안보리 회의에 참석했다.

예나 지금이나 이스라엘은 마치 자신들이 홀로코스트 피해자를 대표하는 것처럼 행세한다. 이스라엘 규탄을 유대인 혐오라고 매도하면서 말이다.

그러나 역사는 이스라엘이 홀로코스트 희생자들을 대표할 자격이 없다는 것을 보여 준다.

유대인 600만 명의 목숨을 앗아간 홀로코스트는 실로 인류 역사의 특별한 비극이다. 그것은 자본주의의 위기와 제국주의 전쟁, 파시즘에 맞선 투쟁의 패배, 그리고 무엇보다도 유대인 혐오의 귀결이었다.

유대인 혐오는 자본주의 이전부터 존재했지만, 자본주의하에서 유대인 혐오는 특별한 구실을 했다. 유대인들이 배후에서 세계를 조종하는 막강한 집단이라는 편견은 자본주의가 거대한 위기에 빠졌을 때 대중의 분노를 체제가 아닌 다른 곳으로 돌리는 구실을 했다.

시온주의는 19세기 유럽 자본주의 지배자들이 조장한 유대인 혐오에 대한 대응으로서 출현한 운동이다.

그러나 그것은 극소수의 대응이었다. 당시 많은 유대인들은 더 광범한 사회 변화에 투신해서 유대인의 해방을 쟁취하려 했다.

로자 룩셈부르크, 레온 트로츠키 등 여러 유대인들이 마르크스주의 전통에 핵심적 기여를 했다.(마르크스 자신도 유대인이었다.) 1917년 러시아 혁명에도 많은 유대인이 참가했다. 그들은 유대인 혐오를 낳는 사회 자체를 변화시켜 유대인 혐오를 없애려 했다.

반면 시온주의자들은 유대인 혐오자들과 근본 가정을 공유했다. 바로 유대인이 다른 사람들과 어울려 살 수 없다는 것이다.

1912년 베를린에서 세계시온주의기구 의장 바이츠만은 독일 내 반유대주의에 대해 이렇게 연설했다.

“일정 규모 이상으로 유대인을 받아들이는 나라는 혼란에 빠질 것이다. 이미 독일에는 유대인이 너무 많다.”

이런 비관에 기초한 시온주의 운동이 부상할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다른 대안이 패배했기 때문이다. 특히, 러시아 혁명이 고립돼 패배했고 그 자리를 차지한 스탈린주의는 파시즘에 맞선 투쟁을 패배로 이끌었다.

나치는 마르크스주의자들이 “프티부르주아지”라고 부른 영세상인, 자영업자, 농민 등 중간계급 층에 핵심 기반을 두고 있었다. “프티부르주아지”는 자본가 계급처럼 부와 권력이 강하지 않았고, 노동계급처럼 투쟁으로 집단적 이익을 지킬 힘도 없었다.

나치는 불만에 찬 중간계급 대중을 결집하기 위해 유대인 혐오를 이용했다. 경제가 어려워지고 삶이 팍팍해지는 게 유대인 때문이라고 선동했다. 급기야 제2차세계대전이 격화되는 상황에서 홀로코스트로 유대인을 인종 학살하는 것으로 나아갔다.

배신

그래서 나치 집권기에 유럽의 유대인들은 공포를 느꼈다. 하지만 시온주의자들의 태도는 배신적이었다. 시온주의자들은 이스라엘 건국을 위해서라면 나치와도 협력할 태세가 돼 있었다.

독일시온주의연맹은 집권한 히틀러에게 이런 내용이 담긴 문서를 보냈다.

“유대인의 어려운 처지는 무엇보다도 그들의 비정상적인 직업 분포와 고유한 전통에 뿌리를 내리지 못한 정신적·도덕적 결함 때문입니다.

“시온주의의 실천적 목표를 위해서라면 심지어 유대인에 적대적인 정부조차도 우리와 협력해 주길 바랍니다.

“외국의 분노한 유대인들이 [나치] 독일 발전에 반대하는 것은 시온주의가 실현되는 것을 방해할 뿐입니다.”

나치가 유대인을 공격하는 상황에서 시온주의 지도자들은 팔레스타인 내 시온주의 무장 조직들을 유럽으로 보낼 수도 있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팔레스타인 내 시온주의 무장 조직 ‘스테른 갱’ 소속이었던 아비네리는 이렇게 증언했다. “전쟁[제2차세계대전] 기간 동안 시온주의 지도자들이 유대인들을 돕기 위해 한 일은 거의 없다.”

반면, 유럽의 많은 유대인들은 홀로코스트 와중에도 나치에 맞서 싸웠다. 예컨대 1943년 폴란드 바르샤바 게토에서는 유대인들이 봉기를 일으켜 6개월 동안 나치에 맞서 처절하게 저항했다.

시온주의자들은 연합국 정부들에 유대인 난민을 받지 않도록 압력을 넣기도 했다. 당시 많은 유대인이 홀로코스트를 피해 팔레스타인이 아니라 미국 등지로 가기를 원했다.

1939년 영국 정부가 독일 유대인 아이들 일부를 받아들이려는 계획을 제출했을 때, 시온주의 지도자 벤 구리온(이스라엘 초대 총리)은 이를 단호히 거부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독일에 있는 유대인 아이들을 영국으로 보내면 모두 살릴 수 있고 이스라엘로 보내면 절반만 살릴 수 있다면, 나는 후자를 선택할 것이다. 우리는 이 아이들의 생명뿐 아니라 이스라엘인들의 역사도 중시하기 때문이다.”

나치의 마수가 유대인 전체를 위협하는 상황에서도 시온주의자들은 자신들의 특수한 목표, 즉 팔레스타인을 강탈해 이스라엘 국가를 건설한다는 자신들의 프로젝트를 우선시한 것이다.

적잖은 유대인들이 팔레스타인 이주를 택하게 된 데에는 당시 연합국 정부들의 태도도 중요한 구실을 했다.

미국 등 연합국 정부들은 제2차세계대전에서 파시즘에 맞서 세계를 지키겠다고 떠들었다. 그러나 연합국은 나치의 유대인 학살을 제대로 막지 않았다.

홀로코스트 학살이 시작되던 때 미국 정부는 아우슈비츠로 향하는 철로를 폭격해 달라는 유대인 지도자들의 간곡한 호소를 거부했다. 영국 정부도 마찬가지였다.

연합국 정부들은 유대인 난민을 받아들이고 싶어 하지 않았다. 나치의 유대인 말살 정책이 절정에 달한 1943년 미국 정부가 받아들인 유대인은 4705명에 불과했다.

위선

미국과 영국은 유대인 난민을 받지 말라는 시온주의자들의 촉구에 대체로 응했다. 중동을 지배하는 데서 시온주의 운동이 할 유용한 구실을 봤기 때문이다.

제국주의자들의 이해관계를 잘 파악하는 시온주의자들은 유대인의 팔레스타인 이주를 도와 달라고 미국과 영국에 요청하는 한편, 난민 수용소의 유대인들을 대상으로 팔레스타인 이주 캠페인을 벌였다.

이런 상황에서 적잖은 유대인들이 팔레스타인으로 이주하게 된 것이다. 이스라엘이 홀로코스트 희생자와 유대인 전체의 이익을 대표한 결과가 아니었던 것이다.

팔레스타인으로 이주하는 유대인들 앞에는 팔레스타인인들을 상대로 한 끝없는 전쟁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 결과 오늘날 이스라엘은 유대인이 살기에 가장 위험한 곳이 됐다.

끝없는 전쟁 때문에 오늘날 이스라엘은 유대인이 살기에 가장 위험한 곳이 됐다 ⓒ출처 이스라엘 총리실

1월 27일은 국제 홀로코스트 희생자 추모의 날이다. 홀로코스트를 기억하는 것이 중요한 이유는 유대인 혐오가 단지 과거의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유대인 혐오를 때로는 은밀히 때로는 공공연히 드러내는 극우가 세계 도처에서 성장하고 있다.

그런데 미국의 트럼프 등 많은 극우들은 현재 이스라엘 국가를 지지하고 있다. 이는 이스라엘 국가가 중동에서 서방 제국주의의 이익을 지키는 구실을 하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은 홀로코스트 피해자들의 대표자를 자임할 자격이 없을뿐더러, 오늘날 다시 고개를 들고 있는 유대인 혐오로부터의 안전한 피난처도 못 된다.

게다가 많은 유대인들이 이스라엘과 시온주의에 반대하고 있다. 현재 국제 팔레스타인 연대 운동에도 많은 유대인이 동참하고 있다. 그들 중에는 홀로코스트 생존자도 있고, 홀로코스트 희생자의 후손도 있다.

팔레스타인인들과 연대하는 사람들은 이스라엘이 홀로코스트 희생자들을 대표할 수 없다는 것을 폭로하고, 이스라엘 비판이 유대인 혐오라는 시온주의자들의 비방을 단호히 반박해야 한다. 그리고 유대인 혐오적 주장에 한 치도 타협해서는 안 된다.

시온주의와 이스라엘 국가에 반대하며 팔레스타인 연대 시위에 참가한 유대인 단체 ⓒ출처 Neturei Kart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