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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더기가 된 국가인권위원회

누더기가 된 국가인권위원회

이원재

지난 11월 26일 국가인권위원회가 출범했다. 국가인권위원회에는 구조적인 인권 침해가 만연해 있는 한국 사회가 바뀌기를 바라는 사람들의 기대가 담겨 있다. 그런 기대를 반영하듯 국가인권위원회가 문을 연 11월 26일부터 12월 8일까지 열흘 남짓한 기간 동안 무려 1603건의 진정 접수 및 상담이 이어졌다. 단병호 위원장과 구속 노동자의 석방을 요구하는 민주노총을 비롯해, “제발 때리지 마세요”라고 적힌 피켓을 들고 찾아온 이주 노동자들, 동성애자 차별을 고발한 동성애자인권연대 등 그 동안 국가의 인권 침해와 차별 속에서 투쟁을 해온 이들이 국가인권위원회로 찾아갔다. 하지만 국가인권위는 출범 초기부터 이런 기대에 못 미치고 있다. 국가인권위원회가 정식으로 출범했음에도 인권위원회의 규모와 권한을 어떻게든 축소시키려고 하는 정부 관료들의 반발 때문에 사무국조차 꾸리지 못하고 몇몇 자원봉사자와 기획단 인원들만이 업무를 보고 있다. 행자부는 애초에 인권위원회가 요구한 321명의 직원 수를 ‘작은 정부에 맞지 않다’며 1백20명으로 축소하라고 버티고 있다. 법무부는 구금·보호 시설에 대한 인권위원회의 방문 조사 권한을 대폭 축소하라고 요구한다. 김대중 정부는 인권위원회가 대단한 권한이라도 있는 양 말하지만 현재의 인권위원회 법은 인권단체들로부터 누더기라고 평가받고 있다. 실제로 인권위원회가 조사에 착수한다 해도 법적 강제성이 없어 권고 또는 중재하는 정도에 그칠 뿐이며 수사기관이 수사중인 사건이나 재판이 끝난 사건은 조사조차 할 수 없게 돼 있다. 또한 국가 업무 수행에 지장을 줄 경우 조사를 거부할 수 있다고 규정해 인권위원회의 조사권의 실효성조차 의심스러운 지경이다. 그럼에도 정부 관료들은 인권위원회가 자신들의 권한을 엄청나게 침해할 것처럼 엄살을 떨며 국가인권위를 압박하고 있다.

제도적 폭력

상황이 이런지라 인권단체들 내에는 인권위 그 자체에 대한 회의적인 시각이 만만치 않다. 인권단체 연대회의 이창수 정책위원은 “인권위의 출범은 인권운동이라는 민간 부문을 국가 제도로 편입시킨다는 측면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결국 국가의 본질이 폭력성에 있다는 극명한 진리에 눈감을 수밖에 없게 하거나 아니면 적어도 방조하는 사태를 만들 수 있는 위험성이 존재한다”며 “인권위원회는 국가의 제도적 폭력에 대한 면죄부를 줄 수 있는 위험성을 가지고 있다”고 경고했다. “국가인권위원회는 제한된 인권 침해 조사나 차별 행위에 대해 구제 정도는 할 수 있겠지만 경찰, 검찰과 같이 합법적인 권위를 부여받은 국가 폭력성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결국 국가인권위원회는 또 하나의 국가 기관이라는 한계를 가지고 있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러나 보수 언론은 인권위의 위상을 둘러싼 인권단체들간의 논쟁을 마치 인권위에 들어가기 위한 자리싸움인양 호도하고 있다. 〈조선일보〉는 뻔뻔스럽게도 이렇게 말했다. “그들(인권운동가들)에게 가장 절실한 것은 진실의 발견과 권리의 회복이다. 교통비만 있으면 인권 문제가 발생한 곳에는 어디든지 찾아갔고, 적은 생활비로 견디면서 소외된 사람들을 위하여 밤을 새워 일하던 활동가들에게, 국가인권위원회의 직원으로 임용되는 것은 활동가의 진실한 정체성을 잃어버리게 할 위험성도 있다.” 〈조선일보〉가 인권운동가들의 ‘타락’을 걱정하는 양 말하는 것은 정말이지 메스껍기 짝이 없다. 인권위원회가 인권운동가들은 배제한 채 정부 관료들의 주도로 꾸려지고 있는 현실을 보면 인권단체들의 우려가 괜한 것만은 아니다. 이번에 선정된 국가 인권위원은 인권단체들이 아니라 대통령이 4인, 민주당이 2인, 한나라당이 2인, 대법원이 각각 3인씩 추천한 인사들로 구성됐다. 김대중 정부가 만든 다른 개혁 기구들이 생색내기에 그쳤던 것처럼 국가인권위도 장식품으로 전락할 가능성이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