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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하나의 신화를 만들어 낸 <다빈치 코드>

영화 〈다빈치 코드〉 개봉을 앞두고 가톨릭 교황청과 한국의 한기총 같은 개신교 우익 세력은 “신성모독”이라며 영화 개봉을 막기 위해 노력하고 만약 막지 못하면 영화를 보이코트하겠다고 했다.

민주주의를 염원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이런 비민주적 행태에 눈살을 찌푸렸을 것이다. 어떤 표현물이 민주주의의 파괴를 공공연히 고무하지 않는 한은 그것을 실력으로 저지하려 하기보다는 그것과 논쟁하려 하는 것이 민주적인 방식이다.

우익 그리스도교 세력 때문에 레바논에서는 영화 상영이 금지됐다. 불교 국가인 타이에서도 검열 당국은 영화 시작과 끝 부분에 영화가 “픽션일 뿐”이라는 멘트를 삽입하도록 강제했다. 싱가포르 교회협의회는 상영 금지 소송을 내어 “16살 이하 관람 금지” 등급이라는 제한을 얻어 냈다.

그러나 막상 영화가 개봉되자 그리스도교 우익의 반발은 그다지 격심하지 않은 듯하다. 영화가 몇 가지 자질구레한 점을 제외하면 대체로 소설에 충실하면서도 결정적인 점에서는 가톨릭 교회에 타협하는 변화를 가미했기 때문인 듯하다.

소설에서는 그리스도 신자가 아닌 걸로 나오는 주인공 로버트 랭던(톰 행크스 분)이 영화에서는 그리스도 신자(가톨릭)로 바뀌어 나온다. 게다가 가톨릭 신자 랭던은 주요 장면에서 작품의 핵심 주제 ― 예수가 막달라 출신 마리아와 성관계를 가져 후손까지 두었다는 ― 를 설파하는 레이 티빙 경(이언 맥켈런 분)의 논거들에 사사건건 이의를 제기한다. “그건 한 학설일 뿐이죠.” “그건 증명되지 않은 가설입니다.” “그건 신앙심의 발로였습니다.” … 등등

우익 그리스도교 세력이 적극적으로 실력 행사에 나서지 않고 있는 데엔 다른 이유도 있다. 그들이 극렬 반대 행동을 할수록 영화 관람자 수는 더 늘어났음을 경험했다. 이는 마치 1980년대 한국에서 군사독재 정권이 급진 서적의 판매를 금지할수록 대중의 반발과 그 도서들에 대한 관심이 더 증대했던 것과 비슷하다.

이러한 반발의 이면에는 그리스도교 상층부의 보수성과 성추행 스캔들 은폐(특히 미국과 아일랜드의 가톨릭 교회의 경우)에 대한 대중적 환멸이 작용하고 있다.

사실, 영화 〈다빈치 코드〉는 주인공(들)이 음모에 의해 쫓기면서 사건에 얽힌 수수께끼를 풀어 간다는 전형적인 할리우드식 미스테리 스릴러일 뿐이다. 게다가 같은 장르의 다른 작품들보다 더 스릴 있는 것도 아니다. 다만, 지적인 스릴러라고는 할 수 있겠다.

그럼에도 주류 그리스도교의 여성 차별, 인간 성애(性愛)에 대한 고루한 태도, 답답한 전통과 교리, 의심스러운 성경의 권위에 대한 강조, 어두운 과거에 대한 은폐 따위에 식상한 사람들에게 그리스도교의 뿌리와 기초 자체가 그 지도자들의 공식 선전과는 다르고 지도자들은 진실을 감추기 위해 온갖 음모를 꾸며 왔다는 작품의 가정은 흥미를 끌 만하다.

이를 위해 작품은 많은 의문을 품게 한다. 그 의문들은 지적인 독자나 관람객이 관심을 갖고 토론하고 싶어할 만한 것들이다. 성경은 왜곡됐는가? 그렇다면 누가, 왜, 어떻게? … 등등

추측과 상상

그러나 〈다빈치 코드〉는 이에 대해 대부분 사실이 아니라 추측과 상상을 제시한다. 무수히 많은 허구적 진술들 가운데 지면 제약상 단지 몇 가지 사례만 들면 이렇다.

● 예수의 비밀과 혈통 보존에 헌신해 왔다고 〈다빈치 코드〉가 진술하는 시온수도회는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다. 물론 중세 때 그런 이름의 수도회가 존재했던 적이 있으나, 예수의 비밀 혈통 따위와는 아무 관계도 없었고, 그나마 1617년에 예수회로 흡수 통합됐다. 그 뒤, 나찌의 프랑스 꼭두각시 비시 정부를 지지했었던 피에르 플랑타르(1920~2000)라는 파시스트가 1956년 미성년자 유괴죄를 범하면서까지 왕정복고주의 단체를 결성했을 때 이 수도회 명칭을 부활시켰다. 이 자는 당시에 자신들이 만든 “시온수도회 비밀문서”가 위조품이었다고 1967년에 실토했다. 바로 그 날조 문서에 레오나르도 다빈치와 아이작 뉴턴 등이 수도회 회원이었던 것으로 돼 있다.

● 시온수도회의 군사 조직이라고 〈다빈치 코드〉가 주장하는 ‘성전기사단’은 실제로는 수도회와는 아무 관계 없는 순전한 정통 가톨릭 단체였다.

● 〈다빈치 코드〉는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그림 ‘최후의 만찬’ 속에서 예수 옆에 앉아 있는 사람이 여성이라고 진술한다. 그러나, 르네상스 시대에는 사도 요한을 마치 여성처럼 수염이 없고 머리를 길게 늘어뜨린 인물로 묘사하는 것이 관행이었다.

● 예수와 막달라 마리아의 결혼 사실이 “신약성서의 복음서들에 거듭 나온다”는 〈다빈치 코드〉의 진술은 참말이 아니다. 소설의 다른 곳에서도 예수의 결혼을 “역사적 기록의 문제”로 언급하고 있는데, 그런 기록은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 그런 ‘기록’으로 〈다빈치 코드〉는 신약성서의 네 복음서보다 적어도 1백50년이나 늦게 씌어진 빌립 복음서를 든다. 거기서 마리아를 “그리스도의 짝”이라고 지칭했고, 아람어로 “짝”은 배우자나 연인을 뜻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빌립 복음서는 아람어로 씌어져 있지 않고 콥트어(고대 이집트어)로 씌어져 있다. 그리고 “짝”에 해당하는 콥트어의 ‘hotre’는 그리스어 ‘koinonos’를 차용한 것으로, ‘배우자’나 ‘연인’이 아니라 ‘동지’ 또는 ‘동료’를 뜻하는 낱말이다.

● 유대인 남성이 미혼으로 사는 게 “유대인 예절에 어긋난다”는 〈다빈치 코드〉의 진술은 사실이 아니다. 가령 사해문서를 중심으로 결집한 유대교 분파는 전부 독신 남성들이었다.

● 〈다빈치 코드〉는 초기 크리스쳔들이 예수를 인간으로 여기고 있었으나 4세기 초 로마 황제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정치 권력을 동원해 예수를 신격화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리스도교의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문헌들인 바울의 친서들을 봐도 알 수 있듯이, 오히려 교회의 초창기일수록 크리스쳔들은 예수의 신성을 믿고 있었다. 4세기 초까지 기독교인의 주류는 예수를 신적인 존재로 여겼다.

● 〈다빈치 코드〉는 4세기 후반 신약성서에 포함될 책들의 목록이 확정됐을 때 배제된 책들(‘외경’이라고 한다)이 가부장주의를 배격하고, 여성주의를 고무하고, 신성한 여성을 경배했기 때문에 배제됐던 것이라고 주장한다. 아무 서점에서나 구입할 수 있는 외경을 읽어 보라. 이것이 전혀 사실이 아님을 알 수 있다.

포스트모더니즘

물론 이 작품은 소설이나 영화이지, 다큐멘터리가 아니다. 픽션이지, 논픽션이 아니다. 그럼에도 작가는 소설 시작 전에 “이 소설에 나오는 예술작품과 건물, 자료, 비밀 종교의식 들에 대한 모든 묘사는 정확한 것이다” 하고 쓴다.

이를 단순히 독자를 몰입시키기 위한 재치 있는 문학적 장치로 보아넘길 수는 없다. 레이 티빙 경과 여주인공 소피 느뵈의 다음 대화에서 드러나는 바와 같은 작품의 포스트모더니즘적 역사관 때문이다.

“나폴레옹도 말한 적이 있지. ‘역사란 합의된 우화에 지나지 않는다.’ …… 상그리엘 문서들[막달라 마리아에 대한 주장들을 입증하는 문서들]은 그리스도교의 다른 면을 단순히 얘기해 주는 거요. 결국 어느 쪽 이야기를 아가씨가 믿을 것인가는 믿음과 개인 탐구의 문제라오.”

영화에서는 이 대사가 끝무렵에 랭던이 느뵈(오드리 또뚜 분)에게 “[막달라 마리아와 관련해] 중요한 점은 당신이 무엇을 진실이라고 믿느냐는 것이오” 하고 말하는 걸로 살짝 각색된다.

이러한 포스트모더니즘 사상은 작가와 작품의 뉴에이지 종교관과 잘 어울린다. “[크리스쳔이냐는 질문에 ‘그렇다’고 대답하면서] 크리스쳔이라 함은 사람마다 제각기 다른 의미를 지닌다. …… 나는 내가 많은 종교의 구도자라고 생각한다.”(댄 브라운의 홈페이지)

순응주의를 수반할 수밖에 없는 이런 진부하고 얄팍한 자유주의는 교권주의와 여성 억압에 대한 진정한 반대가 아니다. 소설이든 영화든 〈다빈치 코드〉는 1999년 시애틀 시위 이후 진보 물결에 상업주의적으로 편승해 흐리마리하게 진보연하는 작품이다.